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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화가와 뮤즈와 추리소설

 

천재적인 예술가의 곁에는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가 함께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난봉꾼 클림트를 물신양면으로 도우며 곁을 지켰던 에밀리 플뢰게나 우유부단한 바람둥이 로댕을 사랑했던 젊고 아름다운 연인 까미유 끌로델, 프리다 칼로를 여러 번 울린 애증의 결정체 디에고 리베라 같은 이들 말이다. 여기에 한명 더 소개하고자 한다. 에밀리 플뢰게처럼 수완이 좋았던 사업 파트너였고 까미유 끌로델처럼 열정적인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디에고 리베라만큼이나 엉덩이가 가벼웠던 최강의 뮤즈, 흘러내리는 시계 모티브로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평생을 사랑했던 여인 갈라리나다.

 

 ┃살바도르 달리와 그의 연인 갈라

 

달리가 갈라를 처음 만났을 때 갈라는 이미 유부녀였다. 하지만 첫눈에 갈라의 매력에 빠져버린 달리는 열렬히 구혼했고 결국 그녀와 혼인관계를 맺는다. 지금으로서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개방적인 성관념을 갖고 있던 갈라는 달리와 결혼한 이후에도(물론 이전에도 그러했다) 끊임없이 여러 애인들을 만들고 자유롭게 사랑을 나눴다.(심지어 전남편과도 계속 잠자리를 가졌다고 전한다) 하지만 달리는 그 모든 것을 용인했다고 한다. 달리는 그녀를 결혼으로 구속하려 들지 않았고, 갈라도 달리가 화가로 성장하고 더 좋은 가격에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고 한다. 이런 재미있는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달리의 맹목적인 사랑이 그만큼 깊은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은 조금은 독특한 달리의 성품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스꽝스러운 안테나 수염을 자랑스럽게 기르고, 당당하게 스스로를 천재라고 칭하고, 자궁 안에서의 기억도 갖고 있다는 허풍 같지도 않은 말을 자서전에 남긴 남자였으니 예사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정말 기인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저런 얘기를 궁시렁 거렸지만 사실 잘 모르는 예술가의 뒷담화 같은 것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교과서적이면서도 조금 독특한 추리소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서 얘기를 꺼낸 것이 조금 길어졌다.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고 불리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 두 번째 장편인『달리의 고치』는 바로 살바도르 달리를 소재로 쓰인 본격 추리소설이다. 괴짜 화가와 본격 추리물이라니 된장 올린 팥빙수처럼 궁합이 맞지 않을 것 같은 묘한조합이지만 의외로 괜찮은 맛이 나는 추리소설이었다. ‘고치’ 안에서 사망한 달리 추종자의 기괴한 죽음과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의 추리는 단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논리 정연했다. 시종일관 헛다리를 짚어 대는 히무라 교수의 절친 작가 아리스 선생도 여전하더라. 역자는 전작인 『46번째 밀실』을 잇는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로서 ‘본격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와 캐릭터의 성공적인 안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라고 평했다. 독자인 나는 ‘억지스러운 사건을 최대한 억지스럽지 않게 풀어내려고 머리를 굴린 작가의 노력이 보였다’라고 평하고 싶다. 이쯤 되면 조금은 궁금해 지지 않으신지? 과연 그 ‘고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달리 마니아, 고치 안에서 죽다.

 

프로토 캡슐에서 발견된 시체는 정말 기이했다. 머리를 둔기에 맞아 사망한 듯 보이는 시체의 주변에는 혈흔이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도 수염이 없었다. 수염이 없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으나 이 시체는 조금 특별했으므로 잘린 수염은 피가 거의 흐르지 않은 시체보다도 더욱 기이한 일이었다. 사망한 이는 규모 있는 주얼리 브랜드의 사장인 도죠 슈이치로, 열렬한 달리 신봉자 였다.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를 너무도 동경한 나머지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안테나 수염을 코스프래 하듯 기르고 다녔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기행은 단시간에 회사를 크게 일으킨 남다른 사업 수완과 더불어 큰 주목 받으며 그가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세를 누리는데 일조했다. 그런 그가 수염이 잘린 체 그의 별장 안 은밀한 휴식처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누에는 고치를 짓고 그 안에서 번데기가 되지. 진주조개는 껍질 속으로 침입한 이물질을 수천 겹의 진주층으로 감싸 보석을 만들어. 인간도 마찬가지야. 인간의 고치 속에서도 갖가지 것들이 변화해 다양한 무언가가 만들어 지겠지. - 405쪽

 

혈흔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살인현장, 사라진 무기와 피해자의 옷, 프로트 캡슐 안에 기이하게 내버려진 도죠 슈이치의 시체까지 모든 요소들이 살인임을 암시하는 기괴한 사건 수사에 ‘필드워크’를 명목으로 임상범죄학자인 히무라 히데오와 그의 절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참여하게 된다. 경찰은 도죠 슈이치의 주변 인물들과 신상을 조사하는 한편 그에게 살의를 가질 만한 인물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둔다. 도죠 슈이치가 엄청난 자산을 보유한 재력가였지만 독신이었다는 점, 회사 내에 부하직원과 연적 관계였다는 점 등을 들어 그가 없어지면 금전적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득을 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수사하기 시작한다. 사라진 피해자의 옷, 사라진 둔기 그리고 사라진 피해자의 수염. 증거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면서 사건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과연 도죠 슈이치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인가? 그는 왜 도죠 슈이치의 수염을 잘랐을까?

