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카르테 1 - 이상한 의사 아르테 오리지널 6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채숙향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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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따뜻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본 것 같았다. 뒷장이 궁금한데도 남아있는 장수가 줄어드는 게 안타까워 최대한 느긋하게 읽었다.

주인공 구리하라 이치토 선생을 비롯해서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소소하고 따뜻한 끌림이 있는 사람들이다. 외모도 성격도 개성도 다른 이들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바르고 올곧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모든 인물에 정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인 구리하라 이치토와 그의 아내 하루나, 함께 지내는 온타케소의 주민인 남작(男爵)과 학사님, 병원 동료이자 학창시절 동기인 스나야마 지로, 병원 동료인 간호사 도무라와 미즈나시 요코, 왕너구리선생님과 여우선생님, 그리고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 남편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을 아즈미 씨까지. 미워할 수 있는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따뜻한 이들의 마음이 책장 밖까지 자연스레 스며나와 함께 슬퍼하기도 기뻐하기도 했다.

 

확실히 의사가 본업인 작가가 써서 그런지 의학용어라던가 응급상황에 대한 기술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건 이 분이 갖고 있던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오롯이 책의 인물들에 투영되어 작가의 이야기에 금세 매료되었다. 환자를 대하는 마음, 사랑하는 아내를 대하는 마음, 동료와 친구들을 대하는 마음까지. 온타케소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날들을 지켜보며 나도 어느새 몇 평 남짓의 공간에 함께 앉아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는 기분이었다. 하루나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이치토 선생과 남작과 학사님과 함께 술도 마시며 그렇게 책장 한 장을, 책에서의 하루를 함께 보냈다. 학사님의 숨은 사정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알면서도 묻지 않고 묵묵히 상대를 기다려주었던 이치토 선생의 배려를 알게 되었을 때, 밤새 복도 전체를 벚꽃으로 가득 채우며 학사님의 앞날을 열렬히 응원했던 남작과 하루나의 우정 어린 선물을 받았을 때, 마음 한 쪽이 뭉클해졌다.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기에 학사님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아르테의 책선물로 따뜻한 이야기와 좋은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1권을 다 읽은 지금, 아직도 내게 신의 카르테 이야기가 3권이 더 남아있단 사실이 완독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하나씩 하나씩 아껴 읽어야지. (아르테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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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고양이 1~2 세트- 전2권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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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시선에서 인간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소설이다. 배경은 테러가 일상화되고 내전이 시작된 파리. 그곳에서 암컷 고양이 바스테트는 집사 나탈리와 함께 살아가다, 옆집에 사는 신비한 수컷 고양이 피타고라스를 만나게 된다. 샴고양이 종의 피타고라스는 세련된 외모에 무언가 무심한, 그래서 어떻게 보면 거만해 보이는 것 같은 고양이로, 그의 두 눈 사이에는 연보라색 USB단자가 위치해 있다. 그는 이를 자신의 3의 눈이라고 말하며, 이를 이용하면 컴퓨터에 접속해 인간들과 소통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인간과 그들의 세상에 대한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바스테트를 만날 때마다 그의 지식을 그녀에게 전달해준다. 덕분에 바스테트는 그동안 자신이 궁금해 했던 사물의 이름과 기능, 현재 집밖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간들의 행동, 나아가 그 전에 있었던 길고 긴 인간과 고양이들의 역사관계까지 하나씩 차례대로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피타고라스의 짧은 강의는 독자인 내가 봐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는 다른 종과의 양방향 소통을 꿈꿔왔던, 그래서 종국에는 자신의 집사와 진정한 대화를 하기를 원했던 주인공 바스테트에겐 자신의 세상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훌륭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어느새 나도 고양이의 일원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이들이 고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치 같은 인간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매력이 한없이 발산되는 지점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이야기는 테러로 인해 서로 죽이고 죽이는 인간들이 어느새 커진 쥐들의 힘에 압도당해, 멸종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쥐들이 옮기는 페스트로 인해 많은 인간들이 죽고, 어느새 서로 죽이기에만 바빴던 인간들이 쥐들의 위험 앞에선 서로 뭉쳐 함께 도망치게 된다. 후반에 이르러서는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 그리고 한 샤면의 소통으로 인간과 고양이, 나아가 개와 사자를 비롯한 여러 종들이 함께 힘을 합쳐 쥐들에 대항해 싸우게 되지만, 이들이 마지막까지 함께 살아남을 수 있을지, 또 인간과 고양이의 소통이 앞으로의 상황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끝까지 읽고 생각해볼 문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는 인간이 다른 종(동물)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무엇보다 신랄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바스테트는 그 누구보다 집사 나탈리를 믿고 사랑했다. 그런데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바스테트의 자식들(새끼고양이들)을 바스테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이유와 판단만으로 토마와 함께 죽여버린다. 처음 바스테트가 새끼고양이들을 낳은 걸 알게 되었을 때 하나하나 품에 안아가며 귀여워했으면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그들의 사진을 찍어가며 그 모습을 담기도 했으면서. 어떻게 나탈리는 이런 일을 시킬 수가 있었을까. 그런 나탈리를 보며, 자신의 눈앞에서 새끼들이 죽어가는데도 방문을 긁고 소리지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바스테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찢어졌을까.

