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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곳으로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평점 :
이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도리와 미소와 함께 해가 지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숨이 막히고도 무섭고 절망적인 현실. 누구하나 믿지 못하고 믿어서도 안 되는 이곳에서 무엇이 최선인 줄도 모른 채, 우리는 달리고 또 달린다. 그러다가도 문득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아, 이곳은 안전하구나. 이곳이 정말 내가 있는 세계구나.’ 하고 안심하는 동시에 또 다시 무언가 싸해지는 기분.
흡입력 있는 소설이라 휙휙 책장을 넘기다가도 인간이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 부분(어쩌면 가장 인간 본성에 가까운 모습인지도 모르는 그런 부분)에선 몇 번이나 책을 읽는 것을 멈추고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어야 했다. 전염병이나 인류멸망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모든 질서와 체계가 무너진 뒤 마주해야했던 인간의 민낯이 더 무섭게 느껴졌던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뜻한 감정을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건 이 끔찍한 재난 속에서도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2018. 04. 01
99p. 해민이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지킬 것을 지키고 경계할 것을 경계하고 함부로 사람을 믿지 않는 것.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되더라도 수치심만은 간직하는 것. 오늘 내가 살아 있음에 의문을 품는 것. 한국에서의 삶이 그랬다. 이곳의 삶이라고 다를 것 없다. 아니,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홀해지지 않을 수 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유심히 보고 듣고 아낄 수 있다. 한국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을 미뤘다. 내일이 있으니까. 다음에 하면 되니까. 기나긴 미래가 있다고 믿었으니까. 이젠 그럴 수 없다.
171p. 우리의 기적.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을까. 평생에 단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A, B, C가 아니라 완벽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사람이. 어떤 이는 지름길로 나타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가장 먼 길을 지난하게 지나고 모든 것에 무감해진 때에야 비로소 거기 있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기적을 만나려면 그곳까지 가야 한다. 멀어지며 그것을 갈구할 수는 없다.
177~178p. 언니와 나만 남겨졌을 때 난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겠다는 꿈. 언니 뒤로 숨지 않아도 되는 어른. 언니가 나를 숨기고 눈을 가릴 때마다 두려웠다. 두 눈을 부릅뜨고 모든 걸 볼 때보다 훨씬 두려웠다. 나를 숨기지 말고 가리지 말고 제발 막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숨지 않으면, 내가 모든 걸 보고 있으면 언니는 무너졌다.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야 언니는 최선을 다해 싸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언니가 나를 등 뒤로 숨길 때 언니와 나는 합체하는 거야. 또봇처럼 합체해서 우린 더 강해지는 거야. 나중에는 언니와 손만 잡아도 합체하는 것 같았다.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언니와 합체하지 않고도 내 몫의 싸움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른이 되려면 키도 커져야 하고 팔다리도 자라야 하고 아는 것도 많아져야 하고 사랑이 뭔지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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