-
-
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평점 :
“나는 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내 가족에 대해서나 몇 달 전 밸을 만나기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밸을 만난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 입고 있는 옷, 아주 작은 일제 주머니칼, 최근까지 마법적으로 현금을 소환해 낸 짙은 색의 무광의 ATM 카드뿐이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달라고 했다.”
<p.13>
20대의 청년 틸러 바드먼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은 거의 700페이지를 육박하는 책을 시간대를 오가며 이야기를 관통하며 독자에게 틸러의 시점을 통해서만 정보를 제공하며 그 이야기를 따라가야 합니다. 작가가 그를 통해 전달하는 대화, 독백의 문장들은 제법 속도감 있게 이어지지만, 상황이나 심리를 설명하는 문장들은 제법 긴 문장들이 느리게 연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방향을 잃은 채 나뭇가지 끝에 걸린 연처럼, 틸러는 30대의 밸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그녀의 여덟 살짜리 아들 빅터 주니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방향을 잃은 것일 뿐, 방황하는 것이 아닌 상태.
그렇게 현재로 보이는 상황을 잇는 이야기에서 플래시백, 그가 밸에게 이유를 묻지 말라 요구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역사적인 지역 던바에서의 시간과 클라크라 불리는 아빠, 가족을 떠나버린 엄마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을 그저 스쳐지나가듯 들려줍니다. 잇따라, 일상을 벗어나는 만남과 여행, 그리고 그 여행지에서의 사건을 훑어내어 들려주는 틸러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그 사이를 사람과 기억과 물건들이 끼어들었다 빠지면서, 지금의 틸러 바드먼이라는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이렇게 있는지 해명(?)하려 듭니다. ‘해명’이라고 한 이유는, 그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그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길이 없어서 이고, 어쩌면 1인칭 주인공 시점 소설의 한계이자 난제이다 싶습니다.
“솔직히, 나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 최소한 내 죽음은.”
<p.157>
소설의 첫 문장 같이, 툭 튀어나온 모서리 같은 문장이 담백하게 자신의 심적 상태를 설명하면서도 도치된 문장구조는 틸러의 각오같은 비장미도 느껴집니다. 그래서, 수많은 독백 문장으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이야기이면서 심리학 서적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정신과 임상시험 대상 환자의 면담기록 같기도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 스스로와의 관계, 사건들 속에서 대처하고 후회했던 순간들에 대한 평가, 회한,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아들을 두고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정리되지 못한 마음들까지. 그래서, 두렵지 않다던 죽음은 어쩌면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20여년 인생을 채워온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고리들을 부정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혐의가 듭니다.
“우리는 아직 이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영 이사하지 않을지 몰랐다.”
<p.677>
“우리는 절반쯤 되는 지점에서 우리의 길을 찾을 뿐 영영 그곳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계속 나아간다. 눈을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준비된 채로.”
<p.699>
방향을 잃어 나뭇가지에 걸려있던 연은 어떻게 방향을 찾았을까? 수많은 만남과 이별, 사건과 사고들 속에서 틸러를 만지고 혹은 두들겨 패고 지나간 것들은 어떻게 그에게 남아있으며 어떻게 그를 앞으로 이끌어 갈까? 알 수 없다. 지금으로선. 다만, 그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는, 하지만 좀 더 튼튼한 연줄에 매여서 유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준비된 채로.
#도서협찬 #알에이치코리아 #타국에서의일년 #이창래 #장편소설
#소설 #소설스타그램 #소설추천 #독서그램 #책스타그램 #북리뷰 #RHK북클럽
#무엇을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