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터 - 나는 AI로 인생을 바꿨다
비기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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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프터 - 나는 AI로 인생을 바꿨다> 비기,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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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AI를 그 누구보다도 잘 다루는 사람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물론 상당히 잘 다룬다고 자신할 수는 있지만...). 연구실에서는 매일 복잡한 모델과 데이터셋을 들여다보고, 틈이 날 때면 클로드 코드로 필요한 스크립트를 짜거나 생성형 AI로 서평 카드뉴스에 넣을 이미지를 뽑아내지만, 원하는 결과물이 첫 시도에 매끄럽게 떨어지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프롬프트와 씨름하다가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면 "이럴 바엔 내가 직접 쓰거나 그리는 게 훨씬 빠르겠다"라며 신경질적으로 브라우저 창을 닫아버리는 날도 드문드문 있었다. 그러고는 다음 날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작업 창을 켠다. 그렇기에 『크래프터: 나는 AI로 인생을 바꿨다』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다른 고수들은 어떻게 프롬프트를 작성하는 지 너무 구미가 당겼다. 그리고 책을 넘기며 마주한 저자의 고투와 무수한 시행착오의 기록이 눈물겨우면서도 많은 공감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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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비기 작가는 인공지능의 내부 구조를 훤히 꿰뚫고 시작한 기술적 전문가가 아닌 듯 하다. 다만 수없이 많은 명령어를 던져보고, 어그러진 결과물에 실망하면서도 끝내 자신만의 문법을 다듬어 이를 실제 콘텐츠와 비즈니스로 확장해 낸 생생한 경험자임에는 틀림없는 듯 하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저자의 포기하지 않는 태도였다. 소셜 미디어에 떠도는 다른 사람들의 멋진 AI 결과물을 보며 감탄하는 일은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AI가 내놓은 볼품없고 어설픈 첫 결과물을 마주했을 때, 실망해 창을 닫아버리는 대신 끝까지 씨름하며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고쳐서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소비자'와 '장인(Crafter)'을 가르는 분수령은 바로 그 집요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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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뼈대를 이루는 'CRAFTER'라는 공식은 AI와 대화할 때 맥락을 명확히 설정하고, 역할과 과업을 구체화하며, 형식과 근거를 짚어준 뒤 결과물을 다시 검토하는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의미한다. 사실 프롬프트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다뤄본 사람이라면 개별 원칙 자체가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고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파편화되어 있던 요령들을 하나의 정돈된 틀로 묶어낸 구성은 이제 막 AI를 실무에 도입하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작업이 꼬였을 때, 내가 맥락을 빠뜨렸는가, 과업의 범위를 뭉툭하게 던졌는가, 형식의 가이드라인을 주지 않았는가 등의 항목들을 역추적하며 내 지시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만드는 '체크리스트'로서의 가치가 무척이나 크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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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 역시 AI를 일상적인 도구로 깊숙이 써온 입장에서, 이 책에 대한 몇 가지 현실적인 아쉬움도 들었다. 책이 강조하는 것처럼 프롬프트를 아무리 장문으로 정교하게 작성한다고 해서 늘 최상의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AI가 능청스럽게 내놓은 그럴듯한 오류를 의심하고, 생성된 코드가 실제 환경에서 에러 없이 돌아가는지 검증하며, 생성된 이미지가 내가 전달하려는 글과 적절히 맞닿아 있는지를 판별하는 최종적인 안목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때로는 공들여 쓴 한 편의 거대한 프롬프트보다, 짧은 호흡으로 서너 차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조율해 나가는 기민한 상호작용이 훨씬 더 높은 완성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책을 덮으며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은 거창한 'AI 기술 트렌드'가 아니라, 작은 작업을 끝내 완성해 내고야 마는 집요한 태도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이 책의 중요한 메시지였다. 새로운 모델은 매달 쏟아져 나오고, 오늘 배운 프롬프트 팁은 몇 달 뒤 모델 업데이트 한 번에 낡은 지식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들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정의하고, 서툰 결과물을 끈기 있게 다듬어, 마지막에 온전히 자기 이름을 걸고 세상에 내놓는 책임감은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코 낡지 않을 것이다.



