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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북클럽 문학동네 웰컴키트 덕분에 이번 2018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다른 때 보다 좀 더 이른 시기에 접해볼 수 있었다. 매번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나 둘씩 만나곤 하지만 이번 2018 젊은작가상 수상작들은 마음에 남는 편이 유독 많았는데, 그 중에 가장 오래 여운을 남긴 건 박민정 작가가 쓴 <세실, 주희>와 김세희 작가가 쓴 <가만한 나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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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주희 - 박민정>
위안부집회에서 마르디 그라 축제를 떠올리는 주희와, 소녀상의 의미도 모른 채 위안부집회 행렬 속으로 자연스레 걸어들어가던 세실의 마지막 모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여운이 오래 남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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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7p.
지금 무슨 시위중인가요? 나는 시위대의 주변에 있으면 안 되는데…… 외국인은 좀 민감해서요…… 세실은 주희의 어깨에 얼굴을 갖다 댔다. 주희는 세실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세실 상. 이건 평화로운 집회예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집회예요.”
세실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나도 중학교 때부터 반전 집회에 참여했어요, 일본에서. 우리 할머니도 전화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주희는 기분이 이상해져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은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듯 발돋움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희는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실, 당신의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 세실의 할머니는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면서요…… 그런 말을 세실에게는 결코 할 수 없었고 주희는 조금 참담해졌다. 세실 상, 다른 길로 갈까요? 주희는 세실에게 진지하게 물었고, 세실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가요. 주희는 순간 뉴올리언스의 펍에 앉아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 J는 미국인 남자애들과 우르르 일어서며 주희에게 피곤하면 안 가도 돼, 여기서 좀더 마시고 있어, 라고 말했고, 주희는 아니, 따라가고 싶어, 대답했다. 따라가고 싶어. 그 말을 했던 자신을 생각해내자 비참해진 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르디 그라, 참회의 화요일이 육박해오는 순간이었다. 행렬은 어느덧 소녀상 근처에 도착했고 세실은 동상의 의미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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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나날> - 김세희
20대의 한 시절을 채털리부인으로 살아왔던 주인공이 블로그 이웃으로부터 쪽지를 받고 자신이 그동안 (제대로 상품을 사용해보거나 알아보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써오던 많은 블로그 게시물들의 여파(영향)를 알게 되었을 때의 반전은 섬뜩하면서도 너무 현실적이어서 아찔했다. 더이상 어느 곳에서도 채털리부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어쩐지 누군가를 많이 생각나게 했다. 열심히, 바쁘게만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 중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나 주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보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런 이들이 있다 해도 그들 또한 자신의 노력이 미치는 결과에 대해 모든 걸 알진 못한다. 그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또다른 피해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대부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른 상태에서 어느새 사회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스스로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었다고 자각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자각의 순간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 그렇기에 주인공이 쪽지를 받는 그 장면은 유독 많은 서늘함을 선사한다. 경각심과 죄책감, 두려움, 그로 인한 반성과 괴로움. 많은 감정이 교차하게 된다. 이들의 다른 소설들도 하나씩 읽어나가고 싶다. 뜻깊은 만남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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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p.
하지 않는 말들은 그것 말고도 또 있다. 별건 아니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 그곳을 나온 이후 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으나 어쩐지 펼쳐볼 마음이 일지 않는 책.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2018. 04.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