 

 

주요 관전 포인트를 안내합니다.

 

이 책은 살바도르 달리의 회고록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놀랍게도 자궁 안에서의 기억을 갖고 있다고 고백하며 ‘그곳은 더없이 편안한 낙원이었다’고 회상했다. 과연 그가 정말 자궁 속에서의 기억을 갖고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니 차치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자궁’이다.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따뜻한 물에 감싸여 온갖 소음과 따가운 빛과 중력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서 오로지 편안하게 존재했던 공간이 바로 자궁이다. 비록 떠올리지는 못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의 편안함을 경험했고, 세상의 온갖 내적인 스트레스와 외적인 위협을 견디며 안식을 구하고자 한때 본능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곳이다. 달리가 말했던 것처럼 그곳은 낙원이었을지 모른다. 괴로운 일상에서 누구나 그리워하는 안식처의 이미지이자 낙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징을 여기서는 ‘고치’라고 표현한다.

 

정신적·육체적인 위협을 가해오는 세상에 대해 누에고치가 고치를 만들어 그 안에 거처하듯이 자신만의 안식처를 정해 그 안에서 안락함을 취하고자 하는 성향을 사회학에서는 ‘코쿠닝(cocooning;고치 짓기) 현상’이라고 한다. 편안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도 강력한 본능이므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고치’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화목하고 안정된 가정이 ‘고치’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마니악한 취미가 특별한 안식처가 될 것이고, 이 이야기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도죠 슈이치의 경우는 자궁을 재현한 듯 한 명상기계 ‘프로트 캡슐’이 그것이었다. 멋지게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내는 콤비 히무라와 아리스에게도 ‘고치’가 있다. 히무라의 고치는 필드워크라는 명목으로 벌이는 사건 현장에서의 탐정놀음이고, 아리스의 고치는 잔혹한 범인이 등장하고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추리소설을 쓰는 것이다. 어째서 이들은 이렇게 잔혹한 ‘고치’를 갖게 되었을까? 그들이 그런 무시무시한 ‘고치’를 갖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히무라가 교수인 본분을 망각하고 휴강을 펑펑 날리며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는 이유, 아리스가 잘 다니던 직장을 떼려 치우고 범죄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이 책에서 소개된다.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아마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어째서 살바도르 달리를 소재로 이용했을까? 하는 의문도 이 책에 흥미를 놓지 않고 끝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정확히는 어떻게 살바도르 달리가 추리소설 소재로 녹아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살바도르 달리를 추종하는 슈이치와 갈라처럼 너무나도 매력적인 여인 사기오 유코, 그리고 갈라의 수많은 애인들처럼 사기오 유코를 좋아하는 많은 남자들이 등장한다. 엄청난 재력을 자랑하는 독신남에 달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슈이치는 어째서 프로트 캡슐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가. 돈 혹은 사랑, 그가 죽으면 이득을 보는 이가 분명히 있다. 살해 동기는 다양하고 용의자가 될 만한 인물들도 여러 명이다. 철저한 알리바이 검증으로 하나 둘씩 용의자를 지워나가는 전개에 집중하면서 어째서 달리인지 생각해 보시라. 작가는 속이지 않았다. 숨겨놓은 조커 따위는 없다. 하지만 반전은 있다. 한정된 용의자들 가운데 범인을 직감해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째서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지는 아마 마지막장을 덮을 때 까지 아리송할 것이다.

 

사건은 기괴해 보이고 모든 정황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살인사건이지만 사건의 전말은 아주 명쾌하다. 도전해 볼만한 미스터리로 나는 퍽 즐겁게 읽었다. 과연 어떨지?

 

 

 

++덧, 서평을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갈수록 책장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오해 않으셨으면 좋겠는 것이, 나는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라도 재미없으면 재미없다, 난해하면 난해하다, 거지같으면 거지같다고 평하는 사람이다. 별로 서평을 열정적으로 쓰지는 않지만 일단 서평을 쓰는 책은 어떤 식으로든 인상적인 책임을 밝힌다. 이 책은 긍정적으로 인상적이었다.(뭔가를 써야 하기도 했지만)

 

평가단 활동도 거의 끝물이라 좀 잘 해보고 싶은 마음에 서평 제목이라도 멋들어지게 붙이고 싶었더랬다. 제목을 뭘로 할까 고민했는데, 사실은 “어떤 일이든 치정이 얽히면 복잡해 지더라”라고 붙이고 싶었지만 은근 스포 아닌 스포가 될지도 몰라서 소제목중 하나를 갖다 붙였노라!(라면서 이제와서 밝히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면 나도 모르오.)

 

오타 아닌 오타인 것 같은데, 248쪽의 밑에서 세 번째 줄, [슈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요시즈미를 어딘가로 데려가려 했다.]에서 슈지가 아니라 슈이치다. 그러니까 이 둘은 형제인데, 형이자 피살자가 형인 도죠 슈이치고 그 동생은 도죠 슈지다. 이름이 조금 비슷한데, 요 부분은 요시즈미와 슈이치가 둘이서 대화하는 장면이고 아직 슈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로 오타인가?!

 

2012년 3월 20일 고쳐서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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