* 르온서평단(단단한맘&수련)을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gbb_mom 단단한 맘 

  @water_liliesjin 수련

  @motivebooks.official 모티브


#크래프터 #모티브 #비기 #단단한맘수련서평단 #르온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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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의 아이들
알렉산더 와인스타인 지음, 임현정 옮김 / 에이유앤씨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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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의 아이들> 알렉산더 와인스타인, 에이유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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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프터 양>의 고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와 스토리에 반해, 꼭 읽어보고 싶었던 원작이었다. 그런데 정작 원작 단편인 「양과의 작별」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영화가 품고 있던 시적이고 명상적인 호흡과 달리, 활자로 쓰인 원작은 놀라울 만큼 짧고 담백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입양한 어린 딸 미카에게 뿌리를 잃지 않게 해주려 문화적 안내자이자 오빠로 들인 휴머노이드 양. 그가 어느 날 돌연 작동을 멈추고, 가족들이 고장 난 기계를 고치기 위해 수리 센터를 전전하는 사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은, 양이라는 존재가 그저 편리한 보조 기계가 아니라, 한 가정의 시간과 온기를 조용히 함께 빚어온 엄연한 식구였다는 뒤늦은 자각이었다. 이토록 건조하고 간결한 단편의 골조를 가져와 기억의 층위와 인종적 정체성, 다정한 애도의 미학으로 확장해 낸 코고나다 감독의 통찰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책을 덮고 난 뒤 오히려 영화를 다시 틀어보고 싶어지는 것은 이 독서가 건넨 또 하나의 선물이기도 했다.


🤖

그렇다고 이 책이 「양과의 작별」이라는 대표작만 보고 덮어버릴 그런 소설집은 결코 아니었다. 수록된 열세 편의 단편은 고도화된 기술이 인간의 생활감과 맞물릴 때 발생하는 기묘한 파열음을 제대로 포착해낸다. 「지도 제작자」는 타인의 기억을 데이터처럼 사고파는 세계 속에서, 내가 온 삶을 바쳐 겪었다고 믿어온 과거의 실체마저 모래성처럼 흔들리는 서늘한 불안을 잘 담아냈다. 「하트랜드」는 황폐해진 토양과 극심한 빈곤의 막다른 골목에서, 생존이라는 명목 아래 인간이 존엄의 밑바닥을 어디까지로 봐야할 것인지에 대한 가혹한 현실을 다룬다. 「로켓의 밤」은 터무니없을 만큼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배제의 폭력을 공동체 전체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의 규범으로 순응해 버리는 섬뜩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이주」는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가상현실 속으로 각자 도피하느라,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서로에게서 끝없이 멀어져 가는 가족의 고독한 얼굴을 잘 그려냈다. 작품 속 미래는 꽤나 구체적인 생활의 냄새를 풍긴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균열은 더욱 피하기 어려운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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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신세계의 아이들」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물음을 가장 날카롭게 던진다. 가상현실 안에서 부부가 온 마음을 다해 낳고 길러온 아이들이 악성 바이러스 감염 때문에 영구 삭제되어야 하는 파국의 순간. 현실의 물리적인 육체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가 쏟아부었던 헌신과 그 상실로 인한 찢어지는 고통까지 모조리 '가짜 데이터의 착각'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와인스타인은 아마 기억도, 관계도, 심지어 현실의 풍경조차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새로 조작해낼 수 있게 된 신세계에서, 인간의 마음은 과연 그 편리함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 했다. 기술은 결핍을 지워내는 손쉬운 해법을 제공하지만, 상실 앞에서 무너지고 마는 인간 본연의 연약함까지 덮어주지는 못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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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코드를 짜고 연구실에서 새로운 AI 기술을 다루는 입장에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이 결코 먼 미래의 이야기로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기술은 매일 숨 가쁜 속도로 업데이트되며 신세계가 도래할 것을 약속하지만, 정작 그 기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수천 년 전과 다름없이 낡은 감정의 굴레 속에 갇혀있다. 여전히 서투르고, 사소한 것에 욕심을 내며, 외로움에 떨고, 잃어버린 존재를 그리워한다. 열세 편의 이야기를 모두 통과하고 난 뒤 마음에 남는 것은 결코 쉽게 새로워지지 않는 인간의 불완전성인 것 같다. 기술의 발전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내 곁의 불완전한 사람들과 나누는 온기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조금은 섬뜩하지만 그래도 다정한(?) 소설집이었다.



* 이 책은 영화사 찬란(@challanfilm)으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신세계의아이들 #애프터양원작단편소설수록 #알렉산더와인스타일 #에이유앤씨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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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 주식회사 - 앎, 불구, 흩어져 존재하기의 인류학
엘렌 미알레 지음, 김연화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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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 주식회사 - 앎, 불구, 흩어져 존재하기의 인류학> 엘렌 미알레, 동녘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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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던 시절, 과학과 기술이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는 방식을 다룬 이론들 중에서도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을 유독 흥미로웠다. 과학적 사실이나 위대한 발견이 연구자의 순수한 영감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의 도구, 시약, 논문, 연구비, 동료 같은 수많은 인간과 비인간 행위소(actant)들이 촘촘하게 결합한 네트워크 속에서 비로소 구축된다는 시선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과학사회학자 엘렌 미알레의 『호킹 주식회사』는 바로 그 ANT의 렌즈를 통해 20세기 가장 상징적인 천재, 스티븐 호킹을 집요하게 추적한 책이다. 제목만 언뜻 보면 호킹을 둘러싼 대중적 명성이나 미디어 상업주의의 이면을 들춰내는 저널리즘 비평서처럼 보이지만,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훨씬 더 근본적이다. 

