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여자의 세상 - 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
스즈키 이즈미 지음, 최혜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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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EBS에서 우연히 동물의 짝짓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연출을 하고, 작가가 대본을 쓰고 편집을 해서 그렇겠지만, 어느 하나 애절하지 않은 커플이 없고, 어느 하나 숨죽여지지 않는 커플이 없었습니다. 모든 수컷들은 열심이었고, 아름다웠고 더 눈에 띄어 성공하려고 무척이나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뜨였던 커플은 다름 아닌 달팽이의 짝짓기였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달팽이는 자웅동체, 하나의 개체 안에 수컷과 암컷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달팽이 두 마리가 점액으로 느리지만 성실히 흔적을 남기면, 이것에 서로를 발견하고 이끌리어 짝짓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탐색하고 쓰다듬다 보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구멍이 각자에게 생겨나는데, 상대의 이 구멍을 발견하고 자신의 뾰족한 창처럼 생긴 것을 먼저 공격하듯 찔러넣어 고통을 선사하는 쪽이 수컷역할을 하게 되는 식이었습니다. 간반의 차이로 암컷이 된 달팽이는 하는 수 없이 임신과 출산을 담당해야 하고 수컷은 그저 제 갈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끝이 났습니다. 임신과 출산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는 빨리 발견해서 먼저 공격해야 하는 샘인 것이지요.

“엣날, 지구에는 여자밖에 없었다. 평화롭게 살고 있었지만, 어떤 한 여자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아이를 낳았다. 체형도 기형이었지만 하는 일마다 난폭하고 거칠어서, 남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치고는 자손을 남기고 죽어버렸다. 그것이 남자족의 시작이다.”
<p.11 여자와 여자의 세상 중>

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을 표방하는 이 책 <여자와 여자의 세상>은 일곱 개의 단편소설과 네 개의 에세이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 중 소설 부분의 표제작인 단편 <여자와 여자의 세상>을 읽으면서, EBS의 동물 다큐를 떠올린 건 어쩌면 우연이었지만, 생생한 오버랩의 레퍼런스가 되었습니다. 여자뿐이던 평화로운 지구에 갑자기 등장해서 지구를 위험에 빠뜨릴 뻔 했던 쓸모없는 변종인 남자족. 다행히도 그 개체수가 줄어들어 이제는 교외의 거주구 내에서 가두어둔 상태의 세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여성 동성의 커플이 성역할을 분할하여 생활하고, 남자족의 얼굴만 등장해도 18금 영상물이 되는 세상. 독특한 이력의 작가 스즈키 이즈미가 그리는 근 미래(?)의 풍경들은 어쩌면 지금 21세기를 내다본 듯 기시감이 드는 구석이 다분한 짧지만 굵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여성으로서 여성을 훈계하는 듯도 합니다.
이렇듯 나머지 단편소설들과 에세이들은 여성으로의 작가 스스로의 정체성과 성담론을 얕지만 속속들이 담아내고 있고, 강요하지 않지만 설득되는 이러저러한 지점들을 형성하며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유기체처럼 문장들이 연동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컬렉팅되어 있어서 50년 전의 여성작가답지 않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로 연기를 하지만, 여배우는 사는 것 그 자체를 드러낸다. 여배우에게 연기는 허구가 아니라, 사는 것 그 자체라고 해도 좋다.”
<p.398 여배우의 자아 중>

SF소설가이면서, 모델과 핑크영화 배우, 연극배우, 각본가 등의 이력을 지닌 작가는, 여배우에 대한 견해를 의아하리만큼 반복적이고, 단정적으로 적어내기도 합니다. 남성중심의 시대, 특히 일본이라는 국가적 특수성 덕분인지, 지금의 페미니즘과는 궤를 크게 달리합니다. 하지만, 그 주장의 독특함을 넘어선 일탈의 감상이 지배적이라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시점의 페미니스트들의 공격거리가 될 소지가 다분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별 땅에 발 딛고 서서 SF적 상상력을 풀어헤친 그 시대의 도드라진 여성작가로서의 스즈키 이즈미는 눈여겨 볼만한 작가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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