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의 시대 새소설 17
장은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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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유령이다. 아버지한테 ❝유령이 돼라❞라고 한 사람은 호텔에서 청소 노동자로 사십 년 동안 근속한 J 씨였다.

아버지의 삶의 태도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런 그에게 호텔 청소부의 일은 적성에 딱 맞았다. 유령이 되어 존재를 증명하는 일. 절대 고객의 눈에 띄어서도 고객과 마주쳐서도 안 된다는 것. 호텔은 언제나 소리 소문 없이 깨끗해야 하는 곳이었기에 유령이 되어야만 하는 청소 노동자의 일은 아버지의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천하의 잘난 문희숙이 어디 갔나. 어디를 갔길래 이런 쉬운 문제 하나 못 풀어서 쩔쩔매실까❞
❝이깟 문제 못 풀어도 먹고사는 데 아무 문제없어요!❞
❝그래? 수학 못하는 문희숙이 앞으로 뭐 해서 먹고사는지 끝까지 지켜보마. 너희도 친구로서 문희숙의 인생을 똑똑히 지켜봐줘야 한다. 다들 알았지?❞
❝천하의 개새끼!❞

그렇게 시원하게 선생에게 욕을 날라고 학교를 그만둔 어머니는 모교의 전설이 되었고, 학교가 아닌 도서관에서 책을 몽땅 빌려 읽고, 운동도 하며 육체도 정신도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중등교사였던 조부모는 그런 막내딸을 이해도 용서하지도 못했기에 수치스럽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어머니는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학교를 걸어나가듯 집에서 나와 교류를 끊고 살았다.
모텔을 전전하다 돈이 떨어진 어머니는 모텔리어의 삶을 살았고, 호텔리어로 업그레이드되었기에 어머니가 되셨다. 부끄러움이 가득한 아버지와 대찬 어머니는 호텔에서 유령으로 일을 하다 만났다고 했다. 태생을 감추지 못하고 쓴소리를 하던 어머니와 유령 같은 아버지는 각자의 성품에 맞는 괴롭힘이 있었고, 곤란한 상황에 도움이 된 인연으로 부부가 되었단다.

어머니는 호텔리어의 삶의 끝까지 이어가다 호텔에서 돌아가셨다. 지금은 여전히 호텔리어로 살고 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지내고 있는 누나. 그리고 수제 우산 가게를 운영하는 나 셋이 한 집에 살고 있다. 누나가 이혼하리란 것은 본인만 모르고 모두 예측하고 있었다. 어떤 일도 진득하게 하지 못했던 누나가 일이 아닌 결혼을 선택했었기에..
팽팽 놀고먹는 누나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나는 누나에게 미션을 선사했다.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으니 아버지의 출퇴근을 그리고 가게로 출근을 권했다.

누나가 퇴근하고 판매가 종료된 우산을 찾는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이 나간 후 가게의 종이 평소와 다르게 울렸다. 여자는 어떻게 그런 소리를 냈을까? 우산 종이 낸 울음소리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가을비가 내리 내린 후 우산종을 울렸던 손님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판매 문의를 했던 그 우산을 들고 수리를 의뢰했다. 품질보증 기간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수리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다른 제품을 권했지만, 우산을 두고 가버린 손님은 이번에도 우는소리를 남기고 떠났다.

망가진 우산을 수리하며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게으른 누나의 이혼 사연과 손님이 남기고 간 우산의 사연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봐요 씨와 만남이 이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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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은 한때의 어리석은 부끄러움을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는 무능하지 않다. 부끄러움의 양이 좀 과할 뿐, 불쌍하다 싶을 만큼 성실하기만 하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가 호텔 청소부이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2p

그들은 당사자에게 묻지도 않고 어머니의 인생을 실패라고, 불행하다고 규정지었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서 어머니는 스스로 묻고 대답했다. 청소부가 부끄러운가? 부끄럽기는커녕 청소부로 사는 건 즐겁고 행복하다. 일은 재밌고 마음이 평호롭기까지 하다. 그러니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고, 어머니는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70p

말은 뱉자마자 허공으로 흩어지지만 글은 어딘가에 새겨놓는 거라서 나는 아버지가 지금까지 나한테 해준 말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다. 잊히거나 흐릿해져도 뒤져보면 어딘가에 반드시 적혀 있어서 금방 되찾을 수 있다. 아버지의 부끄러워하는 성격 덕에 나는 아버지의 말을 가장 많이, 가장 정확한 형태로 간직하는 사람이 되었다. 79p

❝선생님도…… 견디고 버티기 힘든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좋아하는 것들이나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했어요. 아주 나중에 내게 견디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해줄 사람도 생각하고, 내가 견디고 버티면 앞으로도 볼 수 있을 좋아하는 것들도 떠올리고요.❞
❝하지만 견디고 버티는 게…… 바보 같은 짓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견디고 버틴다는 게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 그 시간은 힘을 키우는 시간이에요. 견디고 버티는 동안 차곡차곡 키운 힘으로 나중에 기회가 왔을 때 얍, 하고 무찌르는 거예요.❞

부끄러움과 부끄럽지 않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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