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다 과학을 믿게 되었을까 - 노벨 물리학상으로 읽는 의심과 논쟁, 합의의 역사
이근희.김갑진 지음 / 모어사이언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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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다 과학을 믿게 되었을까 - 노벨 물리학상으로 읽는 의심과 논쟁, 합의의 역사> 이근희 · 김갑진, 모어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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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라는 설명을 들으면 우리는 대개 별다른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학자가 아무리 과학적 사고와 과학적 절차에 의해 어떤 사실을 밝혀냈다고 해도 이 역시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한때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과학 이론이 새로운 발견 앞에서 뒤집히는 일은 과학사에서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완벽하지도 않고 언제든 수정될 수 있는 지식을 우리는 왜 그토록 신뢰하게 된걸까? 이 책은 바로 이 당연해 보이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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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 120여 년간 노벨 물리학상을 거쳐간 정교한 발견과 치열한 논쟁의 궤적을 훑어 본다. 빛의 이중성(입자성 vs 파동성) 대립부터 우주의 크기와 물질의 근원까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정답이라고 배웠던 공식들이 사실은 수십 년에 걸친 반박과 실험, 그리고 재검증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당연하게 여겨지던 원리들이 지극히 단순한 질문 하나에 근간부터 흔들리는 사례들이었다. 거울 속 세계에서도 자연법칙이 동일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전제, 에너지 보존 법칙, 혹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입자의 정의까지. 과학자들은 기존 이론의 권위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설명되지 않는 미세한 틈을 발견하면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필요하다면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을 가차 없이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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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연구 현장에서 활동하다 보면 데이터가 처음에 세운 가설대로 흘러가지 않는 순간을 아주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때,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데이터를 왜곡해서는 안 되며, 진정한 과학자라면 내 모델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일은 괴롭지만 수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때에서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저자들이 말하는 과학의 본질은 바로 이 지점과 정확히 닿아 있다. 과학에 대한 신뢰는 "과학자가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진정한 힘은 실수를 숨기지 않고 발견해 낼 수 있는 엄격한 절차와 검증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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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완성된 진리를 쌓아두는 거대한 보물창고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임시 답안을 세워두고 끊임없이 망치질해 보는 다이내믹한 과정이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어제의 정답도 망설임 없이 고쳐나가는 유연함이야말로 과학을 가장 단단하게 지탱하는 뼈대라고 할 수 있다. 가짜 뉴스와 교묘하게 가공된 오류가 손쉽게 유통되는 시대다. 이런 세상에서는 무조건적인 맹신만큼이나 모든 것을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무조건적인 의심 역시 위험하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어떠한 주장을 접했을 때 살필 수 있는 최소한의 검증 태도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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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학이 언제나 무결한 정답만을 내놓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틀리고 때로는 좌절함에도 불구하고 그 오류를 숨기지 않은 채, 더 나은 설명을 찾아 끊임없이 스스로를 고쳐온 그 정직한 서사를 신뢰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비로소 제목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우리는 완성된 정답이 아니라 의심하고 검증하고 수정해 나가는 '과학이라는 도구의 작동 방식'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 이 책은 헤세드의 서제(@hyejin_bookangel)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출판사 : 모어사이언스(@morescience_store)


#우리는어쩌다과학을믿게되었을까 #이근희 #김갑진 #모어사이언스 #헤세드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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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어떻게 미래가 되는가 - AI부터 양자역학, 청색기술까지, 오래된 상상력의 비밀
이인식 지음 / 드림셀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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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어떻게 미래가 되는가 - AI부터 양자역학, 청색기술까지, 오래된 상상력의 비밀> 이인식, 드림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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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나는 신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른 이카로스,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신들, 섬을 지키는 청동 거인 탈로스까지. 매혹적인 영웅과 신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텍스트였다. 그때는 그저 아득한 옛사람들이 만들어낸 기발하고 낭만적인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신화였는데, 이 책은 고전적인 신화의 완전한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어릴 적 나를 매료시켰던 그 상상들이 실은 우리가 지금 발전시키고 있는 최첨단 과학기술의 모티브이자 원형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라니! 정말 특별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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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동서양의 여러 신화와 현대 과학기술을 병치시키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 반고의 혼돈과 빅뱅 이론 : 중국 창세신화에서 커다란 알 모양의 혼돈을 깨뜨려 우주를 연 반고의 이야기는 우주의 탄생과 폭발을 설명하는 빅뱅 이론으로 연결된다.

