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내외와 같이 살기 시작한 건 3년 전 아내가 죽은 다음부터였다. 아내는 유방암으로 5년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혼자된 균탁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한 건 딸 지영이었다. 딸과 사위 둘의 설득에 74살의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의 균탁은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함께 살기로 했다. 균탁이 집으로 온 뒤, 지영은 은근슬쩍 다솔을 맡기기 시작했다. 점점 육아와 집안일이 균탁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딸이 얄밉지 않았다. 지영 부부의 목표가 내 집 마련이었고, 그걸 이루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런 아이들에게 아내와 살던 집을 정리한 돈을 건네면서도 미안해한 균탁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하고 아이의 학교가 멀어지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했다. 잘 보이지 않는 눈과 반사 신경이 좋지 않아 이미 운전을 그만둔 지 3년.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아이를 데려다주는 일에 번거로움이 발생하자 딸과 사위는 운전을 권했다. 아이를 내려주고 학교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 후 차를 출발시켰다. 갑지가 눈앞으로 뭔가가 확 끼어들었고, 반사적으로 핸들을 틀며 브레이크를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그런데 차는 굉음을 내며 인도의 연석을 넘어 위로 튀어 올랐고 가슴에 핸들이 부딪치고 목이 휘꺼덕 넘어갔다. 비명 사람들이 차의 앞쪽을 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다른 날과 다를 바가 없는 하루였다. 민원인을 주로 상대하는 혜정에게 전화를 계속하는 일이 드문 남편이 전화를 걸어온다. ❝연희가……. 죽었어.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이다. 지금은 열 시. 말이 안 돼도 한참 안 되는 일이었다.그는 악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내 딸을 죽인 악마.그런데 진상 조서를 한다고 내가 아닌 악마를 보호하는 사람들. 나를 말리는 남편.용서를 빈다고?죽여 놓고 용서를? 괴로워하고 있다고?실수라고?아이가 죽었는데 내 아이가 이 세상에 없는데 합의를 하란다. 아이가 죽었는데 밥을 먹는 가족들이 내 눈앞에 있다.어떻게 밥이 먹히지? 누나가 죽었는데 이제 자신이 그 방을 쓴다는 둘째 아이도 용납할 수가 없다.#제로책방 #책리뷰 #책기록 #책추천 #한국문학추천 #장편소설추천 #북스타그램 슬픔에 갇힌 혜정과 죄책감에 갇힌 균탁.잘못한 사람이 있고, 피해자가 있는데 피해자의 마음을 지금 가장 많이 헤아리는 사람이 가해자라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