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
황선미 지음 / 비룡소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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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 표지의 여자아이는 거울 앞에 서서 거울을 향해...아마도 카메라 셔텨를 누르려고 한다. 카메라에 비친 자신의 모습, 아니 카메라에 비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 아이.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아이
장미는 버려진 아이다.
부모에게 버려져 할머니에게 키워졌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하지만 햇볕이 잘 들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고모네 집에 자신이 마음 편히 머물 곳은 없다는 걸 아는 장미는 주말에는 백화점 수선실에서 일하며 스스로 돈을 벌고 눈치를 살피며 지낸다.
그 일만 없었다면, J라는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장미는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해 취업을 하여 고모네 집을 평온하게 떠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J의 야비한 행동 때문에 장미는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결과는 참담하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처신' 운운하며 차갑게 대하는 고모네 집에서 쫓겨나듯 떠나야했다. 그 뒤로 장미는 갖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쉼터에 들어가 아이를 낳고 쉼터에서 도망나와 진주네 반지하방에 얹혀살며 사진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장미가 낳은 '하티'는 장미가 일을 나가는 동안, 어두컴컴하고 습한 반지하방에서 목이 쉬도록 울다 지쳐서 잠이 들고 갈수록 말라가고 있다. 태어난 기록조차 없는 하티, 장미는 하티가 아파도 병원에 데려갈 수조차 없었다. 반복되는 굶주림, 사라진 방, 사라진 하티.

그렇다면 장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장본인 J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번드르르하게 잘 생긴 얼굴로 대학에 다니며 잘 살고 있었지. 그러다 우연히 장미가 있는 사진관을 알게 되고, J는 당연하다는 듯 장미의 몸을 강탈한다.

"재래시장 뒤 켠. 중앙 라인만 시장 기능을 유지하는 곳이라 뒤쪽의 폐쇄된 상점 골목은 상자를 대강 쌓아 두는 거대한 창고나 다름없었다. 희미한 불빛조차 없었다.
이런 데를 훤히 알고 있다는 게 바로 J의 속성이었다. 어둠 속으로 숨어들 때부터 J의 숨소리가 거칠어졌고 절망적으로 버티는 순간 장미는 내동댕이쳐졌다. J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앗다. 여전히 잔인했다.
아니, 전보다 더 사납고 강했다. 자기가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한 분풀이부터 시작됐다. 거기에 며칠 전 장미가 벤 옆에서 이죽거리는 바람에 생긴 분노까지 실려 있었다. 비명 지르지 못하게 입까지 막는 J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장미는 몸부림쳤다. 가차 없이 주먹이 날아들었다. 피하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주먹이 귀를 찍었다. 머리가 깨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으로 장미는 무기력해졌고 속에서 뭔가 터졌다는 걸 감지한 순간 반항을 포기했다. 그저 J의 머리카락을 움켜 쥐었을 뿐. 버르적거리다 머리카락을 움켜쥐던 하티. 그렇게 작은데도 손아귀 힘이 만만치 않았던 걔가 소름 끼치게 떠올랐다. 그 징그러운 게 도대체 왜 생겼을까. 이렇게 끔찍한 폭력의 증거. 그런 건 생기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짓을 또 당하지 않을걸." -엑시트 중

J는 그걸로도 모자라 장미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월급봉투를 빼앗는다. 진주가 맡겨버린 곳에서 다시 하티를 찾아오기 위해 필요한 돈이었다. 장미는 J에게 말한다. 그때 임신했었고 태어난 아이가 하티라고. 하지만 J는 그 말에 분노하며 '미쳤나. 아 재수없어.' 라는 반응을 보이고 장미의 월급봉투를 가지고 떠나버린다.

<엑시트>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쉽게 짓밟히고 소외되는 장면을 장미와 J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완전한 피해자인 장미를 향해 가해자J가 보이는 행동, J의 모친이 보이는 행동은 현실에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장미가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아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J같은 부류들은 악마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어릴적부터 장미는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해본 적이 없었고 어떤 일이 생겨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도 견디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진관이 있던 건물 청소부를 만난건 행운이었다. 장미의 아픈 순간을 모두 목격한 청소부는 다정한 말이나 미소는 없지만 묵묵하게 장미를 간호하고 집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장미에게 유일한 어른이 되어주었다.

"청소부가 식탁 귀퉁이에 놓였던 쪽지를 집어 들었다. 밤에 하티 분유를 타던 중에 장미가 적어 놓은 거였다. 제가 너무 나쁜 애라서 정말 죄송해요. 청소부가 마음을 풀고 용서해주기를, 모든 걸 눈감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 거였다. 경찰에 연락할 줄 알았으면 남기지 않았을.
청소부가 장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나쁜 게 아니라, 아픈 거야."
그 소리가 장미의 심장에 쿡 박혀 버렸다. 감당할 수 없게 몸이 떨려서 장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말이 되지 못한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기어올랐다. 몸이 뜨거워졌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도망치는 장미를 청소부가 붙들었다. 그리고 숨도 못 쉬게 끌어안았다. 청소부의 앞자락에는 조금 전에 만든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장미처럼 뜨겁고 장미처럼 떨고 있는 가슴이었다. 그 모든 것으로 장미는 믿었다. 괜찮을 거야. 나쁜 일 아냐." -엑시트 중

자신의 이름을 한번도 꽃으로 여겨본 적이 없었던 장미가 '로즈, 장미'를 되뇌었던 밤에 장미는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돌절구에 뭔가를 빻고 있었다.
붉은 꽃무늬 옷을 입은 할머니는 엄마처럼 젊었고 절구질을 하며 흥겨운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아빠 주려고 만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본 적도 없는 아빠와 엄마를 꿈 속 할머니를 통해 보게 된 것.

이 책에는 미성년 미혼모가 된 장미의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혼모가 되어 사회적으로 방치되고 짓밟힌 장미를 중심으로 해외로 입양이 되었다가 다시 한국을 찾은 사람들, 입양 떠나는 아기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에 다 담을 수 없었던 그 뒷이야기들, 아무래도 해결되기에는 어렵지만 장미의 경우처럼 '유일한 어른'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볼 수는 있기를.

"장미는 계단에서 내려가 뒤에서 청소부의 허리를 안았다. 몇 번이나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청소부가 움찔해서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어색하게 닿은 가숨과 등. 청소부타 틈을 메우기라도 하듯 장미의 팔을 잡아당겼다.

"서류가 정리돼야 하틴가 하는 애도 데려올 수 잇어. 아직은 아냐. 준비가 안 됐잖아. 너부터 커야 뭐라도 하지. 일단 시설 쪽에서 노하영으로 출생신고를 했다. 하티는 좀 이상하잖아. 한 글자씩 모아서 이름을 만들어 봤는데, 괜찮으냐? 이름 바꾸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고, 싫으면 나중에 얼마든지 알아서 해."

짓궂게 말하는 사람의 허리를 장미는 더 힘껏 안았다. 청소부가 손을 뒤로 돌려서 이상하게 업힌 듯한 애를 토닥였다. 몹쓸 가래가 그만 떨어지려는 듯 장미의 목구멍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 -엑시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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