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타로카드 상담소가 아니다 ㅣ 스펙트럼 시리즈 1
허선아 지음 / 세종마루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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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타로카드 상담소가 아니다> 허선아, 세종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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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만 보고서 든 생각은, 이 책이 만약 클리셰 범벅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책의 내용은 골목 어귀 아늑한 타로 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사연을 보듬어주는 따스한 힐링 판타지가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이야기가 그저그런 위로를 건넬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타로카드는 낯선 세계로 들어서는 손잡이일 뿐, 소설이 진짜 겨누고 있는 것은 인간의 기억이라는 소재였다. 고통스러운 기억만 쏙 골라 도려낼 수 있다면 삶은 정말 편안해질까? 소설은 그 은밀하고도 달콤한 환상을 무척이나 집요하게 흔들어 깨우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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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이솔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실에서 도망치는 중이다. 유주는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얻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거짓된 껍데기 뒤로 숨어드는 캐릭터이다. 그리고 재민은 과거의 폭력적인 기억에 발이 묶여 특정한 시간대에 갇힌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타로 상담사 이솔이 이들의 엉킨 매듭을 풀어줄 해결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정작 이솔 본인 역시 마주하기 두려워 외면해 온 기억의 그림자를 안고 있음이 점차 드러난다. 누군가 마법처럼 나타나 인생을 대신 구원해 주는 동화는 솔직히 재미가 없다. 이 소설은 타인의 손에 기대어 고통을 손쉽게 지우는 대신, 각자가 외면해 온 자기 몫의 기억 앞에 스스로 마주 서야만 비로소 다음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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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이야기의 무대가 기억거래소로 확장되는 지점부터 소설의 긴장감은 점점 올라간다.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곳인 줄 알았는데 그곳의 실상은 오히려 비정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르는 곳이었다. 가장 내밀하고 고유해야 할 영혼의 조각들에 가격표가 매겨지는 광경은 꽤나 섬뜩하게 느껴졌다. 살다 보면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럽고 아픈 순간이 한두 개쯤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감정들을 손쉽게 숫자로 환산하고 거래하는 순간 인간의 본질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책은 선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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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기억만 깨끗이 지워버린다면 정말 마음이 가벼워질까? 소설은 기억과 상처가 그렇게 두부 자르듯 깔끔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했다. 기억을 없앤다고 해서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의 흔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내가 왜 불안한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아픈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영문 모를 텅 빈 결핍 속을 헤매게 되지는 않을까? 상처를 극복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내 삶에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흉터를 안고서라도 오늘 하루를 덤덤히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한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던 과오나 뼈아픈 실패, 타인에게 할퀴였던 아픈 기억들까지도 실은 지금의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소중히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재료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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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정말로 지울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기억을 없애고 싶을까라는 질물을 자문해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부끄러웠던 실패나 괴로웠던 이별의 순간들을 선뜻 골라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픈 시간들을 지나오며 비로소 단단해진 지금의 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추억들이 다 소중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완전무결하게 행복한 순간만으로 채워진 삶은 어디에도 없음에 틀림없다. 기쁘고, 부끄럽고, 서글프고, 후회스러운 모든 기억들이 뒤섞여 한 사람의 고유한 얼굴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환상 속으로 도망치지 않고 못난 기억까지 내 것으로 껴안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내 삶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오늘도 손에 쥐어야 할 가장 현실적인 용기일 것이다.



* 이 책은 세종마루(@sjmarubooks)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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