"호킹이라는 주체는 과연 어디까지가 호킹인가?" 


♿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 책이 결코 호킹의 천재성은 사실 주변 사람들이 다 만들어준 가짜 신화였다라고 폭로하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라투르가 과학을 네트워크로 설명했다고 해서 과학적 진실을 부정하지 않았듯, 미알레 역시 호킹의 업적을 깎아내려 평범한 사람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신 한 사람의 탁월한 지성과 독창성이란 애초부터 타인과 사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호킹의 천재성은 홀로 고립된 뇌 속에 갇혀 있던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정교한 네트워크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발현되고 지탱될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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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천재 물리학자'를 상상할 때 칠판 앞에 홀로 서서 우주의 비밀을 계산해 내는 고독한 두뇌를 떠올린다. 하지만 호킹의 실제 연구 현장을 들여다보면 그 그림은 금세 입체적인 생태계로 바뀐다. 그의 머릿속 사유를 칠판에 대신 그려주고 수식을 전개해 주는 대학원생들, 그의 미세한 표정과 시선을 읽어내는 숙련된 간병인들, 맞춤형 휠체어와 음성 합성 컴퓨터의 알고리즘, 그리고 복잡한 물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돕는 기하학적 다이어그램까지. 이 모든 인간과 기계, 시각 자료가 하나로 맞물려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호킹의 물리학’이라는 사건이 성립했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었던 호킹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인간의 사고와 주체성이 얼마나 많은 타인의 조력과 기술적 매개에 기대어 존재하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상징이었다. 그는 고립된 천재가 아니라, 가장 정교하게 직조된 지적 네트워크의 중심 노드(Node)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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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언론과 대중은 수상자 개인의 천재성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결코 단 한 명의 영웅이 깃발을 꽂는 고독한 레이스가 아니다. 수많은 연구실의 실패한 데이터, 무명의 대학원생들과 테크니션들의 묵묵한 노동, 촘촘한 학술 인프라가 오랜 세월 층층이 쌓여 만들어낸 거대한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이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선택과 집중’, 즉 소수의 스타 과학자나 성과가 검증된 연구실에만 자원을 몰아주는 방식은 깊은 우려를 낳는다. 호킹이라는 존재가 수많은 매개체와 조력자라는 네트워크 없이는 한 줄의 수식도 쓸 수 없었듯, 탁월한 연구 성과는 오직 비옥하고 다양한 연구 생태계의 토양 위에서만 싹을 틔울 수 있다. 현대 과학 전체가, 나아가 지적 노동을 수행하는 우리 모두가 수많은 타인과 도구의 그물망에 빚을 지고 살아가는 하나의 거대한 ‘주식회사’다. 그 연결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한 사람의 영웅에 열광하는 얕은 시선을 넘어, 그를 가능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토양과 연구 생태계 전체를 가꾸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은 동녘(@dongnyokpub)에서 제공받아 독서모임 진행을 했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apureumdite @paper_wave__



#호킹주식회사 #엘렌미알레 #동녘 #ANT #독서모임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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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는 코미디 ㅣ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박서련 지음 / 우리학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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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는 코미디> 박서련, 우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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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작가의 소설은 묘하게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 책 『장르는 코미디』 역시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무언가에 무모할 만큼 진심이었던 소설 속 아이들의 얼굴들이 생생하게 상상이 되는 것만 같았다. 코미디언을 꿈꾸는 하리는 배려심 깊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다. 야심차고 자기 확신이 넘치며 때로는 얄밉기까지 하다. 하지만 일면 결점처럼 보이는 그 당돌함이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인 것 같다. 상처받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눈치만 보는 무결점의 주인공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이토록 생생한 생명력을 뿜어내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


🛼

하리는 코미디 대회라는 야심 찬 무대에 오르기 위해 금영, 사라, 혜완을 차례로 끌어모은다. 그러나 저마다의 결핍과 고집을 품은 아이들이 모이다 보니, 이들의 팀워크가 매끄럽게 굴러갈 리 만무하다. 머리를 맞대고 짜낸 대본은 썰렁하기 짝이 없고, 연습실에서는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긁혀 서로 날을 세우며 다투기 일쑤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가 가장 반짝이는 순간은 바로 그 삐걱거리는 엉망진창의 순간들이었다. 머리로 치밀하게 계산해 벼려낸 세련된 유머보다, 서로 부딪치고 부대끼는 과정에서 필터 없이 툭 튀어나오는 날것의 말들이 훨씬 더 큰 웃음을 자아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