- 미궁과 경로 탐색 알고리즘 : 미노타우로스를 가둔 다이달로스의 복잡한 미궁은 오늘날 인공지능이 최적의 길을 찾는 경로 탐색 알고리즘과 맞닿아 있다.

- 청동 거인과 로봇 공학 : 청동 거인 탈로스와 이카로스의 비행은 인간을 닮은 피조물을 만들고 하늘을 날고자 했던 오래된 욕망의 시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던 서사와 기술이 하나의 선으로 깔끔하게 이어지는 순간을 목도하는 것은 이 책이 주는 가장 직관적인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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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죽음과 불멸을 다룬 대목이 무척 재밌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영혼의 부활을 위해 발전시킨 미라 제작 기술을 오늘날의 인체 냉동보존술과 생명 연장 연구와 연결시키다니! 미라가 현대 냉동인간 기술의 직접적인 계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죽음을 삶의 완전한 종말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만큼은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꽤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신화가 그 열망을 설화로 구성해 냈다면, 현대 과학은 그것을 실험의 영역으로 끌고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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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면, 새로운 기술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모델과 눈부신 발전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기술의 뿌리를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술이란 어느 순간 우연히 완성된 산물이 아니라, 인류가 수천 년 동안 품어온 질문과 욕망이라는 토양 위에서 피어난 꽃임을 알게 되었다. 인간을 닮은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이동하고 싶다는 꿈, 죽음을 넘어 영원히 존재하고 싶다는 소망. 이 모든 과학의 질문들은 기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신화라는 이름의 이야기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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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신화와 현대 과학을 이어 붙이는 저자의 몇몇 연결 고리는 다소 과감하거나 자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학사적 계보를 엄밀하게 추적하는 학술서라기보다는, 오래된 서사와 최신 기술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중 교양서에 가깝기에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터무니없고 엉뚱한 상상 역시, 먼 미래 누군가가 과학이라는 언어로 풀어내야 할 또 하나의 신화일지도 모른다!



* 이 책은 드림셀러(@dreamseller_book)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신화는어떻게미래가되는가 #이인식 #드림셀러 #서평단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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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나를 만났다
도감아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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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나를 만났다> 도감아트,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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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면 그림도 눈여겨 보지만 대개 작품 옆 조그만 설명문 역시 열심히 읽게 된다. 화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작 연도, 미술사적 사조 같은 정보를 확인하면 뭔가 작품을 제대로 감상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전시장 문을 나설 땐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그런데 이 책, 도감아트의 『그림 속에서 나를 만났다』를 통해 미술 작품을 조금은 더 깊이있게 볼 수있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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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문적인 미술 지식을 복잡하게 늘어 놓는 책은 아니다. 대신 그림 속 인물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손은 왜 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두운 배경 구석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천천히 따라가게 만든다. 오래 전 명화 속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지은 표정과 몸짓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꽤 닮아 있다. 누군가를 망부석처럼 기다리는 얼굴이나 이미 끝난 관계를 내려놓지 못하는 안쓰러운 손끝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의 내 모습들을 연상하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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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위그노 교도」였다. 대학살의 위험에 처한 개신교도 연인을 살리기 위해 가톨릭 신자인 여성이 그의 팔에 안전을 보장하는 흰 완장을 묶어주려는 순간을 담은 그림이다. 처음 보면 그저 애틋하게 포옹하는 연인처럼 보이지만, 인물들의 손에 집중하면 조금 다른 것들이 보였다. 여자는 남자를 살리기 위해 간절한 표정으로 완장을 매어주려 하지만, 남자는 그 손을 부드럽게 가로막으며 거절하고 있다. 목숨이 걸린 순간에도 자신의 신념을 저버릴 수 없어 갈등하는 마음이 그 작고 미묘한 손짓에 그대로 담겨 있다. 단순히 흔한 연인의 그림이라고 지나칠 수 있었던 장면이, 손끝의 모양 하나를 다르게 보게 되면서 아주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으로 내 안에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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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가 그림에 대한 해석을 정답처럼 제시하지 않는 점이 참 좋았다. 저자는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서만 친절하게 건네주고 마지막은 독자 각자의 경험으로 채울 수 있게 여백을 남겨둔다. 미술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그림 앞에서 조금 더 머물러보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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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잘 감상한다는 건 많은 지식을 달달달 외우는 일만은 아닌 것같다. 작품을 바라보며 내 안에서 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을 놓치지 않는 일이 조금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그런 지점을 일깨워주는 아주 퀄리티 높은 책이었다! 다음에 미술관에 간다면 설명문부터 찾지 않고 그림 앞에 먼저 가만히 서서 작품의 디테일들을 하나하나 잘 음미해 봐야겠다.



