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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
법정 지음, 맑고 향기롭게 엮음, 최순희 사진 / 책읽는섬 / 2017년 5월
평점 :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법정 스님의 글과 함께 불일암을 십수 년 동안 오가며 사계절과 소소한 풍경을 담은 최순희 할머니의 사진을 엮은 책이다.
최순희 할머니는 이태 작가의 <남부군>에 등장하는 최문희의 실존 인물이다. 본명은 최순희.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이화여대를 다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신여성이었으나, 사회주의자였던 남편을 따라 북으로 건너가 평양 국립예술 극장의 공훈배우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광주로 향하다가 국군의 반격으로 지리산에 숨어들어 남부군 문화공작대 문화부장이 되었다. 1952년 생포돼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남부군의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와 방송의 주인공이 되었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북에 두고 온 아들 때문에 오랜 세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1970년대 후반 법정 스님이 글을 읽고 무작정 불일암으로 향했고 그녀의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불일암에 올라 암자의 잔일을 돌보았다. 아침나절에 찾아와 법정 스님께 꾸벅 절을 하고는 잔일을 돌보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산을 내려가곤 했는데 잊을 만하면 찾아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 서둘러 돌아가기를 되풀이했고 이를 본 법정 스님은 '번개처럼 왔다가 번개처럼 간다'라고 표현하셨단다.
정작 법정 스님과 대화를 나눈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행여 수행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눈에 안 띄는 곳만 찾아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다녀왔단다. 불일암을 오르내리는 동안 틈틈이 카메라에 담은 불일암의 사계를 담은 사진집 <불일암의 사계>을 비매품 도서로 펴내기도 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최순희 할머니의 사진집에 법정 스님의 글을 함께 엮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깊이 있고 절제된 문장을 통해 일상과 자연 속에 담긴 깨달음을 전해주는 법정 스님의 글을 오랜 시간 수행하신 불일암의 사계와 소담한 일상이 담긴 풍경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묵묵히 지켜봐 주는 법정 스님과 조용히 곁에 머물렀던 최순희 할머니 두 분의 마음이 빚어낸 책이다.
중간중간 소설가 정지아의 <땅에서의 슬픔은 땅의 것으로, 땅에서의 그리움은 땅의 것으로> 글을 통해 최순희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
삶을 아름답게 살아낸 사람의 향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을 법정 스님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깨달음을 주시는 글을 통해 다시금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자기 들여다보기 (35쪽)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대개 일시적인 충동과 변덕과 기분, 그리고 타성에 젖은 습관과 둘레의 흐름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헤어나려면 밖으로 눈을 뜰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맑게 들여다보는 새로운 습관을 길들여야 한다.
『물소리 바람소리』, 「풍요로운 감옥」에서
꽃이 서로를 느끼는 방법 (48쪽)
서로의 향기로써 대화를 나누는 꽃에 비해 인간들은 말이나 숨결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꽃이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느낀다.
인간인 우리는 꽃에게 배울 바가 참으로 많다.
『홀로 사는 즐거움』, 「봄은 가도 꽃은 남고」에서
이미 부처 (50쪽)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란 곧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겁니다.
외부에 절대적인 존재를 가설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이미 이루어진 부처이니 순간순간 부처답게 살라는 것 아닙니까?
부처란 밝은 마음이고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눈을 뜬 사람이 어째서 다시 눈을 감으려 하고,
밝은 마음을 가지고 왜 어두운 짓을 하려고 하는가,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입니다.
『산방한담』, 「정법에 귀의」에서
선행이란 (132쪽)
흔히들 마음을 맑히라고, 비우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마음을 맑히는 법이라고 얘기하는 이는 없다.
또 실제 생활이 마음을 비우고 사는 이처럼 여겨지는 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다.
마음이란 결코 말로써, 관념으로써 맑혀지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선행을 했을 때 마음은 맑아진다.
선행이란 다름 아닌 나누는 행위를 이른다.
내가 많이 가진 것을 거저 퍼주는 게 아니라 내가 잠시 맡아 있던 것들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행위일 뿐이다.
- 맑고 향기롭게 발족 취지문 중에서
버리고 또 버리기 (137쪽)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무소유』, 「무소유」에서
무언가를 갖는다는 건 (163쪽)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 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를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가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무소유』, 「무소유」에서
절에 가면 선방 앞 섬돌에 이런 표찰이 붙어 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비칠 조, 돌아볼 고, 다리 각, 아래 하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살피라는 뜻이다.
자기가 서 있는, 지금 자기의 현실을 살피라는 것이다.
섬돌 위에다가 그런 표찰을 붙여놓는 것은 신발을 바르게 벗으라는 뜻도 되지만, 그건 지엽적인 뜻이다.
본질적인 뜻은 그런 교훈을 통해서 현재 자기가 서 있는 자리, 그 현실을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자기 안을 들여다보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