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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평점 :
**트릭에 대한 암시가 있어요.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이 글을 조심하세요!**
유명 미스터리 소설 작가들의 극찬도 극찬이었지만 입소문만으로 10만부가 넘게 팔린(총 2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1960년대 쓰여진 추리소설이란 소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더라도 저는 이 책을 읽었을 겁니다. 너무 궁금하고 기대가 되는 책이었거든요. 그간 이 책에 대한 서평이 무수히 올라왔지만 보지 않고 묵묵히 견뎠습니다. 혹시나 네타를 당할까봐 겁이 나더라고요.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누군가에게 ‘네타’가 될 지도 모르는 글을 게시하려고 한다니 복잡한 기분이 드네요. 나름대로는 최대한 에둘러서 써 보겠지만, 눈치 빠른 분들은 금방 알아채실 것 같아 미리 알려드립니다.
애절하고 가슴 시린 법정 드라마!?
이 이야기는 존속 살해 협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끝까지 그의 결백을 믿어주었던 단 한사람의 도움으로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증거와 증인들의 진술이 피고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심지어 그의 변호인조차 변론을 포기한 사건에서, 누명을 쓰고 사형대에 올라야 하는 그 부조리하고 억울한 일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호측 증인의 진술에 의해 뒤집어 지고 진범이 밝혀지게 된다는 스릴 넘치는 법정 드라마예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험한 인생을 살아온 스트립 댄서 미미 로이는 방탕한 재벌가의 외아들 야시마 스키히코를 만나 동화 같은 결혼을 하게 되요. 딱히 신데렐라를 꿈꿨던 적이 없는 미미 로이는 그녀를 반대하는 시아버지와 시누이 사이에서 조마조마한 신혼생활을 보냅니다. 재벌가의 엄청난 재산 보다는 따뜻한 가정을 원했던 그녀에게 야시마가는 냉담할 뿐인데요. 그녀로 인해 그녀의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의 골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가는 가운데, 그녀의 시아버지가 별채에서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최근 시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편이 의심을 받을까 걱정이 된 미미 로이는 경찰에 위증을 하게 되는데요, 이는 뜻밖의 문제를 불러오고 맙니다.
그녀의 위증으로 단순해 보였던 사건은 복잡하게 꼬여 버렸고, 그들 부부는 위기를 맞고 맙니다. 과연 진범은 누구일까요? 단단히 뒤엉켜 버린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낼 결정적 단서를 지닌 변호측 증인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의 서평들을 쭉 둘러보니 ‘꼼짝없이 당했다’는 분들도 많았지만, ‘트릭이 시시했다’ ‘어디서 본 듯한 전개였다’라는 평을 남기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는 꼼짝없이 당했습니다. 아니, 이미 이 책을 받아 읽기 전부터 속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감히 추측컨대, 아마 이 책의 트릭을 간파하신 분들은 이미 수많은 추리 미스터리 물을 두루 섭렵하시어 이 분야 ‘고수’의 반열에 올라선 분들이거나, 유달리 기민하고 감이 좋은 분들이거나 아니면 보통 사람 수준 이상으로 합리적인 사고를 하시는 분들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 책 속의 이야기가 품고 있는 트릭은 사람의 심리적인 면과 인지적인 습성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들어낸 견고한 속임수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저지른 첫 번째 실수
레이몬드 챈들러는 그의 에세이(「심플 아트 오브 머더」. 북스피어. 2011년)에서 당대의 유명 탐정소설들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이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이 모든 탐정소설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렇다 ― 수수께끼로서는 충분히 지적이지 못하고, 소설로서는 충분히 예술적이지 못하다. 지나치게 진부하고, 실제 세상을 반영하지 못한다. 정직하려고 는 하지만, 정직함이란 본디 예술의 영역이다. 실력이 떨어지는 작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직해지며, 괜찮은 작가들은 무엇에 정직해야 할 지 모르기에 정직해지지 못한다. 작가는 게으른 독자를 속여 넘길 만큼의 복잡한 살인 계획이 경찰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독자는 디테일에 집착하지 않는 반면 경찰은 디테일이 본업이다.
<레이몬드 챈들러 「심플 아트 오브 머더」 p. 24>
그는 에세이에서 당대의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탐정소설의 허점을 꼬집고 폐쇄적인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제한적인 문학에서 어째서 명작다운 명작이 나올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는데요, 그 원흉으로 지목된 이유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게으른 독자’였습니다. 독자가 이미 심리적으로 속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죠. 작가가 어떤 허술한 구성으로 말도 안 되는 트릭을 만들어 낸다고 한들, 독자는 그것에 어떠한 딴죽도 걸지 않는 다는 겁니다. 결국 작가도 독자를 속이기에만 급급해져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소설’같은 이야기만을 만들어 낸다는 거예요.
