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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잠 - 덕자전성시대 덕자의 장편소설
박보미(덕자전성시대) 지음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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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잠 - 덕자전성시대 덕자의 장편소설> 박보미(덕자전성시대), 오픈도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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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그 때 발생했던 사건의 인과관계보다는, 특정한 감정이나 감각만이 덕지덕지 남는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출근길 지하철 속 숨 막히는 공기, 상대가 무심코 던진 무심한 말 한마디에 상해버린 내 마음, 혹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들려고 애쓰느라 뻣뻣하게 굳어 있던 내 안면 근육이 느꼈던 감각과 같은 것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선후관계는 흐릿하지만 그때의 서러움만은 생생하게 재현되는 경험도. 박보미 작가의 소설 『그루잠』은 바로 그 감정과 감각의 기억을 건드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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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윤설의 삶은 책의 시작부터 무겁게 다가온다. 첫눈이 내리던 날 어머니의 죽음과 맞바꾸듯 태어난 아이. 윤설은 일찍이 울거나 떼를 쓰는 대신 억지웃음을 짓는 법을 배운다. 그래야 상황이 빨리 끝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량함은 아이를 너무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고, 졸업도 하기 전에 내던져진 사회는 잔인하게도 그 선함을 마음껏 이용한다. 부당함에 맞서려 용기를 내어보아도 돌아오는 건 외로움과 믿었던 이들의 배신뿐이었다. 읽다 보면 윤설이 제발 화도 좀 내고 자신을 해치는 관계를 매몰차게 끊어내길 바라는 마음에 답답함이 차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워하는 일에도 에너지가 필요한 법인 것 같다. 크나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때론 싸우기보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덤덤해지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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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꿈, 상상과 기억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시공간을 훌쩍 건너뛰는 판타지적 연출에 잠시 길을 잃을 뻔 하기도 했지만, 이 몽환적인 세계는 윤설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을 견뎌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재구성한 또 하나의 기억 장치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책 제목인 그루잠은 잠에서 잠시 깨었다가 다시 드는 잠이란 의미이다. 다 깨어났다고 믿었으나 여전히 꿈의 기운이 지배하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으나 감정의 앙금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 이 그루잠의 상태를 서사 구조로 구현한다는 점이 이 소설의 백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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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용서라고 하면 가해자를 관대하게 품어주는 숭고한 도덕을 떠올리지만, 윤설의 용서는 전혀 고상하지 않다. 그건 상대를 위한 자비라기 보단 미움이라는 지독한 감정이 더는 내 삶을 갉아먹지 못하도록 끈을 툭 끊어버리는 행위에 가깝다고해야할 것이다. 오롯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인 셈이다. 이 책은 명쾌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책은 아니었다. 대신 상처받은 한 인간이 파편화된 기억을 스스로 기워 붙이며 자기 삶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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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해왕성에도 여름이 온다"라는 소설 속 문장처럼, 윤설의 긴 겨울 역시 영원하지는 않기를 바라본다. 화려하게 삶을 뒤집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오늘 밤만큼은 악몽 없이 깊은 잠에 들 수 있는 정도의 평온에 이르기를 기원해 본다. 어쩌면 상처 입은 영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구원은 바로 그런 소박한 안도감일지도 모른다.
* 이 책은 오픈도어북스(@opendoorbooks7)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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