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
히로세 준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히로세 준(廣瀬純, 1971~  )의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은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둔 채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 책이다. 첫 번째로 제목에 속지 말아야 하며, 두 번째로 원래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어느 잡지에 연재된 두 쪽짜리 ‘시평’(時評)이었다는 ‘형식’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속임수에 넘어간다면 독자들은 낭패를 볼지도 모를 일이다.

우선, 제목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蜂起とともに愛がはじまる)는 이 책의 제목이 그럴 듯하게 짜맞춰낸 미사여구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옮긴이가 걱정하듯이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말이 뿜어내는 매력”에 아찔할 만큼 눈이 멀게 된 나머지 “혁명에 대한 무력함을 봉합하는 엉뚱한 역할”을 경박하게 솔선수범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 이 책의 독자들이 피해야 할 첫 번째 낭패이다.

그 다음으로 짧은 ‘시평’이라는 형식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그 형식상의 특성처럼 쉽게 술술 읽힌다고 해서 그렇게 읽고 책장을 덮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읽(었)을지언정, 이 책은 차라리 두 번, 세 번 천천히 반복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비유하자면 이 책은 32개(한국어판의 경우는 34개)의 조각으로 이뤄진 직소 퍼즐이다. 각 조각마다 나름의 통찰력과 즐거움을 주지만, 모든 것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퍼즐을 완성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옮긴이가 걱정하듯이 이 책은 갖가지 현대 사상(특히 유럽의 사상)과 영화를 요약하며 “자칫 새로운 트렌드를 추종하는 경박함”만을 보여줄 뿐이라고 크게 오해할 수도 있다. 이것이 독자들이 피해야 할 두 번째 낭패이다.

 

당신은 이 지독한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라는 표현이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닌 이유는 이 제목이 그 자체로 히로세 본인의 구상(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가장 잘 압축한 말이기 때문이다.

쉽게 읽으면 이 문장은 이렇게 읽힌다. 봉기가 있고 나서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다. 그런데 아니다. 봉기와 사랑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함께,’ 즉 ‘공’(共)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저 문장은 “사랑과 함께 봉기가 시작된다”라고 읽어도 성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왜일까?

먼저 ‘사랑’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얼핏 읽으면 이 책의 제목은 1968년 혁명 당시의 저 유명한 사진, 즉 바리케이드 뒤에서 뜨겁게 입맞춤하는 남녀의 사진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히로세가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운명애)이다(16쪽).

어떤 운명인가?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그 어떤 액션도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세계일지언정, 즉 “혁명의 불가능성”(11쪽)이 도드라진 세계일지언정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운명을 말한다. 이 운명이 제아무리 ‘디스토피아적’으로 보일지언정(그리고 실제로 그럴지언정) 그 운명을 사랑해야만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이 말은 이 운명을 ‘감수’할 것이냐, 즉 이 운명에 순응해 세계의 변혁을 그만둘 것이냐,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꿈을 계속 꿀 것이냐는 질문에 가깝다. 전자라면 더 이상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봉기: 혁명의 불가능성에 맞서 세계를 변혁하는 다른 방법

 

그렇다면 이제는 ‘봉기’이다. 히로세에 따르면 혁명은 운명을 부정한다(12쪽). 다른 식으로 말하면 혁명이란 다른 세계가 존재했던(혹은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시기, 혹은 자본이 아직 충분히 강력하지 않아서 자본이 낳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 답을 공유해 실현하는 것이 가능했던(혹은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시기에 사유되고 실행된 해방의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등장했다. 히로세는 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을 원자력 발전에 비유한다. 히로세에 따르면 우리는 원자력 발전 사고가 언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 차라리 우리는 원자력 발전 사고가 늘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수력 발전은 높은 위치에 있는 물 안의 문제가 낙하에 의해 한꺼번에 해결됨으로써 존재하고, 화력 발전은 화석 연료 안에 있는 문제가 연소에 의해 모조리 해결됨으로써 존재한다. 이에 비해 원자력 발전에 필요한 것은 핵분열 연쇄 반응을 가능한 한 감속시키는 것, 그래서 에너지 생산을 제어하는 것이며, 그런 제어기술을 획득해야만 비로소 원자력 발전이 가능해진다. 반(反)원자력 발전의 담론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원자력 발전은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인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원자력 발전은 컨트롤밖에 할 수 없는 것(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186쪽).

 

원자력 발전은 수력 발전이나 화력 발전처럼 그 에너지를 모조리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제어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 에너지, 즉 핵분열 연쇄 반응으로 인한 힘을 모조리 방출하면 (핵)폭발=핵폭탄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원자력 발전 사고의 위험 가능성에 불안해하면서 그것을 일정하게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장 자본을 모조리 없앨 수 없다면, 우리는 자본이 양산하는 모든 사고(가령 최근의 부채 위기)에 불안해하면서 그것을 일정하게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

히로세가 말하는 ‘봉기’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액션이 아니라 이처럼 그 문제와 ‘더불어 살아갈 것’을 각오한 액션이다. “문제 제어로서의 해방, 문제를 과잉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의한 해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봉기이다. …… 봉기는 문제를 창출하면서 문제를 껴안고 준(準)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이다”(214~215쪽). 그리고 히로세는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을 빌려 이런 봉기의 주체를 혁명의 주체인 ‘두더지’와 다른 ‘뱀’에 비유한다.

 

들뢰즈는 …… 시작과 끝으로 구획이 나뉜 선분 위로 살짝 얼굴을 내밀고는 또 다시 다른 선분 위로 얼굴을 내미는 옛날의 ‘두더지’와 [뱀을] 구별했다. 뱀은 선분을 알지 못하고 데모와 일상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뱀은 땅속에서 휴식을 취할 줄 모르고 피로를 축적하면서 오로지 땅 위를 기어 다니는데, 그 땅 위에는 끊임없이 방사선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피로와 피폭의 선, 그것이다. …… 뱀이 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즉 어디까지나 과잉의 힘으로서의 이 ‘균열’을 살아가는 것이다(217쪽).

 

이렇게 본다면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꿈을 계속 꿀 것이냐?”라는 질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정정, 아니 확장할 수 있고, 확장해야 한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으로 인한 사고를 껴안은 채, 그 과정에서 축적되는 피로에도 불구하고, 계속 변혁의 꿈을 꿀 것이냐?”

여전히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래, 이런 운명일지라도 사랑하겠다”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봉기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혁명의 불가능성 속에서도 변혁(즉 행동)을 하겠다는 각오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봉기한다면 이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아니, 차라리 봉기해야만 이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봉기하지 않는다면 운명에 순응하겠다는 것이고, 순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기=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봉기와 사랑’(봉기=사랑)과 함께 (비로소 다시) 시작한다”라고 읽힐 수도 있는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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