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간은 충동적으로 읽게 된 소설이었다. 큰 기대 없이 첫 장을 펼쳤는데. 웬걸. 이 책의 제목이면서도 첫 단편인 <빛의 호위>를 읽고 나서 나는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과 권은의 만남, 권은이 주인공에게 했던 ‘사진에 빠져들게 된 계기’와 ‘태엽과 멜로디’에 대한 언급, 눈 내리는 풍경,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 거기에 나오는 노먼 마이어와 알마 마이어, 알마 마이어가 들려주는 자신의 과거와 그 속에 나오는 장과 함께한 이야기까지. 순식간에 그들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알마 마이어에게 있어 장이 준 악보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해준 빛이었고, 권은에게 있어 주인공이 준 후지사의 필름 카메라는 어둡고 피폐했던 권은의 삶에 존재했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조금은 특이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이 책의 제목이 어느새 친근하고 따스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삶과 고난에도 장이 작곡한 악보나 후지사의 필름 카메라 같은 것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어둡게만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도 다시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만드는, 우리들을 비춰주는 빛의 호위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빛의 호위>에서 방의 태엽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그래서 자신의 숨까지 멎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던 어렸던 권은이, <사물과의 작별>에서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힘들어했을 고모가, <잘가, 언니>에서 가족이란 이유로 희생해야만 했던 언니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 빛의 호위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우리들처럼.

 

2018. 03. 23

13p.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당신이나 나만큼만 울었을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그 자체니까.

23p.
ㅡ장이 작곡한 그 악보들은 식료품점 지하 창고에서 날마다 죽음만 생각하던 내게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빛이었어요. 그러니 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악보들이 날 살렸다고 말이에요.

27p.
편지 안에서 그녀가 내게 묻는다. 반장,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뭔지 알아? 편지 밖에서 나는 고개를 젓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은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