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후쿠나가 다케히코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가 얀 투롭의 화사한 표지그림을 들여다봅니다. 봄볕에 눈이 부셔서인지 여인은 덜 감긴 두 눈으로 꽃 옆에 머뭅니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겨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이내 잿빛 겨울이 되고 맙니다.

 

나는 그 백일홍 나무에 사로잡혀 있었다. (p.9)

그후 나는 여름이 되어 나무가 활짝 꽃을 피우고 화려한 차림으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런 백일홍 나무에는 어떠한 감동도 일지 않았다. (p.10)

나는 늘 그러듯이 백일홍 나무의 가지를 쓰다듬었다. 가지는 공기보다 더한층 차갑게, ()의 본질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p.11)

그 건물은 운명의 악의(惡意)처럼 늘 사람을 기다리는 듯이 서 있었다. (p.12)

내가 백일홍 나무와 영안실 뒷문에 사로쟙혀 있었던 것처럼, 그도 역시 하나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 같은 요양원의 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는 타인의 죽음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너무 뒤늦게야 알았다. (p.15)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만큼의 고독을 품고, 저마다 폐쇄된 벽 안에 웅크린 채, 자신의 고독의 무게를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p.16)

이 상흔의 자각이 늘 우리의 고독을 채찍질했다. (p.17)

 

청춘들의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무척이나 커다란 그림자 드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십대의 그 청춘들에 드리운 질병이라는 그림자 보다 더한 것은 질병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병실, 간호사와 의사들, 두 개의 출구, 영안실 그리고 환자들. 흉곽 성형술, 스트렙토마이신, 폐엽 절제술, 객담 검사, 엑스레이 촬영, 외과 진단, 혈침 측정, 카프키 등급 그리고...

 

하지만 나는 내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오미 시게시, - 오로지 이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p.15)

 

폐결핵로 만난 같은 병실의 환자인 시오미 시게시라는 인물을 지켜보는 나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나아가는 형식의 소설 <풀꽃>은 액자식 구성이면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는 나아가며, 4개의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 겨울에서는 시오미 시게시와의 만남에서 이별을, 그리고 2장과 3장에서는 그가 남긴 두 권의 노트 속 이야기를, 마지막 4장은 시오미 시게시가 사랑했던 후지키 지에코 였던 이시이 지에코가 나에게 보내온 답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것이고, 나 역시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다. 다만 사람은 그것이 언제일지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일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p.59)

 

찬란하기만 할 그 시절은, 고독도 아픔과 슬픔도 있었기에 더욱 찬란해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에게 드리운 그림자조차도 젊음이라는 허세로 애써 무시하며 의연한 척 했지만 말입니다.

 

후지키 지에코, - 내가 청춘 시절에 사랑한 것은 이 소녀였다. (p.181)

 

그럼에도 사랑과 낭만을 결코 놓칠 수 없이 가득한 시간, 청춘입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뜨도 말입니다.

허나, 그 찬란한 청춘은 죽음이 오버랩되는 모순과 허상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사람들. 그 기억이 추억이 되도록,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부탁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산 자들의 기억과 함께 살아 있고, 살 자들의 죽음과 함께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죽음을 맞는다. 죽은 자에 대해 쓰는 것은 산 자의 의무인 것이다. (p.305_저자의 후기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