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타로카드 상담소가 아니다 ㅣ 스펙트럼 시리즈 1
허선아 지음 / 세종마루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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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타로카드 상담소가 아니다> 허선아, 세종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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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만 보고서 든 생각은, 이 책이 만약 클리셰 범벅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책의 내용은 골목 어귀 아늑한 타로 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사연을 보듬어주는 따스한 힐링 판타지가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이야기가 그저그런 위로를 건넬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타로카드는 낯선 세계로 들어서는 손잡이일 뿐, 소설이 진짜 겨누고 있는 것은 인간의 기억이라는 소재였다. 고통스러운 기억만 쏙 골라 도려낼 수 있다면 삶은 정말 편안해질까? 소설은 그 은밀하고도 달콤한 환상을 무척이나 집요하게 흔들어 깨우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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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이솔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실에서 도망치는 중이다. 유주는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얻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거짓된 껍데기 뒤로 숨어드는 캐릭터이다. 그리고 재민은 과거의 폭력적인 기억에 발이 묶여 특정한 시간대에 갇힌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타로 상담사 이솔이 이들의 엉킨 매듭을 풀어줄 해결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정작 이솔 본인 역시 마주하기 두려워 외면해 온 기억의 그림자를 안고 있음이 점차 드러난다. 누군가 마법처럼 나타나 인생을 대신 구원해 주는 동화는 솔직히 재미가 없다. 이 소설은 타인의 손에 기대어 고통을 손쉽게 지우는 대신, 각자가 외면해 온 자기 몫의 기억 앞에 스스로 마주 서야만 비로소 다음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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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이야기의 무대가 기억거래소로 확장되는 지점부터 소설의 긴장감은 점점 올라간다.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곳인 줄 알았는데 그곳의 실상은 오히려 비정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르는 곳이었다. 가장 내밀하고 고유해야 할 영혼의 조각들에 가격표가 매겨지는 광경은 꽤나 섬뜩하게 느껴졌다. 살다 보면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럽고 아픈 순간이 한두 개쯤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감정들을 손쉽게 숫자로 환산하고 거래하는 순간 인간의 본질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책은 선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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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기억만 깨끗이 지워버린다면 정말 마음이 가벼워질까? 소설은 기억과 상처가 그렇게 두부 자르듯 깔끔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했다. 기억을 없앤다고 해서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의 흔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내가 왜 불안한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아픈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영문 모를 텅 빈 결핍 속을 헤매게 되지는 않을까? 상처를 극복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내 삶에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흉터를 안고서라도 오늘 하루를 덤덤히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한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던 과오나 뼈아픈 실패, 타인에게 할퀴였던 아픈 기억들까지도 실은 지금의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소중히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재료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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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정말로 지울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기억을 없애고 싶을까라는 질물을 자문해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부끄러웠던 실패나 괴로웠던 이별의 순간들을 선뜻 골라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픈 시간들을 지나오며 비로소 단단해진 지금의 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추억들이 다 소중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완전무결하게 행복한 순간만으로 채워진 삶은 어디에도 없음에 틀림없다. 기쁘고, 부끄럽고, 서글프고, 후회스러운 모든 기억들이 뒤섞여 한 사람의 고유한 얼굴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환상 속으로 도망치지 않고 못난 기억까지 내 것으로 껴안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내 삶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오늘도 손에 쥐어야 할 가장 현실적인 용기일 것이다.



