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문선 2 - 오래된 개울 한국 산문선 2
권근 외 지음, 이종묵.장유승 옮김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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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도서가 아홉 권이나 돼서 어떤 책을 먼저 읽으면 좋을지 고민했었다. 서점까지 가서 각 권의 시대와 목차를 간략하게 훑어보았지만, 신청하는 당일까지 첫 권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동안 수업시간 때 들었던 많은 문인들이 있었고, 그렇게 제목과 위인만 들어보았을 뿐, 내용은 접해보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
수많은 고민 끝에 내가 이번 활동의 주제로 결정한 책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열리는 2권, 오래된 개울이었다. 문학의 꽃이 피는 조선전기의 문인들을 만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이번 <한국 산문선>은 조선 초 서거정의 <동문선> 이후 처음으로 기획된 전 시대를 망라한 산문 선집이라고 한다. )

조선 초에 정도전은 "해달별은 하늘의 글이고, 산천초목은 땅의 글이며, 시서예악은 사람의 글이다."라고 말했다. 해와 달과 별이 있어 하늘은 빛나고, 산천과 초목이 있어 대지는 화려한 것처럼, 시서와 예악은 인문이 있기에 사람은 천지 사이에서 빛나는 존재로 살아간다. 글은 사람에게 해와 달과 별이요 산천과 초목이다. (...) 글로 빛나던 선인들의 인문전통은 명맥이 끊긴 지 오래다. 자랑스럽게 읽던 명문은 한문의 쓰임새가 사라지면서 소통이 끊긴 죽은 글로 변했다. 오래도록 한문 산문은 동아시아 공통의 문장으로 행세했다. 말을 전혀 못해도 필담으로 얼마든지 깊은 대화가 오갈 수 있었다. 이제 그 전통이 단절되었다 하여 해와 달과 별처럼 빛나고, 산천과 초목인 양 인문 세계를 꾸미던 명문의 전통을 없던 일로 밀쳐 둘 수 있을까?

 

대개 '한국고전문학'이라 하면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한글보다 낯선 한자에 지레 겁을 먹었고, 친해질 기회는커녕 읽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세계문학에는 시대 상관없이 차별을 두지 않았으면서, 우리 고전문학에는 내외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손끝으로 문장읽기>활동은 의미가 있다. 원문(한자)과 함께 한글로 된 풀이와 해설이 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고, 이야기 또한 흥미로워 필사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중엔 마음 아픈 글도 있었고, 반성하게 만드는 글도, 무언가 깨달음을 주는 글들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글은 대부분 우언 형식의 설이었는데,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주고자 했던 취지가 내게 잘 맞았던 것 같다.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던가 부부끼리 서로를 위하는 마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깨우치는 마음 등 그때나 지금이나 시대가 가로 막을 수 없는 공통된 정서가 존재하는 것 같다. <한국 산문선>을 만들어준 여러 선생님들에게 감사드린다. 덕분에 한문으로 가득한 낯선 세계로 어렵지 않게 들어올 수 있었고, 천고를 벗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읽는 내내 즐거웠고, 또 다른 우리 고전의 문장들을 만날 자신도 생겼다. 언젠가 <한국 산문선>의 또 다른 이야기도 읽어볼 것 같다.

 

2018. 0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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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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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땐, 판타지 소설이 아닐까 싶어 선뜻 빌리기가 주저되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이 책이 ‘판타지 소설’이 아님을 알게 된 후, 바로 책을 빌려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정말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소재가 그려져 있어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피아노를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피아노 조율사지만, 주인공 주변에는 여러 조율사와 피아니스트, 그리고 피아노를 사랑하는 많은 고객들이 존재한다.
책을 읽다보면 피아노를 치고 싶은 마음이 넘쳐흐른다. 어릴 때 치던 피아노가 생각나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소리들이 그리워진다. 문장을 읽을 때마다 상상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뚜껑이 열린 숲에서 나는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를.

 

2018. 01. 31

7~8p.
눈앞에 크고 새까만 피아노가 있었다. 크고 새까만 피아노였을 것이다. 피아노 뚜껑은 열려 있었고 그 옆에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그 사람이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피아노건반을 몇 군데 두드리자, 뚜껑이 열린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 밤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77~78p.
양털 해머로 강철 현을 때린다. 그것이 음악이 된다. 야나기 씨가 촘촘하게 바늘로 찌른 그 하얀 해머는 오래되었고 크기가 작았지만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중동의 어느 나라에서는 양이 풍요의 상징이라고 들었어요."
야나기 씨는 양손을 깍지 껴 베개처럼 뒤통수에 댔다.
"유복한 사람이 양을 많이 소유했을 테니까 그냥 하는 이야기 아닐까?"
"아아."
양 목장을 가까이에서 보고 자란 나도 무의식중에 가축을 화폐 가치에 비춰보는 면이 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양을 생각하면 바람이 부는 초록 들판에서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풍경이 떠오른다. 좋은 양이 좋은 소리를 만든다. 나는 거기에서 풍요로움을 느낀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아도 풍요로움이라는 말에 고층 빌딩이 하늘을 찌르는 거리 풍경을 떠올리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271~272p.
"도무라네 고향에서 양을 많이 키운다고 했잖아. 그래서 생각났는데, ‘착할 선善‘이라는 한자는 ‘양羊‘에서 온 거래요."
"호오."
"‘아름다울 미美‘라는 한자도 ‘양羊‘에서 따온 거라고 얼마 전에 책에서 읽었어요."
기타가와 씨는 잠시 책의 내용을 생각하다가 떠올랐는지 다시 설명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양이 사물의 기준이었대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나. 선하고 아름답다고요. 그건 우리 사무소 사람 모두가 항상 진지하게 추구하는 가치잖아요. 선함도 아름다움도 원래 양이었다고 생각하면, 아아.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은 처음부터 피아노 안에 있었어요."
과연, 그렇구나. 처음부터 그 까맣고 윤기 흐르는 커다란 악기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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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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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게 울어도 괜찮은 시간이다.

