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피 -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장편소설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지음, 최혜정 옮김 / 슬로우리드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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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슬로우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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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라는 제목이 주는 임팩트가 강하지만, 영어로 필링(peeling)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강남의 피부과나 성형외과에서 매끈한 피부위해 많은 사람들이 받는 시술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주인공 지호는 사람들의 얼굴을 원하는 형태로 고치고 가다듬는 성형외과 의사다. 하지만 소설이 벗겨내고자 하는 것은 상처받기 두려워 통제와 단절 뒤로 숨어버린 현대인의 마음이 아닌가 한다. 바깥쪽 껍질을 한 꺼풀 벗겨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인간 내면의 민낯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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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의 연인 ‘성미’는 그의 취향에 맞춰 외모와 성격이 세팅된 AI 리얼돌이다. 성미는 지호의 말이나 제안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고, 서운해 하며 토라지거나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사람 사이의 극심한 피로를 유발하는 감정 소모를 겪어본 이들이라면 지호가 이 인위적인 관계에서 느끼는 안도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호는 완벽하게 통제된 이 관계 속에서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미가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그것이 프로그래밍된 출력값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는 인형에게서 또 다른 피로감을 느끼고 만다.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복종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통제를 벗어난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진짜 마음을 갈망하는 지호의 모습은 대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다른 질문을 던지는 듯 했다. 완벽한 복종과 자발적인 사랑은 애초에 한자리에서 공존할 수 없는 모순 관계이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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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성형외과와 AI 리얼돌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욕망을 그대로 비춘다. 성형외과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와 노화의 흔적을 잘라내고 수정하는 공간이다. AI 리얼돌 연인은 갈등과 상처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채 오직 쾌적함만 남겨둔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SNS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손쉽게 차단하는 캔슬 컬쳐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편안한 취향의 필터 버블과 에코 챔버 속에 안주하는 태도와 정확히 닮아 있다. 조금이라도 번거롭거나 통제되지 않는 타인을 견디지 못하고 일상을 손쉽게 편집하려는 현대인의 욕망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등장하는 존재가 바로 AI 리얼돌인 성미인 셈이다. 팬데믹 시기의 거리두기와 마스크라는 소설 속 배경 역시 이러한 고립과 감정적 단절을 한층 더 자연스럽게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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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출신 작가가 한국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며 포착해 낸 사회적 풍경들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강남의 첨단 의료기술과 AI 리얼돌 연인이라는 미래적 소재 옆에 제주도의 해녀 문화와 무속신앙, 가족의 굴레가 나란히 배치된다.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조합은 오히려 현실의 우리 모습을 꽤 정확하게 드러내지는 않나 생각이 든다. 가장 합리적이고 기술적인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삶의 불안과 죽음 앞에서는 여전히 사주와 점에 기대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한국 사회의 이면을 외부인의 날카로운 눈으로 담아낸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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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한 의사라는 사회적 가면도, 취향대로 맞춰진 완벽한 연인도,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도 모두 벗겨낸 뒤 남는 것은 결국 상처는 피하고 싶지만 혼자 남겨지기는 싫은 결핍으로 가득찬 한 인간의 초라한 초상이었다. 책을 덮고 나면 나와 꼭 맞는 상대를 찾아 통제하려 애쓰는 일보다, 끝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불완전한 타인을 곁에 두고 그 마찰을 견뎌내는 연습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짜 인간성임을 조용히 생각하게 되었다.



* 이 책은 슬로우리드(@slowread_publishing)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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