아이들이 벌이는 소동극을 지켜보다 보면, 학창 시절 별것 아닌 일에 내 전부를 걸다시피 했던 조금은 손발 오그라드는 기억들이 자연스레 겹쳐지기도 했다. 학교 축제 무대든, 이름뿐인 동아리 활동이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목숨을 걸었던 시절의 무모함이란... 지금 돌아보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그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함께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던 순간, 사소한 오해로 토라졌다가 시시한 농담 한마디에 눈 녹듯 화해했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하리와 친구들의 여정을 보며 예전 추억을 잠시 여행할 수 있어 좋았다.


🛼

쓰라린 실패를 억지스럽게 인생의 귀중한 교훈으로 둔갑시키는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좋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우정을 눈물겨운 감동의 신파 드라마로 포장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조금은 이기적이고, 서투르고, 때로는 재수 없지만,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제 방식대로 한바탕 부딪치고 소란을 피우는 모습이 흥겨웠다. 책을 덮고 나니 기분 좋은 가벼움이 마음 속으로부터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삶이 매일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코미디 쇼일 수는 없다. 도리어 스텝이 꼬이고 대사를 잊어버리는 민망한 NG 장면의 연속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그 망한 순간마저도 한 걸음 물러서서 피식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팍팍한 세상을 버텨내는 가장 근사한 재능이 아닐까 싶다.



* 이 책은 우리학교(@woorischool)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장르는코미디 #박서련 #우리학교 #북스타그램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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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의 언어 - 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 온 생물들
롭 던 지음, 송근아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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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의 언어 - 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 온 생물들> 롭 던,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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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살다 보면 자연을 주말에 잠시 찾아가는 휴양지쯤으로 여기기 쉬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과 멀어졌다는 생각은 현대 문명이 빚어낸 거대한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매일 들이쉬는 숨, 먹는 음식, 심지어 우리 몸속 장내 미생물의 미세한 작용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이 촘촘하게 엮어낸 생명의 그물망 위에 위태롭게 얹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롭 던 작가의 『공생의 언어』는 바로 그 자명한 사실을 흥미진진한 생태의 이야기로 복원해 낸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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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등장하는 꿀잡이새와 인간의 오래된 파트너십은 매우 인상깊었다. 꿀잡이새는 인간에게 날아와 특유의 소리로 벌집의 위치를 안내하고, 인간은 단단한 둥지를 열어 꿀을 취한 뒤 꿀잡이새를 위한 밀랍을 남겨둔다. 언어가 다른 서로 다른 종이 수천 년에 걸쳐 각자의 신호를 조율하며 신뢰를 쌓아왔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현대의 눈부신 기술 발전과 값싼 설탕, 가공식품이 보급되면서 이 유서 깊은 협력 관계는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지고야 말았다. 더 빠르고 편리한 효율을 인간이 취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종과 신뢰를 쌓아가던 교감의 기술을 과연 어디에 흘리고 온 것일까? 편리함의 대가로 지불한 것들의 크기를 헤아리지조차 못하는 현대인의 둔감함에 조금은 섬뜩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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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유익하거나 길들여졌다고 해서 그것이 상대 종에게도 좋은 삶이라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 세계 수백억 마리로 불어난 공장식 축산의 닭을 과연 유전자를 남긴 성공한 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책이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은 생물학적 개체 수나 생존이라는 단순한 지표를 너머, 삶의 질과 고통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공생이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편리하게 착취하거나 통제하는 위계가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공생은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의 무게를 감당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미생물과 곤충, 개와 가축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인간 사회 안에서 우리가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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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면 흔히 쓰이는 자연을 보호하자는 손쉬운 슬로건에 대해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마치 인간이 자연의 울타리 바깥에 고고하게 서서, 약자를 굽어살피듯 선심을 베풀며 지켜주겠다는 오만함이 그 말속에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이 자연을 대할 때 진짜로 필요한 태도는, 그런 시혜성의 태도가 아니라 우리가 온전히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생명들의 관계망을 더 이상 제멋대로 망가뜨리지 않겠다는 겸허함은 아닐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오늘 내가 무심코 먹고, 소비하고, 쓰레기통에 내던진 것들이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가는지 한 번 더 응시해보는 작은 불편함의 감각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 이 책은 흐름출판(@nextwave_pub)으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공생의언어 #롭던 #흐름출판 #북스타그램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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