 

마지막으로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프게 떠났을 수컷 고양이 펠릭스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펠렉스의 최후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세상과 주변의 일에 무심할 때, 우리도 펠릭스와 같은 결말을 맞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그토록 큰 고통을 받아야만 했는지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토록 큰 고통을 받을 만큼 그가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2권] 236~237p. (작가의 말)

추신 6. 마지막으로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보다 덩치가 다섯 배는 크고 소통도 불가능한 존재가 여러분을 마음대로 다룬다면, 문손잡이가 닿지 않는 방에 여러분을 가두고 재료를 알 수도 없는 음식을 기분 내키는 대로 준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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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동물원
진 필립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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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밤의 동물원이 그 배경이다. 동물원에서 즐겁게 놀다 폐장시간이 다 되어 급히 정문을 향해 나서던 주인공 조앤과 그의 아이 링컨은 총을 들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범인들을 목격하게 된다. 혼자라면 모험이란 걸 감수하고 직접 움직여 도망치는 시도라도 해볼 조앤이지만, 그녀 옆에 어린 아들 링컨이 함께 있기에 섣불리 그러지도 못한다. 조앤에게 있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아들 링컨이니까. 그들은 10대로 추정되는 어린 범인들로부터 도망치고 숨고 또 도망치다가, 자신들 외에 동물원에 숨어있는 또 다른 사람들, 케일린과 마거릿을 만나게 된다. 과연 그들은 모두 무사히 동물원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조앤은 자신의 아들을 끝까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

 

올해 처음 읽게 된 스릴러 소설이었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오후 455분부터 805분까지 (중간에 회상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시간대별로 사건이 진행된다. 3시간 10,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시간이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온 동물원에서 총을 들고 있는 괴한들을 피해 도망치고 숨어야 하는 이들에게는 끔찍하리만큼 길고 지독한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범인들보다 더 상황을 긴박하게 만든 건,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링컨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만든 링컨이란 캐릭터는 범인들과는 또 다른 긴장을 선사한다. 나쁜 사람들이 있었다며 급하게 자신을 안고 도망가는 엄마에게 링컨은 계속해서 묻는다.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었어? 난 나쁜 사람 못 봤는데. 나쁜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 상황이 아무리 급박해도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천진난만하게 계속해서 묻는다. 아이의 질문은 엄마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해줄 때까지, 자신의 호기심이 다 충족될 때까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아이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걸 좋아한다. 지루한 적막은 견디기 힘들어 하고, 혈당 수치와 허기에 약하다. 언제 칭얼거릴 지도 모르고, 심하면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일까지 벌어질 수도 있다. 가끔은 범인들이 다가오는 소리보다 링컨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거나 떼를 쓰는 장면에 더 숨죽이기도 한다. 범인들이 어디서 들을지도 모르는 그 소리. ‘아이로서는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행동인데도, 범인들을 피해 숨고 도망쳐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 작은 행동이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엄마로서의 조앤은 더 많은 것을 신경써야 한다. 범인들의 위치도, 링컨의 상태도, 숨어있는 곳의 안전한 정도도, 주변의 작은 소음들까지.

