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 전체 구성원이 서로 공범의 관계에 엮였던 사건이

10년 동안 징역을 살다 돌아온 무고한 피해자 '토비아스 자토리우스'의 등장과 더불어

거짓과 음모의 10년전 사건의 전말이 파헤쳐진다.

 

 

진실에 대한 침묵은 무고한 희생을 만들고 이 무고한 희생의 피와 진실에 대한 침묵을 자양분 삼아不義는 세력을 키우고 권력을 가지게 된다.

불의한 권력은 침묵하는 자를 복종케 하고 이렇게 복종된 침묵은 불의한 권력을 떠받치는 조직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와 진실을 덮으려는 자와 불의한 권력을 휘두르 자가 다른 것인가?

그들은 자가 생식이 가능한 공범이 되어버렸다.///

 

///나는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웃이나 친구나 동료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는가?

그의 생각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신뢰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서로 배신하면서 살아간다.

범죄자만이, 악한만이 배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사는 부부도, 정의로울것 같은 형사도, 사랑하는 연인도 배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배신인가?

믿음을 져버린 것인가?

그 믿음은 무엇인가?

상대가 나에게 준 것인가? 그냥 내가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느끼는 것인가?

그 상대를 아는만큼 신뢰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것을 보면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만치 상대를 아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느만치 알게 되면 상대를 신뢰한다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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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에 발라져 있던 파스를 떼자 향기가 난다. 

이 향기.  

군복무중일때 봄이면 눈송이처럼 하얗게 뭉쳐 영내를 온통 뒤덮어 구르던 

꽃가루가 한창일때 나던 그 향기인가? 

국민학교 다닐때 봄이면 친구들과 몰려 야산으로 가서 하얗게 뒤덮인 그 꽃을 꺽다가 

산지기 노인네에게 붙잡혀 벌을 서다 윗도리 펼쳐 가득 담아 산을 내려올때 

풍기던 하얀 아까시 꽃의 비린 향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고통에서 배어 나온 향기가 아련한 설레임을 충동질 할 수도 있구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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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증명하는 방법.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론으로 '의심한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존재를 증명했다. 

신우정은 현상학적으로 존재의 멸실을 통해 존재를 증명한다. 

존재는 존재하는 동안에는 존재를 증명할길이 없다.  

존재가 사라진 그 시공간을 참을수 없는 우주의 확장(?)을 통해서 

비로소 존재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심리적으로는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존재의 상실 후에 뻥 뚫린 가슴을 보고 비로소 그 존재가 존재 했음을 알게 되는 것일까. 

그 뻥 뚫린 가슴은 매워지지 않고 계속 남게 되는 것일까.  

우주의 확장처럼 그런 현상이 생기고 빈틈은 매워지게 되는 것일까.  

 

존재의 상실 이후에 존재가 증명된다면 

존재는 그 존재자체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아직은 책의 내용이 정리되지 않지만 

배명훈이라는 작가의 얘기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다시 몇번이고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기분 좋은 숙제를 얻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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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보관리스트에 두었던것을 이제사 읽었다. 

책을 보는 중에 가슴이 멍먹하고 아파서 눈물이 날려고 했다. 

하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눈물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상처를 준 자는 울 자격이 없다. 

우는 것에 대한 특권은 상처를 받은 자에게만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할 것이다. 

 

은교가 나이가 들면 어떨까. 

은교의 나이가 따블이되면 어떨까. 

그때는 그녀의 과거가 어떻게 보이고 해석될까. 

어떤 일들은 상처로 짧은 기억에만 있고 마음 저 깊은 곳에 흔적을 남기지는 않지만 

어떤 일들은 흉터가 되어 두고두고 마음에 풍랑을 일으킨다는데.    

 

사랑은 나이도 국경도 없다.  

그래서 늙은 시인은 자신의 말년에 자신의 존재를 찾는데 

그 사랑이 요긴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 사랑이 아픔으로 음각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공평한 것도 아니고 

절대 선도 아닌 것이리라. 

그러니 사랑때문에 아프고 슬픈것이리라. 

하지만 아프다, 슬프다 표현해서는 안되는 때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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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심해지는 우울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서재에서 얇아 보이는 책을 한 권 꺼냈다.  

미셸우엘벡의 '투쟁영역의 확장'

2009.4.21 처음 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인공은 말한다. 

결국 당신은 규칙에 따라 살게 된다고. 

그랬다. 나는 규칙에 따라 살아왔다. 

그가 말하는 두가지 투쟁영역 안에서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마르스의 세계와 

유혹과 섹스를 추구하는 비너스의 세계에서 

더 많은 영역을 지배하길 갈구하며 자유경제주의의 규칙으로 투쟁하듯 살아왔다. 

하지만 이것이 힘들고 좌절하고 불안해지고 결국 허망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투쟁적으로 사는 것이 만족그러운가.

아니 만족까지는 아니어도 가치롭기는 한 것인가.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1인칭 주인공의 싯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참여함으로해서 이렇게 힘든것은 아닌가. 

1인칭 싯점을 버리고 3인칭 관찰자의 싯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좀 더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도대체 나는 3인칭 관찰자의 싯점을 어떻게 해야 가질수 있는지 모른다. 

 

영역 확장을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욕망과  

지배된 영역이 없는 세상을 유랑하고 싶은 욕망의 사이에서 혼란스럽다. 

내가 늙어가고 있는 것인가. 

욕망하되 획득할 수 없는 것의 연속 순환.  

 

나도 관계를 맺어감에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있다. 

관계의 가치를 점점 인정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현재의 어쩔수 없는 필연의 관계 - 일테면 가족 같은것 - 로부터도 자유로와 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내 만족과는 전혀 상관없는 도덕률이 나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음을 느낀다.  

 

온전히 자유롭고 만족할 수 있는 나의 영역은 어딜까. 

내가 획득하고 싶은 영역은 어디일까.  

지금 딪고 서 있는 이 영역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면 정말 자유로와질까. 

나는 일어서 밖으로 나갈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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