저는 이 글을 읽고 아주 무릎을 탁 쳤답니다. 속고 싶어 하는 독자, 디테일에 무관심한 독자, 미스터리에 어떠한 현실적인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게으른 독자가 바로 저였거든요.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랬어요. 제가 필사적으로 혹시나 어딘가에서 암약하고 있을지 모를 네타폭탄들을 피해왔던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미리 알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나는 기막힌 반전을 기대하고 있었고, 작가가 준비한 반전이 무엇이든 나를 완벽하게 속여주길 바랬거든요. 머리가 멍해지는 충격을 원했던 겁니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자, 나는 속아줄 만반의 준비를 갖췄어. 어서 나를 속여줘.’ 라고 외치고 있었으니 작가가 어떤 단서들을 흘려놓았던들 깊게 파고들 생각을 안하고 있었던 거죠. 비단 저 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독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고 마는 아량 아닌 아량이고, 실수 아닌 실수인 거죠.
이렇게 준비된 판에 작가는 작지만 결정적인 트릭을 더합니다. 실은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거지만, 그런 단순한 것일수록 꾸며내기 어려운 법이지요. 그래서 이 작가에 대해, 이 작품에 대해 다들 그렇게 극찬을 해 댔나 봅니다. 저도 완전히 납득해 버렸습니다.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기 때문에 바닷물에 소금한줌 던져 넣은 것처럼 교묘하게 장치하기 어려웠을 ‘그것’을 작가는 아주 담담하고 재치 있게 해냈더군요. 중간 중간 힌트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작가는 나름대로 이야기의 전개 사이사이 성의껏 힌트를 뿌려뒀습니다만 ‘이부분은 조금 이상하네’ 하고 넘어갈 뿐이었고, 게다가 이미 속을 마음인 독자는 결국 속게 돼 있었지요.
의식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두 번째 실수
작가가 이야기에 장치한 ‘것’은 사람에게는 아주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거든요. 우리는 대부분 아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부딪치는 돌발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앞으로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백퍼센트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스스로에게 이득이 가는 방향으로 행동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그런 상황판단은 대부분 아주 즉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행동 경제학 에서는 그런 인간의 인지적인 특성을 ‘휴리스틱’이라고 부른답니다. ‘휴리스틱’ 이라는 말은 ‘생각의 지름길’ 혹은 ‘직관적 판단’이란 말로 바꿀 수 있는데요. 이 휴리스틱 이라는 것은 그간의 개인적인 경험과 학습에 의해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참고 데이터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판단해야 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휴리스틱을 적용합니다. 대게는 경우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몇몇 예외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휴리스틱으로 인해 오히려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휴리스틱에 의한 인지과정은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됐더라도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지 알기 어렵고 그것을 금방 바로 잡기가 쉽지 않아요. 결국은 애초에 어디에서 부턴가(생각보다 훨씬 이른 어느 부분일 수도 있고요) 속아버리게 되는 것이죠.
이 책은 이런 추리 소설 물을 읽는 독자의 특성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죠. 이 책의 해설을 덧붙인 미치오 슈스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자 스스로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아주 대략적인 틀만 보여줄 뿐입니다. 하지만 그 ‘틀’이라는 것이 워낙에 탄탄했기 때문에 독자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작가의 의도대로 붓을 놀려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트릭이라면, 이런 이야기라면 독자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는 겁니다. 독자들이 인간인 이상, 우주 멀리 어딘가에 전설처럼 존재한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별 같은 데서 사는 초 합리적인 외계인이 아닌 이상 속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할겁니다.
나는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속아버렸습니다. 정말 비참하게 당했습니다. 그래서 유쾌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내 생에 최고의 미스터리를 꼽는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도 있는 그런 책을 만난 것 같아요. 모든 트릭을 알게 되고 나면, 정말 ‘작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이제까지 읽어왔던 텍스트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하거든요. 마치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경해 지죠. 그렇게 갑자기 낯설어져 버려서 이내 소름이 돋아버리는 거예요. 물론, 시시하게 읽힐 수도 있는 책입니다.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힐 수도 있고요. 저는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서평을 읽는 누군가에게 이 허접한 글이 이 책을 읽는 ‘흥미진진함’을 빼앗아 버리는 글이 되 버리진 않을지, 조금 걱정은 됩니다. 나는 최대한 에둘러 쓰려고 노력했답니다. 그 노력만은 알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