* 이 책은 세종마루(@sjmarubooks)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이곳은타로카드상담소가아니다 #허선아 #세종마루 #타로카드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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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하는 뇌 - 오늘의 선택을 내일의 자산으로 만드는 생각법
가미오카 마사아키 지음, 류두진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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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하는 뇌 - 오늘의 선택을 내일의 자산으로 만드는 생각법> 가미오카 마사아키, 오픈도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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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하는 뇌』라는 제목을 처음 마주했을 때, 솔직히 내가 잘 안 읽는 자기계발+생활경제 서적의 느낌이라 조금은 거부감이 들긴 했다. 하지만 책을 너무 편식하면 나만의 필터버블에 갇혀버릴 거란 생각에 출판사에서 해주신 서평 제안을 덥석 받았다. 나름대로 새로운 도전을 한 셈이다. 이 책의 제목 속 ‘뇌’는 생물학적 기관이라기보다는 삶 전체를 대하는 사고방식과 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정의하는 투자는 주식이나 부동산에 시드머니를 넣는 행위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오늘 내게 주어진 돈과 시간, 지식과 경험을 어디에 배분하고, 그것이 훗날 나에게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를 설계하는 모든 일상의 선택이 곧 투자라고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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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꽤나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 대목은 저자가 제시하는 ‘두뇌 자산, 경험 자산, 금융 자산’의 선순환 구조였다. 두뇌 자산은 새로운 지식과 관점을 배우며 내면을 확장하는 지적 자산을, 경험 자산은 직접 시도하고 실패하며 온몸으로 체득한 감각과 노하우를 의미한다. 그리고 금융 자산은 두뇌와 경험 자산이 단단해지며 만들어낸 소득과 자본을 뜻한다. 지식을 쌓아 두뇌 자산을 만들고, 이를 실행으로 옮기며 실패와 부딪히는 가운데 경험 자산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이 두 자산이 축적되면 자연스레 더 나은 판단을 내리게 되어 소득과 금융 자산의 성장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저자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복리라는 개념을 통장 잔고의 이자에만 적용하기 쉽지만, 저자는 이 복리의 법칙을 인간의 성장과 인생 전체로 확장해 보여준다. 이 점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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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몇천 원짜리 물건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을 때는 가성비를 꼼꼼히 따지면서도, 스마트폰 화면을 무의식적으로 넘기며 한두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에는 이상할 만큼 관대해지는 요즘이다. 그러나 돈보다 훨씬 회수하기 어렵고 비가역적인 진짜 자산은 바로 시간일테다. 책이 짚어내는 기회 손실의 개념 역시 내 삶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통장에서 당장 돈이 빠져나가면 손실이라며 발을 동동 구르지만, 실패가 두려워 시작조차 하지 않은 일이나 망설이다 놓쳐버린 기회는 좀처럼 손실로 계산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시도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몇 년이 흐른 뒤 그때 해볼걸, 가볼걸, 배워볼걸하며 남는 뒤늦은 후회는 통장에만 찍히지 않을 뿐 가장 뼈아픈 기회 손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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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충분히 준비한다는 핑계로 머뭇거리다 결국 시작조차 하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완벽하게 준비하려던 태도의 이면에는 실은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비겁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일단 실행해서 겪는 실패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 번 부딪혀 실패를 겪고 나면 적어도 다음에는 무엇을 조심하고 피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패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무런 배움과 경험 자산도 남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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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쭉 읽으며, 투자는 수중에 큰돈이 쥐어진 뒤에야 비로소 시작하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가진 한 시간, 지금 읽고 있는 책 한 권, 내가 겪어낸 크고 작은 경험들을 하나의 가치 있는 자산으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투자는 시작될 수 있다.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앞으로 얼마를 벌어야 할까라는 조급한 마음과 생각 대신, 오늘 하루를 성찰해보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오늘 내가 쓴 돈과 시간은, 내일의 나에게 과연 어떤 자산으로 남을까?



* 이 책은 오픈도어북스(@opendoorbooks7)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투자하는뇌 #가미오카마사아키 #오픈도어북스 #자기계발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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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 -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장편소설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지음, 최혜정 옮김 / 슬로우리드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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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슬로우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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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라는 제목이 주는 임팩트가 강하지만, 영어로 필링(peeling)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강남의 피부과나 성형외과에서 매끈한 피부위해 많은 사람들이 받는 시술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주인공 지호는 사람들의 얼굴을 원하는 형태로 고치고 가다듬는 성형외과 의사다. 하지만 소설이 벗겨내고자 하는 것은 상처받기 두려워 통제와 단절 뒤로 숨어버린 현대인의 마음이 아닌가 한다. 바깥쪽 껍질을 한 꺼풀 벗겨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인간 내면의 민낯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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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의 연인 ‘성미’는 그의 취향에 맞춰 외모와 성격이 세팅된 AI 리얼돌이다. 성미는 지호의 말이나 제안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고, 서운해 하며 토라지거나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사람 사이의 극심한 피로를 유발하는 감정 소모를 겪어본 이들이라면 지호가 이 인위적인 관계에서 느끼는 안도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호는 완벽하게 통제된 이 관계 속에서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미가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그것이 프로그래밍된 출력값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는 인형에게서 또 다른 피로감을 느끼고 만다.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복종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통제를 벗어난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진짜 마음을 갈망하는 지호의 모습은 대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다른 질문을 던지는 듯 했다. 완벽한 복종과 자발적인 사랑은 애초에 한자리에서 공존할 수 없는 모순 관계이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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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성형외과와 AI 리얼돌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욕망을 그대로 비춘다. 성형외과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와 노화의 흔적을 잘라내고 수정하는 공간이다. AI 리얼돌 연인은 갈등과 상처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채 오직 쾌적함만 남겨둔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SNS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손쉽게 차단하는 캔슬 컬쳐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편안한 취향의 필터 버블과 에코 챔버 속에 안주하는 태도와 정확히 닮아 있다. 조금이라도 번거롭거나 통제되지 않는 타인을 견디지 못하고 일상을 손쉽게 편집하려는 현대인의 욕망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등장하는 존재가 바로 AI 리얼돌인 성미인 셈이다. 팬데믹 시기의 거리두기와 마스크라는 소설 속 배경 역시 이러한 고립과 감정적 단절을 한층 더 자연스럽게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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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출신 작가가 한국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며 포착해 낸 사회적 풍경들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강남의 첨단 의료기술과 AI 리얼돌 연인이라는 미래적 소재 옆에 제주도의 해녀 문화와 무속신앙, 가족의 굴레가 나란히 배치된다.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조합은 오히려 현실의 우리 모습을 꽤 정확하게 드러내지는 않나 생각이 든다. 가장 합리적이고 기술적인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삶의 불안과 죽음 앞에서는 여전히 사주와 점에 기대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한국 사회의 이면을 외부인의 날카로운 눈으로 담아낸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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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한 의사라는 사회적 가면도, 취향대로 맞춰진 완벽한 연인도,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도 모두 벗겨낸 뒤 남는 것은 결국 상처는 피하고 싶지만 혼자 남겨지기는 싫은 결핍으로 가득찬 한 인간의 초라한 초상이었다. 책을 덮고 나면 나와 꼭 맞는 상대를 찾아 통제하려 애쓰는 일보다, 끝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불완전한 타인을 곁에 두고 그 마찰을 견뎌내는 연습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짜 인간성임을 조용히 생각하게 되었다.