인간으로서의 의무와 부모로서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던 조앤의 캐릭터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자식을 지키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의 아기를 외면해야 했던 그녀. 아무리 아들의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그녀는 사람으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를 벗어난 것 같아 도망치는 내내 마음이 좋지가 않다. 오래도록 그녀는 자신에게 뻗어오던 그 작은 손가락을, 사뿐거리던 그 두 손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결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진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너무 조앤링컨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던 거다. 배경소재가 독특했던 것만큼 이야기가 좀 더 길고 치밀하게 짜여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케일린과 마거릿의 이야기도, 범인들의 과거도 좀 더 자세하게 읽고 싶었다. 게다가 결말로 치닫는 부분이 조금은 성급하게 다가온 것 같아 결말의 여운이 여러모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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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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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알바생 자르기>를 읽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 소설 대부분을 서술의 주체인 중간관리자 은영의 입장에서 읽다가, 마지막 문단에 이르러서야 알바생 혜미의 입장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그렇게 앞으로 다시 돌아가 읽어보는 <알바생 자르기>의 내용은 처음 내가 읽은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그때의 충격은 컸다. 나도 모르는 새 자본주의 중심의 생각에 고립된 건 아닌지, 어째서 혜미의 행동이 그렇게 나쁘게만 보였던 건지, 많은 생각과 여운을 남겼다. 이번 <첫 번째 독자>에서 장강명 작가의 르포를 신청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 분의 소설에서도 느낀 것이 이런데, 르포는 또 어떨까 하고.
 
책은 이미 지난 주 목요일에 다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문단과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시간이 꽤 흘러버렸다.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나온다. 신춘문예나 문학공모전 외에도 삼성 입사시험, 공무원 시험 등 사회에서 지망생과 합격자로 나누는 대표적인 시험들을 다루고 있다. 나도 이런 종류의 시험을 공부할 때는 도무지 이런 것들이 세상 살아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그 회사에서 직무를 행하는데 무슨 관련이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꼬인 문제도 많았고 답이 여러 개인 것도 많았다. 출제자들조차 모를 것 같은, 답과 해설을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도 많았다. 왜 이런 것들까지 외워야 하나 싶은 건 더 많았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레 불만과 의문이 가득해지는 데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맞추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젊음과 시간을 이곳에 소비했다. 그렇게 체제에 순응하고 급히 원 안으로 들어가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너무나 버겁고 바쁘고 힘이 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폐해를 알고도 급히 받아들이기만 했던많은 시험들의 문제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벌써 2018년이 반 정도 흘러간다. 그런데도 우리사회는 아직 사회적 낭비가 심한데 정작 필요한 인재는 뽑지 못하고,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마저 막아버리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아는 것, 소위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늘어나지만, 도무지 이 지식을 어디다 써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저 합격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만 작용할 뿐, 합격하고 난 후엔 오히려 짐이 될 뿐이다. 그렇게 어렵게 시험에 합격을 하고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기준에 올라서게 되면, 또 다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까지 준비해온 건 아무 소용도 없고, 또 다시 그들이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기 위해 허덕인다. 기업 입장에서도 참 난감하다. 실컷 시간을 들여 뽑아놨는데, 합격생들 중 실무에 적합한 능력을 갖춘 이가 생각보다 많지가 않다. 또 다른 재교육을 하기 위해 기업 측에서도 손해를 봐야 하고, 이제 막 합격한 사회초년생들에겐 또 다른 지옥이 펼쳐진다. 이게 과연 누구를 위한 시스템일까.
 
문단의 상황도 크게 다르진 않다. 기존에 있는 신춘문예와 문학공모전은 그 나름의 순기능도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절망은 늘어나고, 또 다른 폐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 외에도 더 다른 제도들이 생겨나 다양한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 장강명 작가는 이 책의 199p에서 이렇게 말한다. “장편소설 공모전은 어떤 종류의 좋은 원고를 발견하는 도구로서는 분명히 뛰어나다. 그러나 공모전으로만 신인을 뽑게 될 때, 그래서 공모전이 배제의 도구가 될 때 거기에는 허점이 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다른 신인 발견 시스템이 잘 작동해야 한다. 그것이 장편소설공모전이 장점 위주로 잘 작동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대부분 해당분야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장강명 작가가 직접 질문을 던지고 그들이 답하는 인터뷰형식으로 전개된다. 현업 종사자가 직접 그 문제에 대한 답을 하다보니, 신용이 갈 수밖에 없다. 그 중에는 새로 알게 된 흥미로운 내용도 많았는데, 고인이 되신 민음사 박맹호 회장님의 단행본 출판 개척에 관한 부분이라던가, 문학동네 강태형 대표의 출판사를 시작한 이유와 공모전에 관한 생각이 그랬다. 강태형 대표는 문학동네 출판사를 처음 만들 때, ‘신인 작가 발굴을 위해 출판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기존에 있던 창비,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같은 잘나가는 출판사들이 그때까지만 해도 신인 작가 발굴에 활발하지 않았다고. 그때는 신춘문예 당선이나 현대문학 추천 등 어딘가에서 등단한 신인작가가 작품 활동을 하는 걸 보고 잘한다 싶으면 청탁을 해서 책을 내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저는 출판사는 작가가 창작 활동만으로 먹고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창비나 문지는,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비 출판을 했어요. 좋은 책 잘 만들어서 내면 독자들이 알아볼 거다, 굳이 광고까지 해 가며 책 팔 생각 없다. 그런 선비 정신이 있었죠. 그런데 아무리 잘 쓰고 열심히 쓰는 작가라도 1년에 책을 한 권밖에 못 써요. 그렇게 1년에 한 권 나오는 책은 출판사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책을 알리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문학을 하는 사람은 그런 걸 신경쓰지 않아야 할지 모르지만, 문학출판을 하는 사람은 신경 써야 한다고. 그게 내가 문학출판사를 하는 이유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 그렇게 생각했죠.” (79~80p.)
 