* 이 책은 위즈덤하우스(@wisdomhouse_official)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그림속에서나를만났다 #도감아트 #위즈덤하우스 #북스타그램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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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선 버뮤다
범유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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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선 버뮤다> 범유진,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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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노선도는 참 정교하게 잘 짜여져 있다. 그런데 노선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주 특이하고 기묘한 구간이 있다. 바로 반대 방향 열차가 없어서 내릴 역을 놓치면 강제로 한 바퀴를 크게 돌아야만 탈출할 수 있는 6호선 응암순환선이다. 평생 근에 그 동네 근처에는 발도 안 붙여본 사람이라도, 노선도의 이 기괴한 단방향 루프를 보면 묘한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직접 타 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범유진 작가의 『6호선 버뮤다』는 이 독특한 현실의 선로 구조를 설계도로 삼아, 타임리프가 발생하는 ‘버뮤다 응암 지대’를 뚝딱 만들어냈다. 소재의 참심함과 그것을 그토록 만들어 내기 어려운 타임리프물로 연결짓는 작가의 솜씨는 정말 감탄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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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던 날, 우산을 챙기지 않은 자신을 마중 나왔다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동생 진월. 죄책감이라는 지옥에 갇혀 살던 언니 진양은 지하철 안에서 기이한 무당을 만난 뒤 동생이 죽기 전의 과거로 타임리프 한다. 동생을 살릴 기회를 잡았다고 안도하지만, 장소와 방법을 아무리 바꿔도 죽음은 매번 다른 얼굴로 진월을 찾아가고야 만다. 이 소설의 최대 장점은 독자에게 망설일 틈을 주지 않고 폭주기관차처럼 돌진한다는 점이다. 또한 진양이 과거로 회귀할 때마다 상황은 미세하게 비틀어지고, 숨겨져 있던 가족의 어두운 비밀과 인물들의 속내가 양파 껍질 벗겨지듯 드러난다. 정말 지루할 틈이 없는 엄청난 페이지터너였다. 문장도 매끄러워서 가독성이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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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진짜 백미는 타임리프의 오컬트적 현상보다, 진양의 '자매애'가 변색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양은 자신이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착한 언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역할은 자신의 불행을 견디게 하는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진월이 점점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립하려 할 때, 진양의 애정은 보호라는 가면을 벗고 통제와 소유욕이라는 민낯을 드러낸다.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과, 그 사람이 영원히 나를 필요로 하며 내 손아귀에 갇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전혀 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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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흥미로운 열차가 달리는 궤도 위에 너무 많은 장르적 보따리를 실었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버뮤다 삼각지대와 외계인 음모론으로 문을 열더니, 무속과 세습무 집안의 대물림, 시간 이동, 전래동화의 차용, 가족 심리극까지 쉴 새 없이 의제를 확장한다. 각각은 훌륭한 재료들이지만,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거대한 원리 안에서 찰떡처럼 유기적으로 맞물렸다고 보기에는 조금 어려웠다. SF 미스터리로 출발했다가 샤머니즘적 세계관으로 수습하고 이내 심리극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장르적 접합부가 다소 느슨하게 덜컹거리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시간을 다루는 작품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규칙의 치밀함'도 다소 아쉽다. 과거의 변화가 현재에 미치는 나비효과나 죽음의 대가가 사실상 흐릿하다 보니, 서사의 긴장감이 룰이 아닌 작가의 편의에 의해 움직인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황세정과 정찬양 같은 인물들의 죽음은 진양의 잔혹성과 극단성을 증명하기 위한 일회성 소모품처럼 소비되어 버려, 작중이 긴장감을 다소 반감시키는 느낌도 들었다.

