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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루시 조시핀 포터.
조시핀은 엄마의 삼촌에게서 딴 이름이다.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기에 혹시나 이름을 가져다 쓰면 유산을 주지 않을까? 해서 붙였단다. 포터는 틀림없이 조상이 노예였을 때 그 주인이었던 영국인의 성에서 따온 것이고. 그나마 이름에서 애착을 가질 만한 부분은 루시뿐이었다.
악마의 이름(루시퍼)의 여자 이름 루시.
엄마가 나를 악마처럼 여겼다는 것을 알고도 난 놀라지 않았다. 내겐 엄마가 종종 신과 가깝게 여겨졌는데, 결국 악마가 신의 자식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루시라는 이름이 좋아진 건 아니지만 내 이름이 보면 늘 손을 뻗어 꼭 안아주었다. 122p
서인도제도에 위치한 겨울과 눈 추위라는 것이 없는 곳에서 살던 루시는 지금 겨울이라는 날씨를 체감할 수 있는 백인의 나라 미국에 와 있다. 어린 여자애 넷을 돌보는 일이다. 루이스와 머라이어는 꽤 친절한 사람이고 루시를 차별하는 일도 없었지만, 루시는 아주 사소한 말에도 삐딱하게 받아들인다. 머라이어의 친절은 루시에게 그대로 가닿지 않는다. 루시는 한 번도 백인들의 세상을 느껴본 적이 없기에 그녀가 건네는 말과 그녀를 둘러싼 세상을 그녀와 같은 시선으로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너른 밭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머라이어와 그 밭을 일구는 노동자가 아님에 안도하는 루시의 온도차
루시는 또한 엄마에 대한 가족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가득하다. 엄마가 보내는 편지에 종종 답장을 하곤 하지만 그녀가 가족을 향한 마음은 ‘내 삶의 목덜미에 맷돌처럼 매달린 사람들’이다. 꽤 오래 외동으로 자라다가 밑으로 남동생들이 태어났다.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몇 명인지 파악할 수도 없는 삶을 살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그늘에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임신을 투덜거리는 여인이었기에 루시는 엄마의 편지를 펼쳐보지도 않게 된다.
엄마에 대한 분노는 엄마의 가르침에 엇나가는 행보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육체의 쾌락을 즐기고 남자와 사랑을 하긴 하지만 감정까지 주지 않겠다는 마음. 머라이어에게도 만나는 남성에게도 온전히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것처럼 군다. 하지만 공책에 결국 루시 조지핀 포터.라 쓰고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문장을 쓰고 우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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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곳에서 나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달라질 수 없었다. 우리가 그 장면을 똑같이 보고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의 맛은 다를 것이다. 29p
때로는 도저히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지만, 벗어나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또 한동안 그럭저럭 괜찮아질 때가 많다. 34p
지금 난 내가 늘 원했던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대부분 내 이름조차 모르는 곳에서의 삶, 그래서 얼마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런 삶. 그런 상황이 되면 행복감, 희열,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 등이 찾아오리라 생각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 P126
‘봄’이 친한 친구라도 되는 듯한, 큰맘 먹고 오랫동안 먼 길을 떠났다가 곧 돌아와 뜨거운 재회의 기쁨을 안겨줄 그런 친구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그녀가 말했다. "수선화가 땅 위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본 적 있어? 엄청나게 많은 꽃들이 활짝 피어서는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앞쪽으로 길게 펼쳐진 잔디를 향해 꾸벅 절을 해. 그런 거 본 적 있어?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게 참 기뻐."그 말을 듣고 난 생각했다. 그러니까 머리아어는 산들바람에 몸을 숙이는 꽃을 보면 살아 있는 게 기쁘구나.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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