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르고 - 열 편의 인권영화로 만나는 우리 안의 얼굴들
이다혜.이주현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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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선한 본성을 믿는다. 우리 안의 선한 천사를 늘 응원한다. 그럼에도 인권 감수성이라는 건 저절로 길러지지 않는다. 판단력과 논리력을 기르는 것처럼 폭력과 차별과 통제와 억압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인권 감수성도 기를 필요가 있다. 오랜 시간 영화기자로 일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로맨스영화로 연애를 배우고, 코미디영화로 개그를 배우고, 액션영화로 액션을 배워 망했다는 슬픈 전설은 건너뛰고, 영화를 통해 예민하게 감수성을 기를 수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영화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마음, 세계와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매번 조금씩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 같다. 영화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하고, 의심하지 않았더 것을 의심하게 하고,질문하지 않았던 것을 질문하게하고, 꿈꿔보지 못한 것을 꿈꾸게 한다.

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꿏을 부르고 '서문'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 무언가를 통하지 않고 배우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바탕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주현 기자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 글에 나오는 '영화'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한 다른 단어로 바꿔도 본래 의미가 크게 손상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음식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사람(가족, 친구, 우연이거나 필연이거나 일상적 인물 등등)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낚시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야구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바둑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어떤 것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배움이 자신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으며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성장시켰는지 깨닫는 과정일 것이다. 영화든 책이든 어떤 것을 통해 배운 세상이 자신이 가진 선입견이나 편견의 단단한 껍데기를 무르게 만들 수 있다면, 다수의 의견에 올라타는 것이 쉽지만 그것이 결코 올바른 것과 동일한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진실에 비춰 자신의 자화상을 부끄럼 없이 그려낼 수 있다면, 균일하고 매끄럽게 보이던 세상의 표면이 실은 균열과 부식을 감추고 있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면.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자연스러운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뜨거운 자갈길을 밟으며 걷는 일처럼 고통스럽다는 차이를, 마침내 알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차별과 혐오의 메시지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면.

이 책은 2013년부터 10년 동안 만들어진 열 편의 영화와 인권 이야기다. 그 전에 씨네21북스에서 출간한 《별별차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제작한 인권영화 10편을 담겨 있으니 이 책은 '영화로 만나는 인권' 시즌 2이라고 할 수 있다. 책에 수록된 열 편의 영화에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회의 풍경이 담겨 있다. 이중에서 《메기》와 《4등》은 꽤 알려져서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영화들은 모두 처음 접하는 영화들이었다.

불법 촬영과 실업,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서 불안한 청년을 다룬 메기. 교사와 학생 모두의 학습권과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우리는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 이른 나이부터 너무 힘을 내다가 낙오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힘을 낼 시간. 누구나 노인이 되고 있으며 실제로도 노인이 많은 나라이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봉구는 배달 중. 학습과 운동이 양립할 수 없는 구조를 통해 성적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 묻는 4등. 존엄한 죽을 맞이할 권리를 돌아보며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하늘의 황금마차. 고독사와 가난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는 소주와 아이스크림. 양심적 병역 거부의 문제를 다룬 얼음강. 장애와 비장애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닌 각기 다른 위치에 서있음을 보여주는두환에게. 시스템을 벗어난 이들에 대한 시선을 보여주는 과대망상자들. 이렇듯 인간의존엄과 관련된 열 편의 영화를 보는 동안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문제로 남아있지만 다수의 관심을 받지 못해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여있는 문제들의 실체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서문에서 언급했듯 인권 감수성이라는 건 저절로 길러지지 않기에 익혀야 한다. 무언가를 통해 열심히 배워서 익혀도 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면 어느새 희미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지 않을 때는 잘 몰랐는데, 매일 붐비는 시간에 지하철 출퇴근을 하다보니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로 인해 지하철이 늦어지면 조바심이 생기면서 왜 하필 이 시간에 하는 걸까 하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올라오기도 했다. 지각을 하면 안 되는 시간에 그 시위로 인해 지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사실 문제의 원인은 시위를 하는 사람도 시위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도 아닌, 시위를 하게 된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는 기관 때문이다. 그게 해결된다면 시위가 벌어지지 않을 것인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기관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벌어지는 일을 방관하고 있다. 실제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리고 피곤한 일이 쌓이고 내 삶에 대한 불안이 쌓일수록 나는 인권 감수성에 경각심을 불어넣는 종류의 매체들이 불편했다. 예전에는 잘 찾아서 읽던 책이나 영화, 뉴스 등을 보면 나의 불안도 더 커지는 것 같아서 밝고 편안하고 환한 것들만 찾아다니며 웃고 떠들었다.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인권 감수성에 대한 관심은 나의 삶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다른 위치에 설 수 있으며 그건 바로 지금이 될 수도 있다.

영화는 때로 비현실적이고 너무 이상적일 때가 있다. 현실에서 누가 저래, 현실에서 저런 결말이 어디 있어, 라고 나무라고 싶은 영화들이 꽤나 있다. 하지만 그런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배운다. 분명히, 배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반드시 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메시지가 보여주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총 대신 꽃을 손에 쥐어주는 세상을 나도 꿈꾼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우는 사람을에 의해 영화는 세상을 바꾸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을 보면서, 혹은 다른 영화를 보면서 세상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는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영화가 좋고 책이 좋고, 무언가를 통해 배우는 과정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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