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네 얼굴이 거울이 비쳐?’6살에 처음 알았다. 자신의 얼굴이 누구나 보인다는 것을. 나를 제외한 누구나안과 소아정신과를 돌아다니며 검사를 하고 엄마와 아빠의 말투와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치워지기 시작했다. 심각해진 분위기 달라진 말투.. 사라진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 거짓말. 나 한명에게만 거짓말을 하면 된다. 그러면 이 불편함이 사라진다. “엄마, 나 이제 내 얼굴 보여.”고등학생인 시율 옆엔 아주 약간 틀어진 이가 불만인 라미가 있다.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꼭 치아교정을 해야겠다는 라미. 이런 경우 얼굴을 볼 수 없는 내가 다행인건가?같은 반엔 이 동네에서 꽤 유명한 교실에선 조용한 묵재가 던진 공에 옆통수를 맞고 새로 교체한 사물함에 얼굴을 긁혔다. 20번 꿰매야하는 상처를 얻었다.매일 다양한 칸틴스키 그림처럼 보이던 얼굴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상처.그 상처를 계기로 묵재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중2에 알콜중독자인 엄마가 까만 옷을 입고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 차에 치어 사망한 사건과그 사건이 훌쩍 지난 고1에 가출했던 일묵재에겐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사람들이 말하는 명확한 원인과 결과는 과학에서나 통용된다. 인간의 삶에서는 이것이다. 할 수 있는 정확한 공식과 법칙이 성립될 수 없다. 악한이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니요, 선한 사람이 반드시 복을 받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그냥 재수가 없거나 운이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우리네 삶이다. 25p정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삶이란 결국 짙은 안갯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한 발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안 보이니까. 깊은 구덩이가 나올 수도, 커다란 벽에 가로막힐 수도 있다. 그런데도 모두 거침없이 보이지 않는 길을 잘도 걸어간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98p자신의 얼굴이 안 보이는 게 그리 잔혹한 일일까? 저주까지 들먹이며 펄쩍 뛸 일인가? 사실 말이 안 된다는 것 역시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일 뿐이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는 그저 티끌이다. 그 작은 공간에서 인간이란 종은 또 얼마나 하찮을까? 우주의 눈으로 보면 먼지 한톨보다 작다. 그 미미한 존재들이 자신들의 알량한 과학 지식 외에는 모두 거짓이라 한다. 이 어찌 가소롭지 않을 수 있으랴. 116p생각보다 사람들은 타인의 외모뿐 아니라 생각과 가치관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내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지에 별 흥미가 없다. 굳이 눈 코 입을 그리지 않아도, 얼굴은 온통 푸른색 범벅으로 칠해놓아도, 그것이 너의 시각이고 너의 느낌이라면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137p“나는 인간이 스스로를 정확히 보는 게 의외로 힘들다고 생각해. 그런데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인해 비로소 보일 때가 있어. 그것이 더 나은 부분일 수도 있지만, 애써 감추려 했던 아픔이 수면으로 올라올 수도 있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뻔한 말이지만 어쨌든 흉터는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다는 상징이니까, 굳이 감춰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14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