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기쁨 - 책 읽고 싶어지는 책
김겨울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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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평소 자기계발서나 독서법에 관련된 책을 일부러 찾아 읽지는 않는 나이기에 이 책도 크게 기대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유익한 내용이 많다. 개인적으론 책의 초, 중반 부분이 정말 재밌었는데, 책에 쓰이는 종이에 관한 부분이라던가 펭귄클래식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등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알아가는 내용이 흥미로웠다. 이사를 할 때의 책에 대한 고민, 가름끈과 띠지의 유용성, 책(독서)에 대한 예찬, 내 삶에 있어서의 독서의 의미 등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도 읽는 내내 정말 많은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 책의 표지는 조금 특이하게 벨벳으로 되어있는데, 일반 표지와는 다른 부들부들한 감촉이 조금은 낯설면서도 기분 좋게 느껴져서 계속해서 책을 쓰다듬어가며 읽은 기억이 난다. 이 <독서의 기쁨>은 표지에 적힌 대로 책 읽고 싶어지는 책이면서도 (내 생각엔 표지 때문에 더더욱) 책을 만지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하다. 책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책과 친해지지 못한 많은 안타까운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2018. 04. 20

109p.
언제부터였을까. 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은. 시간의 다이얼을 돌려보면 대학생 시절에도, 고등학생 시절에도, 중학생 시절에도, 초등학생 시절에도 손 가장 가까이에 책이 있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기억이라면, 나의 기억은 활자로 구성되어 있다. 인생의 가장 높은 산과 가장 깊은 골에 켜켜이 쌓인 그 활자들은 나를 때로 살게 하기도 했고 살고 싶게 하기도 했다.

202~203p.
만년필과 종이가 모두 준비되었다면 주변을 정리한 뒤 필사를 시작한다. 책을 고르고 원하는 부분을 펼쳐 두꺼운 책으로 고정한 뒤 스탠드를 킨다. 펜을 들고, 쓴다.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글씨가 어그러진다. 입으로 구절 구절을 되뇌며 공책을 채운다. 활자가, 목소리가 되었다가, 다시 활자가 된다. 서걱서걱 하는 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때로는 그 소리만으로 위로받기도 한다.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쓴 책을 다시 시간을 들여 베껴쓰는 일을 할 수 있다니, 그럴 수 있는 펜과 종이와 시간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그 축복에 비하면, 인생의 많은 일들은 별 게 아니다.