* 이 책은 슬로우리드(@slowread_publishing)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슬로우리드 #박피 #소설 #베로니카곤살레스라포르테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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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교실 - 개정증보판
김규아 지음 / 북스그라운드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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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교실> 김규아, 북스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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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아 작가의 그래픽노블 『밤의 교실』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은, 주인공 정우가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워도 오래 씨름하다 보면 결국 하나의 명확한 답에 가닿기 때문에 수학을 좋아한다는 정우. 정확한 시간과 명쾌한 규칙, 정해진 공식까지. 세상이 수학처럼 정확하게만 움직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우의 삶에 닥쳐온 현실은 수학의 특성과는 꽤나 멀었다. 부모님이 서로 멀어져 버린 문제, 그리고 언젠가 완전히 앞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시력 상실의 예고.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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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닥쳐올 때, 차라리 통제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마음을 기대게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불안해질수록 정확한 숫자와 규칙에 매달리는 정우의 모습이 마음 아프면서도 공감이 많이 갔다. 특히 아빠로부터 "끝없는 밤이 올 수도 있다"라는 말을 듣고 난 뒤, 혼자 두 눈을 가린 채 방 안의 어둠 속을 걸어보는 장면은 유독 서글펐다. 닥쳐올 가혹한 미래를 견뎌내기 위해 어린아이가 홀로 맞이할 어둠에 대비하는 마음의 무게는 쉽게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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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정우 앞에 어느날 늑대 선생님이 나타난다. 빛에 약해 낮에는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며, 오히려 해가 진 밤을 사랑하는 음악 선생님. 늑대 선생님은 해 질 녘 아이들을 학교로 불러 모아 조용히 ‘밤의 교실’을 연다. 동화 같은 설정이지만, 작가는 이 캐릭터를 그저 흔한 메시아 정도로 그려내지 않는다. 늑대 선생님은 정우의 눈을 낫게 해주지도 않고,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식의 무책임한 낙관을 건네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 역시 남들과 다른 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려주며, 빛이 사라진 밤에도 누릴 수 있는 풍경과 소리가 얼마나 많은지를 묵묵하게 보여준다. 이 지점이 무척 감동적이면서도 마음을 찡하게 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로하는 일은 그 사람의 고통에 억지 답안지를 쥐여주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저 곁에서 그 밤을 함께 버텨주는 것임을, 책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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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좋아하던 정우에게 늑대 선생님이 재즈를 들려주는 내용도 정말 좋았다. 수학에는 오직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지만, 재즈에는 고정된 정답이 없다. 연주하는 사람의 호흡과 그날의 감정에 따라 선율은 자유롭게 흐르고 연주 도중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이 끼어들어도 연주는 중단되지 않는다. 어쩌면 정우가 마주할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초에 계획했던 궤도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삶 전체가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악보대로 연주할 수 없다면, 내게 주어진 새로운 음을 가지고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연주를 이어가면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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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흐를수록 늘 바닥만 내려다보며 걷던 정우의 시선은 천천히 주변으로 향한다. 나무와 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친구들의 표정을 기억하려 애쓰며,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 변화는 보지 못하게 되기 전에 눈에 담아두자는 식의 체념이 아니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겨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을 이제는 온 감각으로 제대로 마주하기 시작한 정우의 노력인 것이다. 색연필 특유의 결이 살아있는 부드럽고 몽글몽글한 그림체는 이 차분한 변화를 과장 없이 조용히 보여준다. 오랜만에 어른들을 위한 마음 따뜻한 동화를 본 것 같아,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 이 책은 북스그라운드(@booksground)에서 제공받아 독서모임 진행을 했습니다.


