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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평점 :
가족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하루아침에 도망자의 신분이 된 여인 황재하. 가족들을 살해한 진범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은 황재하는 남장을 한 채 도망 다니다 몰래 숨어든 마차 안에서 황족 이서백을 만나게 된다. 황실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을 해결해준다는 조건으로 그의 곁에 머물게 된 황재하는 여인이 아닌 환관 양숭고의 신분으로 사건의 단서들을 모으며 사건을 수사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증언을 바탕으로 각 사건들이 모두 이어져있다는 것을, 실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 일이 시작된 것임을 밝혀내게 된다.
처음에 이 책의 표지만 보았을 땐 어릴 때 종종 보았던 중국 황실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궁에 들어간 여인이 갖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총명하며 지혜로운 자신의 성정으로 고난을 이겨나간다는. 하지만 이 책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추리소설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다. 소재가 소재다보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많은 것들을 이어 생각하게 됐다. 그 속에 담긴 비밀, 과거의 일들, 범인의 정체 등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부분을 하나씩 밝혀내기도 했고, 그러면서 내가 생각한 추리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에선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그렇듯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읽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문장을 만나는가 하면 황재하와 이서백의 대화를 읽으며 살짝 미소 짓기도 했고, 주자진의 엉뚱한 면모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두꺼운 분량의 소설이지만, 전혀 읽기에 부담스러운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첫 장을 펼쳐보면 끝까지 읽게 되는 흡입력 있는 소설이다 보니 남아있는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편으론 이 책의 끝부분을 빨리 읽어보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리기도 했다. 1권을 다 읽은 지금, 하나의 사건이 잘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다. 이서백이 들고 다니는 작은 물고기가 담긴 유리병과 그와 관련된 미스터리한 일들, 황재하의 가족들을 살해한 진범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여러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우리가 밝혀내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다음 권에 대한 기대가 크다.
+ 마지막 번외에 실린 황후 왕작의 이야기도 마음에 남는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순 없지만, 피해자든 가해자든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소리를 담아내려 한 작가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그저 아직 보지 못한 것에 대해 가지는 환상일 뿐입니다. 사람은 간혹 멀리 보이는 풍경을 더 좋게 보고,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을 가장 아름다웠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제가 황재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의 꿈이 와장창 깨질지도 모르지요." - P307
하나의 사건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같다. 땅 위로 보이는 부분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땅속으로 거대한 뿌리가 얽히고설켜 땅을 파보기 전까지는 거기 파묻혀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 P313
사건과 연루된 악인이든, 선인이든, 권세가이든, 비루한 신분의 사람이든, 작가는 놓치지 않고 그들의 인생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탐욕스러운 인간의 본성을 사건과 인물을 통해 투영하면서도 악인들이 외치는 안타까운 호소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결국에는 주인공 황재하와 이서백의 시선을 통해 선악의 구분을 명확히 하여, 감정에 흔들린 독자에게 진실의 본질을 잊지 않게끔 다시 길을 안내해준다. - P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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