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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평점 :
마쓰이에 마사시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여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으면서였다. 일본특유의 감수성이 잘 녹아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과 풍경묘사, 그리고 작품 도처에 내재되어 있는 탄탄하고 깊이 있는 건축지식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 작가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은 내게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부인과 아들이 있던 가장의 삶을 살았던 주인공이 아내와 이혼하면서 새로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 과정은 ‘가족들을 위한 생활’에서 ‘자신만을 위한 생활’로 패턴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꿈꾸던 새로운 집을 찾고, 이사를 하고, 집을 원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전작에서 선사했던 작가의 건축지식이 여기에서도 빛을 발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의 초반부분까지 읽었을 땐 생각지도 못한 인물관계에 조금은 불편했었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자 했는지 작가의 의도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지만, 오히려 결혼생활 때 따로 만난 사람이 아닌, ‘이혼한 후에 만난’ 새로운 사람과의 인연을 그렸더라면 조금은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고양이 후미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집주인 소노다 씨의 이야기가 조금은 부족하게 다루어진 것 같아 아쉬웠다. 조금 더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문장력만은 여전히 치켜세울만하다. 전작에서 그랬듯 이번 책에서도 여전히 일본 특유의 냄새가 짙게 묻어난다. 깔끔하면서도 담백하고 오래도록 생각나는 문체다. 자연스레 풍경이 그려지고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고, 책의 인물들이 계속해서 내게로 걸어온다. 이런 분위기의 소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8p. 하지만 애초에 잘못은 내 쪽에 있다. 아니, 그보다 앞으로 살게 될 낡은 일본 가옥에 오랫동안 가족과 썼던 가구를 들인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십오 년간의 기억이 가구에 배어 있다. 게다가 안 좋은 기억은 어디론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리운 추억만이 의자 팔걸이의 곡선에, 테이블의 둥근 모서리에, 캐비닛 서랍 손잡이에 조용히, 생생하게 숨 쉬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런 가구를 데리고 혼자 살 수 있을 리 없다.
52~53p. 일솜씨에도 이끌렸다. 가나는 대단히 유능한 데다 까다롭기까지 한 아트 디렉터의 어시스턴트였다. 미팅을 할 때마다 동석하고 디자인 팀을 조율하고 편집부와 빈번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체 작업이 지체 없이 진행되도록 한다. 그렇게 말하면 코치나 감독의 이미지가 떠오를지 모르지만 가나는 딱히 눈에 띄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빨래를 말리듯 그렇게 업무를 처리했다.
63~64p. 모자챙처럼 내민 차양은 집 내부의 연장 같고 나무도 불그스름하게 변색되어 마치 잘생긴 귀를 몰래 엿보는 기분이 든다. 아주 짧은 커트머리였을 때 가나의 귀. 저번에 국숫집에서 만났을 때는 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가나의 귓바퀴는 얇고 커브가 작은 데다 고양이 귀처럼 언제나 차가웠다. 아아…… 틀렸다. 차양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면 비누를 봐도 계단 난간에 손을 얹어도 문손잡이를 잡아도 가나를 떠올릴지 모른다. 차양에는 물론 실용성이 있다. 창을 열어놔도 실내에 비가 들이치지 않는다. 여름에는 햇빛을 가려줄 것이다. 비를 피하는 것은 집 안에 사는 인간만이 아니다. 서까래와 서까래 사이에 작년 말벌 벌집이 연꽃처럼 남아 있다. 박새가 두껍닫이에 둥지를 트는 것도 이 차양이 있기 때문이 틀림없다. 눈이나 입처럼 움직이지는 않아도 잠자코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도 차양과 귀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75~76p. 목욕을 모르는 우주인이 내 심야의 행동을 관찰한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좁은 상자 바닥에 검은 마개를 끼우고 가열한 물을 받은 뒤, 알몸이 되어 상자로 들어가서는 천천히 쭈그리고 앉아 어깨까지 물에 담근다. "후우"라느니 "아아"라느니 의미를 갖지 않는 소리를 입에서 뱉어내고 나서는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주인은 추리한다. 인간은 가열한 물에서 에너지를 얻는 게 아닐까. 아니면 피부의 신경세포가 물을 매개로 멀리 있는 뭔가와 교신하는지도 모른다. 꼭 빗나간 추론도 아니다.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하루 새 쌓인 앙금이 잡념이 되어 되살아나 차츰 안개처럼 흩어진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과 있었던 일, 불쾌한 사건, 정산하지 못한 영수증 다발, 직원 식당의 삼색 덮밥, 오늘도 쓰지 못한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굳었던 어깨도 풀린다. 호흡이 깊어진다. 하루의 끝에 목욕을 하면 자신이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 든다. 착각이라 해도 고맙다. 목욕은 위대하도다.
79p. 가나의 메일은 아주 간단했다. 거기에 쓰여 있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갓 세탁한 흰 시트처럼 무덤덤하고 그저 바람에 펄럭펄럭 날렸다. 나도 따라하듯 어디까지나 무심하게 승낙하는 답신을 보냈다. 메일이 오간 끝에 이번 주 토요일에 놀러 오는 것으로 약속이 잡혔다. 목소리를 들을 일도 없이 뭔가를 정하는 것은 편하다면 편하지만 뉘앙스를 알 수 없으니 점점 불안해진다.
98p. 공원을 가로질러 상수변 비포장길로 나왔다. 우리는 숲의 어둠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과묵해졌다. 철책 너머의 수풀에서 이제 처음 울기 시작한 것처럼 더듬거리는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내 귀는 흙길을 걷는 나와 가나의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발소리를 찾아내서 듣고 있었다.
105~106p. 후오, 후오, 후오…… 불안을 부추기는 듯한 소리였지만 생각해보면 수컷 솔부엉이가 암컷 솔부엉이를 향해 우는 게 틀림없다. 구애하는 울음소리. 암컷을 못 찾은 채로 늦가을이 돼서 짝을 짓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동남아시아로 돌아가는 수컷도 있을까. 얼마 동안 계속 듣고 있었다. 뭔가가 빨리는 듯한, 뭔가가 스며드는 듯한 울음소리. 온몸이 귀가 된 내가 그저 멍하니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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