206p.
펜이든 키보드든 핸드폰이든 머릿속이든, 이렇게 기록하고 나면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내가 가진 책들이 나의 정신에 침범하는 그 느낌 말이다. 사유의 빈틈에 정확히 내리꽂혀서, 개념의 연결망을 바꾸어놓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 들어앉는 그 특별한 느낌은 책을 친구로 둘 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211p.
베리트, 비비 보켄, 마리오 브레자니와 함께 지하실에 있는 동안 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책이 어떤 건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한 권의 책이란, 죽은 자를 깨워 다시 삶으로 불러내고 산 자에게는 영원한 삶을 선사하는 작은 기호들로 가득찬 마법의 세계다
ㅡ 요슈타인 가아더, 《마법의 도서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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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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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문학동네 웰컴키트 덕분에 이번 2018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다른 때 보다 좀 더 이른 시기에 접해볼 수 있었다. 매번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나 둘씩 만나곤 하지만 이번 2018 젊은작가상 수상작들은 마음에 남는 편이 유독 많았는데, 그 중에 가장 오래 여운을 남긴 건 박민정 작가가 쓴 <세실, 주희>와 김세희 작가가 쓴 <가만한 나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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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주희 - 박민정>
위안부집회에서 마르디 그라 축제를 떠올리는 주희와, 소녀상의 의미도 모른 채 위안부집회 행렬 속으로 자연스레 걸어들어가던 세실의 마지막 모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여운이 오래 남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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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7p.
지금 무슨 시위중인가요? 나는 시위대의 주변에 있으면 안 되는데…… 외국인은 좀 민감해서요…… 세실은 주희의 어깨에 얼굴을 갖다 댔다. 주희는 세실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세실 상. 이건 평화로운 집회예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집회예요.”
세실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나도 중학교 때부터 반전 집회에 참여했어요, 일본에서. 우리 할머니도 전화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주희는 기분이 이상해져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은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듯 발돋움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희는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실, 당신의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 세실의 할머니는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면서요…… 그런 말을 세실에게는 결코 할 수 없었고 주희는 조금 참담해졌다. 세실 상, 다른 길로 갈까요? 주희는 세실에게 진지하게 물었고, 세실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가요. 주희는 순간 뉴올리언스의 펍에 앉아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 J는 미국인 남자애들과 우르르 일어서며 주희에게 피곤하면 안 가도 돼, 여기서 좀더 마시고 있어, 라고 말했고, 주희는 아니, 따라가고 싶어, 대답했다. 따라가고 싶어. 그 말을 했던 자신을 생각해내자 비참해진 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르디 그라, 참회의 화요일이 육박해오는 순간이었다. 행렬은 어느덧 소녀상 근처에 도착했고 세실은 동상의 의미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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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나날> - 김세희
20대의 한 시절을 채털리부인으로 살아왔던 주인공이 블로그 이웃으로부터 쪽지를 받고 자신이 그동안 (제대로 상품을 사용해보거나 알아보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써오던 많은 블로그 게시물들의 여파(영향)를 알게 되었을 때의 반전은 섬뜩하면서도 너무 현실적이어서 아찔했다. 더이상 어느 곳에서도 채털리부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어쩐지 누군가를 많이 생각나게 했다. 열심히, 바쁘게만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 중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나 주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보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런 이들이 있다 해도 그들 또한 자신의 노력이 미치는 결과에 대해 모든 걸 알진 못한다. 그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또다른 피해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대부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른 상태에서 어느새 사회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스스로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었다고 자각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자각의 순간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 그렇기에 주인공이 쪽지를 받는 그 장면은 유독 많은 서늘함을 선사한다. 경각심과 죄책감, 두려움, 그로 인한 반성과 괴로움. 많은 감정이 교차하게 된다. 이들의 다른 소설들도 하나씩 읽어나가고 싶다. 뜻깊은 만남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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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p.
하지 않는 말들은 그것 말고도 또 있다. 별건 아니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 그곳을 나온 이후 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으나 어쩐지 펼쳐볼 마음이 일지 않는 책.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2018.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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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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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있어 첫 문장은 중요하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말로 강하게 시작한다. 강렬한 태양과 푸른 바다, 그리고 무언가 무감각해보이는, 그래서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주인공 뫼르소가 등장한다. 엄마가 죽고 난 뒤에 뫼르소의 행동에는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엄마의 장례식 바로 다음 날, 연인을 만나 같이 영화를 보고 바다에서 헤엄치며 하루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게 그렇고, 사람을 죽인 뒤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그러하며, 자신의 목숨이 달린 재판에서 ‘살기 위한 변론’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제대로 살펴보면, 우린 우리와 다른 뫼르소를 좀 더 가까이에서 알아갈 수 있다. 뫼르소는 자기 자신의 삶과 행동과 내면을 고백하듯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3인칭처럼, 즉 남의 일처럼 무심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기에, 자기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과장해서 말하지 않았다. 폴 발레리는 이를 두고 ‘그는 가장 적게 말함으로써 가장 많이 말한다.’고 하였는데, 뫼르소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엄마가 죽고 난 뒤, 평소처럼 셀레스트네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식당 사람들이 엄마의 죽음에 관한 질문을 할 텐데 그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또 엄마가 양로원으로 간 것이 이미 삼 년 전인데도 불구하고 “이제야” 아파트가 그에게는 “너무나” 커 보인다. 또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거리의 풍경에서 전날 영안실에서의 느낌을 다시 받게 되고, 개를 잃은 살라마노 영감이 옆방에서 우는 소리를 듣고 뫼르소는 엄마를 생각하게 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뫼르소는 겉으로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 엄마의 죽음에 전혀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뫼르소가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뫼르소의 생활만 보고 결정하고 판단한다. 그렇게 뫼르소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뫼르소는 확실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거짓말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와 비교해서 재판장에서의 판사, 검사, 변호사, 신문기자, 마을 사람들, 장례식에서 본 노인들 모두 뫼르소와는 다른 보통 사람들이다. 이 세계에 있어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가지고 있는 뫼르소는, 죽음 앞에서도 거짓말 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뫼르소는 이곳에서 ‘이방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8. 04. 02

