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무덤의 남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옆 무덤의 남자
카타리나 마세티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나는 지금도 언젠가 나와 100%로 들어맞는 사람을 기어코 만나게 되는 꿈을 꾼다. 운명 이라는 말을 쓰자면 너무 닭살이 돋는다. 그런 낭만적인 단어를 쓰기에는 내가 너무 무뚝뚝한 사람이라서 그런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운명’이라기보다는 기질이나 성품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이해관계로 얽혀지지 않는 조그만 우연도 필요하다. 꼭 이성에 국한된 생각은 아니다. 친구라든지 스승이라든지 동료라든지 언젠가 내가 맺게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서 나는 나와 100% 들어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이런 생각을 입 밖에 꺼내면 대게의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훈계하려고 든다. 철이 없다느니 세상을 잘 모른다느니 하는 핀잔을 늘어놓거나 완벽한 관계를 원한다면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려 깊은 충고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그런 것일까? 결국은 서로에게 맞춰주기 위해 스스로를 갈아내고 리모델링해야 하는 관계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서로 너무 잘 들어맞아서 한쪽이 무언가를 희생하거나 양보할 일이 없고, 한쪽이 괜히 위축돼서 무리하거나 자괴하는 일이 없는 이상적인 관계는 정말 불가능 한 걸까? 그건 좀 너무 서글프지 않나. 모든 관계가 그렇게 개개인의 필연적인 불협화음 속에 잠재적인 갈등을 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면 그 관계는 결국은 비극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크다. 아, 정말 머리가 아프다.
극강의 언밸런스 커플의 탄생.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데시레와 벤니. 이 커플은 조금 독특하다. 데시레는 우습지도 않은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그것도 고작 삼십대에! 어이없이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보다는 황당함에 매일 남편의 무덤을 찾는 여자다. 벤니는 어머니를 병으로 떠나보냈다. 가족이자 든든한 농장의 일꾼이었고 무엇보다 그를 살뜰히 보살폈던 노모는 농장일 말고는 모든 게 서투른 노총각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벤니는 주기적으로 엄마의 무덤을 찾아 화초를 가꾼다. 고상한 도서관 사서 데시레와 걸걸한 농장주 벤니는 공통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묘지라는 특수한 공간이 아니라면 전혀 마주칠 일이 없는 두 사람인데, 마주쳐 버렸다. 그저 옆 무덤의 남자인 벤니가 베이지색의 이상한 여자인 데시레를 눈에 담게 된 우연한 몇 초. 그 우연한 순간으로 그들은 시큰둥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 서로를 강렬하게 마음에 새기게 된다.
이후 재회한 그들은 끈적끈적하고 열정적적인 정사를 나누고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소 25마리를 보살피느라 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벤니가 고상하고 유식하지만 미트볼도 만들 줄 모르는 도서관 사서 데시레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연애를 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평탄할리 없다. 생활 패턴에서부터 시작해서 식성이나 교양수준 심지어 데코레이션 취향에 이르기 까지 무엇 하나 닮은 점이 없는 두 사람은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삐걱대기 시작한다. 그저 농담으로 넘기고 갈등의 소지는 최대한 피하고 참아주고 끌어안으려 발버둥을 쳐댔다. 그렇게 물과 기름 같은 존재들이 하루하루를 평탄하게 보내기 위해 매일 한 가지씩 견디며 지내는 법을 배우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이 커져 갈수록 서로에 대한 욕심도 커져가기 마련인지라 결국 서로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기 시작하고 관계는 엉망이 되고 만다. 그녀의 입장과 그의 입장이 흥미진진하게 교차되는 가운데 사랑하는 만큼 반목하기 시작하는 독특한 연인은 서로의 차이를 보듬어 안으며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까?
100% 들어맞는 사람을 만나기는 하늘에 별을 만지는 일만큼 어렵지만 100%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기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을 차는 일만큼 쉬운 걸까? 세상이라는 놈이 어찌나 이다지도 불공평한지! 데시레와 벤니 커플의 이야기는 조금 구태의연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랑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갈등요소의 집합체라고 할 만 하니까 말이다. 남자와 여자는 애초에 사는 별이 다른 두 인종이라고 어떤 작가는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와 남자는 사랑을 한다. 때때로 여생을 함께 보내자고 서약하기도 한다. 마치 그것이 갖은 난국을 극복하며 지켜낸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 과정이라는 것이 참 심난하다. 결국에는 한쪽이 무언가를 포기하고, 한쪽이 어떤 것을 감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희생인데, 희생의 명분이 참 말문이 막힐 정도로 절대적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성숙한 성인이라면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모나게 굴지 않고 적당히 참고 적당히 희생하며 살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라고 누군가 얘기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맞는 소리니까. 너, 나, 우리.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사회. 랄랄라. 하하하. 호호호. 하지만 사랑이라는 절대반지 못지않게 위력적인 것을 핑계로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비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가히 희망적이게도 사랑을 하는 두 사람에게는 적절한 타협의 여지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자존심을 세우고 치고 박고 싸우게 되더라도 그 타협점에만 이를 수 있게 된다면 그나마 해피엔딩일 진데. 그런데 서로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 적절한 타협점에 영영 이를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저히 win-win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관계라면 역시 ‘사랑’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희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까?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사랑 이야기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되더라? 그들의 사랑은 결국 깨지지 않았으니 그들은 happily ever after할 일만 남은 것일까? 모르겠다. 후일담 같은 걸 내주는 로맨스 소설을 구경해 본 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교묘하게 똑똑한 결말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고전적인 질문에 어떠한 명확한 판결도 내리지 않았다. 이것은 속편을 내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 일뿐, 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결말에 대한 힌트를 남기자면 순진하고 우직한 벤니와 영악한 데시레! 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정말이지 속편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속편에서 작가가 어떤 답을 내릴지 혹은 그냥 얼버무려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똑같이 공평한 연애를 추구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그 마지막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