 

🚇

몇몇 설정의 헐거움에도 불구하고 『6호선 버뮤다』가 멈추지 않고 끝까지 읽히는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응암순환선이라는 도시괴담적 공간의 매력이 확실하고, 진양이라는 결함투성이의 서늘한 주인공을 끝까지 지켜보게 만드는 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장르적 엄밀함을 따지는 하드코어 타임리프 마니아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기묘한 도시괴담과 뒤틀린 인간 심리가 빚어내는 속도감을 즐기고 싶은 독자라면 기꺼이 이 열차에 올라탈 만하다. 과연 진양이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건 정말 동생이었을까, 아니면 동생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었을까? 쓸쓸한 질문을 남기며 책은 마무리된다.



* 이 책은 아카님(@aka_book_)의 SF탐사단 모집으로 나무옆의자(@namu_bench)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6호선버뮤다 #범유진 #나무옆의자 #SF탐사단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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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잠 - 덕자전성시대 덕자의 장편소설
박보미(덕자전성시대) 지음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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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잠 - 덕자전성시대 덕자의 장편소설> 박보미(덕자전성시대), 오픈도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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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그 때 발생했던 사건의 인과관계보다는, 특정한 감정이나 감각만이 덕지덕지 남는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출근길 지하철 속 숨 막히는 공기, 상대가 무심코 던진 무심한 말 한마디에 상해버린 내 마음, 혹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들려고 애쓰느라 뻣뻣하게 굳어 있던 내 안면 근육이 느꼈던 감각과 같은 것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선후관계는 흐릿하지만 그때의 서러움만은 생생하게 재현되는 경험도. 박보미 작가의 소설 『그루잠』은 바로 그 감정과 감각의 기억을 건드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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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윤설의 삶은 책의 시작부터 무겁게 다가온다. 첫눈이 내리던 날 어머니의 죽음과 맞바꾸듯 태어난 아이. 윤설은 일찍이 울거나 떼를 쓰는 대신 억지웃음을 짓는 법을 배운다. 그래야 상황이 빨리 끝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량함은 아이를 너무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고, 졸업도 하기 전에 내던져진 사회는 잔인하게도 그 선함을 마음껏 이용한다. 부당함에 맞서려 용기를 내어보아도 돌아오는 건 외로움과 믿었던 이들의 배신뿐이었다. 읽다 보면 윤설이 제발 화도 좀 내고 자신을 해치는 관계를 매몰차게 끊어내길 바라는 마음에 답답함이 차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워하는 일에도 에너지가 필요한 법인 것 같다. 크나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때론 싸우기보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덤덤해지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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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꿈, 상상과 기억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시공간을 훌쩍 건너뛰는 판타지적 연출에 잠시 길을 잃을 뻔 하기도 했지만, 이 몽환적인 세계는 윤설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을 견뎌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재구성한 또 하나의 기억 장치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책 제목인 그루잠은 잠에서 잠시 깨었다가 다시 드는 잠이란 의미이다. 다 깨어났다고 믿었으나 여전히 꿈의 기운이 지배하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으나 감정의 앙금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 이 그루잠의 상태를 서사 구조로 구현한다는 점이 이 소설의 백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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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용서라고 하면 가해자를 관대하게 품어주는 숭고한 도덕을 떠올리지만, 윤설의 용서는 전혀 고상하지 않다. 그건 상대를 위한 자비라기 보단 미움이라는 지독한 감정이 더는 내 삶을 갉아먹지 못하도록 끈을 툭 끊어버리는 행위에 가깝다고해야할 것이다. 오롯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인 셈이다. 이 책은 명쾌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책은 아니었다. 대신 상처받은 한 인간이 파편화된 기억을 스스로 기워 붙이며 자기 삶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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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해왕성에도 여름이 온다"라는 소설 속 문장처럼, 윤설의 긴 겨울 역시 영원하지는 않기를 바라본다. 화려하게 삶을 뒤집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오늘 밤만큼은 악몽 없이 깊은 잠에 들 수 있는 정도의 평온에 이르기를 기원해 본다. 어쩌면 상처 입은 영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구원은 바로 그런 소박한 안도감일지도 모른다.



* 이 책은 오픈도어북스(@opendoorbooks7)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그루잠 #박보미 #오픈도어북스 #덕자전성시대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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