우리나라의 신춘문예나 기존 등단 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그때도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등단을 했다는데 책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단편 한두 편 발표하고 등단했다고 하는 게, 전 세계에 없는 특이한 제도죠. 시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자기 책이 없는데 소설가라는 칭호를 받는다는 건 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요. (작가 발굴을) 당장 출간할 수 있는 장편소설 공모인 문학동네소설상으로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81p.)
 
그동안 독자의 입장에서 책만 읽어왔었는데, 이번 책을 통해 출판사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 것 같다. 그중엔 평소에 궁금했던 내용도 있었고,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부분도 있었고, 아예 몰랐던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공모전 심사과정에 관한 부분은 특히 더 재밌게 읽혔던 것 같다.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는 진지한 설명과 인터뷰 사이에서 갑자기 웃게 만드는 장강명 작가 특유의 농담이다. 시종일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거운데, 책이 생각보다 어렵거나 지루하지가 않다. 인터뷰형식과 장강명작가가 풀어내는 현실상황, 그리고 그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진지하게 읽다가도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 ‘푸하하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외에도 장강명 작가가 이런저런 이유로 언급한 작품들이 몇 있는데, 그 작품들은 자연스레 나의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추가되었다. 덕분에 한동안 읽을 책들이 많을 듯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번쯤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어떤 생각을 하든 그 생각보다 얻는 게 많은 책이다. (소설공모전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한 부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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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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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에 마사시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여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으면서였다. 일본특유의 감수성이 잘 녹아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과 풍경묘사, 그리고 작품 도처에 내재되어 있는 탄탄하고 깊이 있는 건축지식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 작가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은 내게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부인과 아들이 있던 가장의 삶을 살았던 주인공이 아내와 이혼하면서 새로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 과정은 ‘가족들을 위한 생활’에서 ‘자신만을 위한 생활’로 패턴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꿈꾸던 새로운 집을 찾고, 이사를 하고, 집을 원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전작에서 선사했던 작가의 건축지식이 여기에서도 빛을 발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의 초반부분까지 읽었을 땐 생각지도 못한 인물관계에 조금은 불편했었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자 했는지 작가의 의도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지만, 오히려 결혼생활 때 따로 만난 사람이 아닌, ‘이혼한 후에 만난’ 새로운 사람과의 인연을 그렸더라면 조금은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고양이 후미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집주인 소노다 씨의 이야기가 조금은 부족하게 다루어진 것 같아 아쉬웠다. 조금 더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문장력만은 여전히 치켜세울만하다. 전작에서 그랬듯 이번 책에서도 여전히 일본 특유의 냄새가 짙게 묻어난다. 깔끔하면서도 담백하고 오래도록 생각나는 문체다. 자연스레 풍경이 그려지고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고, 책의 인물들이 계속해서 내게로 걸어온다. 이런 분위기의 소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8p.
하지만 애초에 잘못은 내 쪽에 있다. 아니, 그보다 앞으로 살게 될 낡은 일본 가옥에 오랫동안 가족과 썼던 가구를 들인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십오 년간의 기억이 가구에 배어 있다. 게다가 안 좋은 기억은 어디론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리운 추억만이 의자 팔걸이의 곡선에, 테이블의 둥근 모서리에, 캐비닛 서랍 손잡이에 조용히, 생생하게 숨 쉬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런 가구를 데리고 혼자 살 수 있을 리 없다.