9p.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124p.
사람이란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는 항상 과장된 생각을 품는 법이다. 그런데도 실상은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하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34p.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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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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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도리와 미소와 함께 해가 지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숨이 막히고도 무섭고 절망적인 현실. 누구하나 믿지 못하고 믿어서도 안 되는 이곳에서 무엇이 최선인 줄도 모른 채, 우리는 달리고 또 달린다. 그러다가도 문득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아, 이곳은 안전하구나. 이곳이 정말 내가 있는 세계구나.’ 하고 안심하는 동시에 또 다시 무언가 싸해지는 기분.
흡입력 있는 소설이라 휙휙 책장을 넘기다가도 인간이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 부분(어쩌면 가장 인간 본성에 가까운 모습인지도 모르는 그런 부분)에선 몇 번이나 책을 읽는 것을 멈추고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어야 했다. 전염병이나 인류멸망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모든 질서와 체계가 무너진 뒤 마주해야했던 인간의 민낯이 더 무섭게 느껴졌던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뜻한 감정을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건 이 끔찍한 재난 속에서도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2018. 04. 01

99p.
해민이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지킬 것을 지키고 경계할 것을 경계하고 함부로 사람을 믿지 않는 것.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되더라도 수치심만은 간직하는 것. 오늘 내가 살아 있음에 의문을 품는 것. 한국에서의 삶이 그랬다. 이곳의 삶이라고 다를 것 없다. 아니,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홀해지지 않을 수 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유심히 보고 듣고 아낄 수 있다. 한국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을 미뤘다. 내일이 있으니까. 다음에 하면 되니까. 기나긴 미래가 있다고 믿었으니까. 이젠 그럴 수 없다.

171p.
우리의 기적.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을까. 평생에 단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A, B, C가 아니라 완벽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사람이. 어떤 이는 지름길로 나타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가장 먼 길을 지난하게 지나고 모든 것에 무감해진 때에야 비로소 거기 있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기적을 만나려면 그곳까지 가야 한다. 멀어지며 그것을 갈구할 수는 없다.

177~178p.
언니와 나만 남겨졌을 때 난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겠다는 꿈. 언니 뒤로 숨지 않아도 되는 어른. 언니가 나를 숨기고 눈을 가릴 때마다 두려웠다. 두 눈을 부릅뜨고 모든 걸 볼 때보다 훨씬 두려웠다. 나를 숨기지 말고 가리지 말고 제발 막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숨지 않으면, 내가 모든 걸 보고 있으면 언니는 무너졌다.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야 언니는 최선을 다해 싸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언니가 나를 등 뒤로 숨길 때 언니와 나는 합체하는 거야. 또봇처럼 합체해서 우린 더 강해지는 거야. 나중에는 언니와 손만 잡아도 합체하는 것 같았다.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언니와 합체하지 않고도 내 몫의 싸움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른이 되려면 키도 커져야 하고 팔다리도 자라야 하고 아는 것도 많아져야 하고 사랑이 뭔지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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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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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은 충동적으로 읽게 된 소설이었다. 큰 기대 없이 첫 장을 펼쳤는데. 웬걸. 이 책의 제목이면서도 첫 단편인 <빛의 호위>를 읽고 나서 나는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과 권은의 만남, 권은이 주인공에게 했던 ‘사진에 빠져들게 된 계기’와 ‘태엽과 멜로디’에 대한 언급, 눈 내리는 풍경,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 거기에 나오는 노먼 마이어와 알마 마이어, 알마 마이어가 들려주는 자신의 과거와 그 속에 나오는 장과 함께한 이야기까지. 순식간에 그들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알마 마이어에게 있어 장이 준 악보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해준 빛이었고, 권은에게 있어 주인공이 준 후지사의 필름 카메라는 어둡고 피폐했던 권은의 삶에 존재했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조금은 특이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이 책의 제목이 어느새 친근하고 따스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삶과 고난에도 장이 작곡한 악보나 후지사의 필름 카메라 같은 것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어둡게만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도 다시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만드는, 우리들을 비춰주는 빛의 호위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빛의 호위>에서 방의 태엽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그래서 자신의 숨까지 멎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던 어렸던 권은이, <사물과의 작별>에서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힘들어했을 고모가, <잘가, 언니>에서 가족이란 이유로 희생해야만 했던 언니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 빛의 호위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우리들처럼.

 

2018. 03. 23

13p.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당신이나 나만큼만 울었을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그 자체니까.

23p.
ㅡ장이 작곡한 그 악보들은 식료품점 지하 창고에서 날마다 죽음만 생각하던 내게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빛이었어요. 그러니 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악보들이 날 살렸다고 말이에요.

27p.
편지 안에서 그녀가 내게 묻는다. 반장,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뭔지 알아? 편지 밖에서 나는 고개를 젓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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