at @yamongyamong_ss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hiwonna_bier @apureumdite @i_am_what_i_read


#밤의교실 #김규아 #북스그라운드 #독서모임지원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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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경험의 이야기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저녁달 편집부 옮김 / 저녁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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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경험의 이야기> 루이자 메이 올콧, 저녁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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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메이 올콧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개 『작은 아씨들』의 따뜻하고 포근한 가족 서사를 먼저 떠올릴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기에 『일: 경험의 이야기』라는 제목은 꽤나 낯설었던 게 사실이었다. 사랑, 운명같은 낭만적인 단어 대신, 매일 아침 우리를 현실의 책상 앞으로 불러 세우는 바로 그 ‘일(Work)’을 제목에 들어가다니! 하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주인공 크리스티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왜 올콧이 이 책에 '일'과 '경험'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는지를 차근차근 알아갈 수 있었다.


🧵

스물한 살의 크리스티 데번은 남에게 기대어 안주하는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힘으로 밥벌이를 하겠다며 집을 나선다. 대단한 야망이나 특출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가정부로 시작해 연극배우, 가정교사, 말벗, 재봉사, 그리고 남북전쟁의 간호사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동을 찾아나서고 그 일에 투신한다. 크리스티는 지금하고 있는 일이 자신이 꿈꿔왔던 모습과 멀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이미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미련을 남기기 보다는 과감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살다 보면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아까워 맞지 않는 일이나 관계를 억지로 붙들고 늘어질 때가 많은 게 우리들의 인생이다. 그런 차원에서, 잘못 들어선 길임을 깨달았을 때 주저 없이 발걸음을 돌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크리스티가 참 단단하고 강인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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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크리스티가 언제나 완벽하거나 현명한 선택만 내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때로는 허영심에 흔들리고, 자신의 결정을 끝없이 자책하기도 하며, 가난과 고독에 지쳐 삶의 끈을 놓아버릴 뻔한 깊은 절망의 순간을 통과하기도 한다. 하지만 온갖 직업의 현장에서 겪은 수많은 부딪힘은 그녀 안에서 고스란히 경험이라는 단단한 자산으로 축적된다. 처음 집을 나설 때 크리스티가 갈망했던 독립은 단순히 스스로 돈을 벌어 먹고사는 경제적 자립이었다. 하지만 간호사, 재봉사, 가정부 등 다양한 층위의 노동을 거치며 그녀가 얻은 것은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시야, 즉 나와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고통을 깊이 헤아리고 연대할 수 있는 포용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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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대하는 올콧 작가의 시선 역시 19세기 당대로서는 파격적이었을 것 같다. 크리스티에게 사랑은 소중하지만 삶의 최종 목적지나 안식처가 아니었다. 경제적 안정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굴종적인 청혼에 응하지 않으며, 동등한 인격체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관계는 단호히 거절한다. 더욱이 흔한 고전 소설들처럼, 결혼을 이야기의 완결로 삼지 않고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한 인간의 고유한 삶과 사회적 실천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사실을 뚝심 있게 보여준다. 후반부에 이르러 이 소설이 정의하는 독립은 고립된 개인주의를 완전히 뛰어넘는다. 헵시, 레이철, 헬렌, 윌킨스 부인 등 크리스티가 지나온 길목마다 손을 내밀어 준 여성들과의 느슨하고도 단단한 연대는 독자들에게 또 다른 울림을 준다. 결국 진정한 자립이란 타인에게 기꺼이 도움을 받고 다시 다른 이에게 다정하게 손을 건넬 줄 아는 성숙함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다.


💼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이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인 1873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이다. 직업을 바꾸고, 밥벌이와 자아실현 사이에서 방황하며,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이 과연 맞는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크리스티의 번뇌와 고민은 오늘날 우리의 고민과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 있는 것 같다.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은 결코 삶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티를 어른스럽게 빚어낸 것 역시 넘어지고 일어나며 거쳐온 무수한 직업과 사람, 그리고 선택들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 역시 한층 더 본질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 이 책은 저녁달출판사(@eveningmoon_book)에서 제공받아 독서모임 진행을 했습니다. 

at @yamongyamong_ss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hiwonna_bier @apureumdite @i_am_what_i_read


#일경험의이야기 #루이자메이올콧 #저녁달 #독서모임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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