52~53p.
일솜씨에도 이끌렸다. 가나는 대단히 유능한 데다 까다롭기까지 한 아트 디렉터의 어시스턴트였다. 미팅을 할 때마다 동석하고 디자인 팀을 조율하고 편집부와 빈번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체 작업이 지체 없이 진행되도록 한다. 그렇게 말하면 코치나 감독의 이미지가 떠오를지 모르지만 가나는 딱히 눈에 띄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빨래를 말리듯 그렇게 업무를 처리했다.

63~64p.
모자챙처럼 내민 차양은 집 내부의 연장 같고 나무도 불그스름하게 변색되어 마치 잘생긴 귀를 몰래 엿보는 기분이 든다. 아주 짧은 커트머리였을 때 가나의 귀. 저번에 국숫집에서 만났을 때는 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가나의 귓바퀴는 얇고 커브가 작은 데다 고양이 귀처럼 언제나 차가웠다. 아아…… 틀렸다. 차양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면 비누를 봐도 계단 난간에 손을 얹어도 문손잡이를 잡아도 가나를 떠올릴지 모른다.
차양에는 물론 실용성이 있다. 창을 열어놔도 실내에 비가 들이치지 않는다. 여름에는 햇빛을 가려줄 것이다. 비를 피하는 것은 집 안에 사는 인간만이 아니다. 서까래와 서까래 사이에 작년 말벌 벌집이 연꽃처럼 남아 있다. 박새가 두껍닫이에 둥지를 트는 것도 이 차양이 있기 때문이 틀림없다. 눈이나 입처럼 움직이지는 않아도 잠자코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도 차양과 귀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75~76p.
목욕을 모르는 우주인이 내 심야의 행동을 관찰한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좁은 상자 바닥에 검은 마개를 끼우고 가열한 물을 받은 뒤, 알몸이 되어 상자로 들어가서는 천천히 쭈그리고 앉아 어깨까지 물에 담근다. "후우"라느니 "아아"라느니 의미를 갖지 않는 소리를 입에서 뱉어내고 나서는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주인은 추리한다. 인간은 가열한 물에서 에너지를 얻는 게 아닐까. 아니면 피부의 신경세포가 물을 매개로 멀리 있는 뭔가와 교신하는지도 모른다.
꼭 빗나간 추론도 아니다.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하루 새 쌓인 앙금이 잡념이 되어 되살아나 차츰 안개처럼 흩어진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과 있었던 일, 불쾌한 사건, 정산하지 못한 영수증 다발, 직원 식당의 삼색 덮밥, 오늘도 쓰지 못한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굳었던 어깨도 풀린다. 호흡이 깊어진다. 하루의 끝에 목욕을 하면 자신이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 든다. 착각이라 해도 고맙다. 목욕은 위대하도다.

79p.
가나의 메일은 아주 간단했다. 거기에 쓰여 있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갓 세탁한 흰 시트처럼 무덤덤하고 그저 바람에 펄럭펄럭 날렸다. 나도 따라하듯 어디까지나 무심하게 승낙하는 답신을 보냈다. 메일이 오간 끝에 이번 주 토요일에 놀러 오는 것으로 약속이 잡혔다. 목소리를 들을 일도 없이 뭔가를 정하는 것은 편하다면 편하지만 뉘앙스를 알 수 없으니 점점 불안해진다.

98p.
공원을 가로질러 상수변 비포장길로 나왔다. 우리는 숲의 어둠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과묵해졌다. 철책 너머의 수풀에서 이제 처음 울기 시작한 것처럼 더듬거리는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내 귀는 흙길을 걷는 나와 가나의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발소리를 찾아내서 듣고 있었다.

105~106p.
후오, 후오, 후오…… 불안을 부추기는 듯한 소리였지만 생각해보면 수컷 솔부엉이가 암컷 솔부엉이를 향해 우는 게 틀림없다. 구애하는 울음소리. 암컷을 못 찾은 채로 늦가을이 돼서 짝을 짓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동남아시아로 돌아가는 수컷도 있을까.
얼마 동안 계속 듣고 있었다. 뭔가가 빨리는 듯한, 뭔가가 스며드는 듯한 울음소리. 온몸이 귀가 된 내가 그저 멍하니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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