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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 주식회사 - 앎, 불구, 흩어져 존재하기의 인류학
엘렌 미알레 지음, 김연화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2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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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 주식회사 - 앎, 불구, 흩어져 존재하기의 인류학> 엘렌 미알레, 동녘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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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던 시절, 과학과 기술이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는 방식을 다룬 이론들 중에서도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을 유독 흥미로웠다. 과학적 사실이나 위대한 발견이 연구자의 순수한 영감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의 도구, 시약, 논문, 연구비, 동료 같은 수많은 인간과 비인간 행위소(actant)들이 촘촘하게 결합한 네트워크 속에서 비로소 구축된다는 시선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과학사회학자 엘렌 미알레의 『호킹 주식회사』는 바로 그 ANT의 렌즈를 통해 20세기 가장 상징적인 천재, 스티븐 호킹을 집요하게 추적한 책이다. 제목만 언뜻 보면 호킹을 둘러싼 대중적 명성이나 미디어 상업주의의 이면을 들춰내는 저널리즘 비평서처럼 보이지만,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훨씬 더 근본적이다.
"호킹이라는 주체는 과연 어디까지가 호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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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 책이 결코 호킹의 천재성은 사실 주변 사람들이 다 만들어준 가짜 신화였다라고 폭로하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라투르가 과학을 네트워크로 설명했다고 해서 과학적 진실을 부정하지 않았듯, 미알레 역시 호킹의 업적을 깎아내려 평범한 사람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신 한 사람의 탁월한 지성과 독창성이란 애초부터 타인과 사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호킹의 천재성은 홀로 고립된 뇌 속에 갇혀 있던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정교한 네트워크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발현되고 지탱될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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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천재 물리학자'를 상상할 때 칠판 앞에 홀로 서서 우주의 비밀을 계산해 내는 고독한 두뇌를 떠올린다. 하지만 호킹의 실제 연구 현장을 들여다보면 그 그림은 금세 입체적인 생태계로 바뀐다. 그의 머릿속 사유를 칠판에 대신 그려주고 수식을 전개해 주는 대학원생들, 그의 미세한 표정과 시선을 읽어내는 숙련된 간병인들, 맞춤형 휠체어와 음성 합성 컴퓨터의 알고리즘, 그리고 복잡한 물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돕는 기하학적 다이어그램까지. 이 모든 인간과 기계, 시각 자료가 하나로 맞물려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호킹의 물리학’이라는 사건이 성립했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었던 호킹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인간의 사고와 주체성이 얼마나 많은 타인의 조력과 기술적 매개에 기대어 존재하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상징이었다. 그는 고립된 천재가 아니라, 가장 정교하게 직조된 지적 네트워크의 중심 노드(Node)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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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언론과 대중은 수상자 개인의 천재성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결코 단 한 명의 영웅이 깃발을 꽂는 고독한 레이스가 아니다. 수많은 연구실의 실패한 데이터, 무명의 대학원생들과 테크니션들의 묵묵한 노동, 촘촘한 학술 인프라가 오랜 세월 층층이 쌓여 만들어낸 거대한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이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선택과 집중’, 즉 소수의 스타 과학자나 성과가 검증된 연구실에만 자원을 몰아주는 방식은 깊은 우려를 낳는다. 호킹이라는 존재가 수많은 매개체와 조력자라는 네트워크 없이는 한 줄의 수식도 쓸 수 없었듯, 탁월한 연구 성과는 오직 비옥하고 다양한 연구 생태계의 토양 위에서만 싹을 틔울 수 있다. 현대 과학 전체가, 나아가 지적 노동을 수행하는 우리 모두가 수많은 타인과 도구의 그물망에 빚을 지고 살아가는 하나의 거대한 ‘주식회사’다. 그 연결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한 사람의 영웅에 열광하는 얕은 시선을 넘어, 그를 가능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토양과 연구 생태계 전체를 가꾸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은 동녘(@dongnyokpub)에서 제공받아 독서모임 진행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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