 

2018. 01. 23

 

 

18~20p.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담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26p.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떠한 양식의 삶이 옳은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편지는 분노나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늦은 답서를 할 것이다. 우리의 편지가 길게 이어질 것이다.

116p.
극약이 곧 극독이고 극독이 곧 극약이라는 말은 수사修辭가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가 몸으로 들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고 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마음으로 들이는 숱한 사람들과 관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186~187p. 내 마음의 나이
하지만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 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오래 삶은 옷처럼 흐릿해지기도 하며. 나는 이 사실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
다시 새해가 온다. 내 안의 무수한 마음들에게도 한 살씩 공평하게 나이를 더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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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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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계절에 부는 바람처럼, 시리게 와닿는 문장이 많았다. 쓸쓸하고 헛헛한 마음이 든다. <아이를 찾습니다>에 나온 윤석과 미라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게 읽는 내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2018. 01. 05 

71p. <아이를 찾습니다>
그에게 미라는 카라반의 낙타와도 같은 존재였다. 목표와 희망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못해도 돼. 웃지 않아도 좋아. 그저 살아만 있어다오. 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그래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끔찍한 모래지옥을 함께 지나가겠는가.

92p. <인생의 원점>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말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

122p. <옥수수와 나>
수지는 차를 몰고 회사로 돌아갔지만 나는 카페에 더 남아 있었다. 이상하게 수지를 만나면 나는 그 옛날의 철없던 시절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응석을 부리고 어깃장을 놓고 위로를 구걸한다. 나는 이제 옥수수가 아닌데, 정말 옥수수가 아닌데, 그런데 수지가 그걸 모르고 있으니, 내가 이제 더이상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카페를 나오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흐린 하늘에는 뒤룩뒤룩 살찐 비둘기떼만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199p. <최은지와 박인수>
"(...)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느끼는 게 뭔지 알아?"
"무슨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것 같은 개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죽을 때 죽더라도 약은 팔지 말자."
"살아오는 동안 내 영혼을 노렸던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이 갑자기 주먹을 뻗었다. 병자답지 않은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피했다.
"그렇지, 주먹이 날아오면 이렇게 잘도 피하면서 왜 영혼을 노리는 인간들에게는 멍하니 당했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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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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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인간에게도 감정이 있을까. 복제인간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인스타그램에 과제물을 올리며 생각을 정리할 때도,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다. ⠀⠀⠀⠀⠀⠀⠀⠀⠀⠀⠀⠀⠀⠀⠀⠀ ⠀⠀⠀⠀⠀⠀⠀⠀⠀⠀⠀⠀⠀⠀⠀⠀ ⠀⠀⠀⠀⠀⠀⠀⠀⠀⠀⠀⠀⠀
<밑줄긋고 생각잇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번이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와의 첫 만남이어서 여러 책들 중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많이 고민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이 책은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제인간을 다룬 SF물이라는 말에 선입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으로 정한 이유에는 다른 것도 아닌 책 표지에 있는 캐시의 말 한마디가 컸다. ⠀⠀⠀⠀⠀⠀⠀⠀⠀⠀⠀⠀⠀⠀⠀⠀ ⠀⠀⠀⠀⠀⠀⠀⠀⠀⠀⠀⠀⠀⠀⠀⠀ ⠀⠀⠀⠀⠀⠀⠀⠀⠀⠀⠀⠀⠀
"나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 ⠀⠀⠀⠀⠀⠀⠀⠀⠀⠀
마치 나를 향해 말하는 것 같았고,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책과 만났고, 지금은 그 선택에 만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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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작가에 대해 가장 놀랐던 건, 남자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캐시와 친구 루스, 즉 여자입장에서의 심리적 묘사가 탁월했다는 거다. 어떻게 여자로서 느끼는 감정의 미묘한 선과 갈등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작가의 정체를 모른 채 이 책을 접했더라면 당연히 여자작가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질투와 감정의 골이 섬세하게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야기의 전개가 작가가 뿌려놓은 단서 부스러기를 하나씩 따라가며 이어지기 때문에,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읽게 되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렇게 캐시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따라가다 보면, 읽는 내내 아이들과 한 뜻이 되어 무언가를 바라고 희망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참을 읽다보면 문득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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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책에 밑줄을 긋기 보다는 깨끗하게 보고 노트에 따로 필사하는 스타일이어서, 이번 <밑줄긋고 생각잇기>도 좋았던 부분을 필사하며 참여했다. 책을 읽으면서 한 번, 필사하면서 한 번,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또 한 번. 평소에도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이지만, <밑줄긋고 생각잇기>를 하면서 혼자 읽을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다른 독자분들의 밑줄과 감상도 읽어보며 나와 비슷한 점과 다른 부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점도 좋았다. 여전히 캐시의 물음에 대해선 어떤 답을 해주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복제인간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고 의문을 던진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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