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반만이라도
이선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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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작가의 단편집인에 인터넷 평이 상당히 좋다. 궁금하지 않은가? (곽재식 버젼) 동성애 이야기를 편히 읽는 사람이 아닌데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들 간의 사랑이 기본값으로 깔려 있다. 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건 그저 하나의 상황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정량적으로 보면, 사회에서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에 속하는 그들의 삶이 제법 버겁겠다 느껴지는데 분명 마음이 아리고 슬프고 애잔해야 하는데 작가는 독자들을 그런 뻔한 요소 속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슬픔에 빠져들만하면 터지게 만드는 웃음, 조금은 격한 말투에 대리만족을 느끼게도 한다. 10대부터 80대 커플까지 아픔과 상실 등을 겪어가고 있는 주인공들의 사고는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예측불허함 속에 작가가 미리 깔아둔 3차원의 세계 속에서 앞뒤옆 아래 위까지 공간적인 느낌을 느끼게 한다. 초반 몇 페이지를 읽다가 적응되지 않아 덮지 않길 진짜 잘했다고 생각하는 책.

<부나, 나>
도서관에서 일하다 만난 사이인 부나. 브라를 착용하지 않는다고 민원을 받는 그녀. 정중한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교묘하게 의중을 드러낼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의 글에 깔끔한 댓글을 다는 그녀와 여행을 떠났다. 설마 자기 아버지의 집에 갈 줄이야…
안면도에서 우럭 양식장을 하는 부나의 아버지는 빠다라는 젊은 친구와 함께 사는데 초대한 방에 콘돔 껍질이 놓여있다. 쓱쓱 대충 치워진 방에 함께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데

“너가 남자를 데려왔으면 내가 꼭 콘돔을 쓰라고.. 그건 부끄러움도 뭣도 아닌니까 꼭 콘돔을 쓰라고 말하려 했는데 말이다. 너가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들 데려왔으니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고… 그저 너희 하고 싶은 대로, 꼴리는 대로 다 해도 된다고… 여자들끼리는 병 같은 거 옮길 일도 없으니까 얼마나 편리하고 좋아…. 어? 안 그러냐?” 29p / 이런 부나의 아버지

<나니나기>
예전 좋아했던 유미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 지금 함께 해주는 동행인은 연휘. 잃어버린 이어폰 한쪽은 연휘가 가고싶어 했던 볼리비아 사막에 있다는데.. 나머지 이어폰을 끼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겨울을 데리고 왔네. 라는 음악을 듣고 있다.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듣다 보니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한 노래.

<보금자리>
주방과 화장실이 일체형인 작은 집. 애인은 이 집이 그저 둘이 붙어 있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는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살다 갑자기 떠나버렸다. 분명 혼자 남았어야 하는데 집주인과 동거가 시작됐다. 정확히는 집주인의 유령. 유령은 자신의 죽은 장소를 가보고 싶다고 했다. 햇볕을 보지 못한 화분과 동행하며 ..

사실 여기든 저기든 별이 잘 보이든 안 보이든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내가 있어도 괜찮은 곳에 있고 싶었다. 101p

<망종>
작년 오늘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버렸다며 우매 씨는 웃었다. 그건 비유가 아니었다. 등산 후 막국수 곱빼기를 애인과 나눠 먹다 급체한 할머니가 결국 세상을 떴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언젠가 월미도에 놀러오라던 우매씨를 만나러 간다. 80대 레지비언 커플의 유툽을 운영했던 할머니 커플. 이젠 할머니가 떠나고 우매씨 혼자 운영한다는데, 우매씨는 젊은 총각이랑 함께 누워있다. 월미도에서 디스코 팡팡 디제이를 한다는 곤주와 함께

내가 이렇게 깜빡깜빡한다.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혀.
그래도 늙는다는건 참 좋다. 늙으면 기억력이 감퇴되고 감퇴되면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다. 매일매일의 우울과 분노와 체념을. 126p

<무관한 겨울>
전동 킥보드를 타고 있던 영문이 9인승 승합차와 충돌해 입원했다. 원장이 CCTV 사각지대에서 바늘로 아이들을 학대했다는 어린이집에서 근무했었다. 영문은 진짜 못봤을까? 사고는 사고였을까? 영문이 뛰어든 건 아니였을까?

“누가 그러는데 많이 웃어야 병도 빨리 낫고 쑥쑥 큰대. 웃는 건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뭣보다 공짜야.”171p

영문과 같은 병실에 입원하고 있는 이혼 가정에서 태어난 건강하지 못한 쌍둥이들은 입이 참 거칠다.

“언니들아, 언니들은 소원 빌었어? 우리는 빌었다!”
“어차피 뭐냐고 물어봐도 비밀 아니야?”
“아닌데! 내 소원은 진화하는 거야.”
“응 진화! 피카츄가 라이츄가 되는 것처럼.”
“그럼 언니들도 그거 소원하지 뭐.”
“바보들! 성원숭이랑 잠만보는 진화 못 해. 그게 끝이야.”
(성원숭과 잠만보는 쌍둥이가 주인공들에 붙여준 별명임)

<밤의 반만이라도>
반만 죽겠다는 말은 반만 살겠다는 말과 동의어일까, 아님 반의어일까. 반만 좋아한다는 말은 반만 미워한다는 말과 동의어일까, 아님 반의어일까. 반쪽짜리 삶과 사랑을 간절히 바라면 바랄수록 몸과 마음에 피가 도는 아이러니. 이를테면 그건 성장의 느낌이었고, 나는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하고 경쾌하면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했다. 206p

<고독기>
“은오야.” 온수가 나오지 않아 결국 찬물로 샤워를 한 나는 머리를 말리다 말고 은오를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어디서 봤는데 똥 싸려고 했다가 방귀 나오는 건 황당한 거고, 방귀 뀌려고 했는데 똥이 나오는 건 당황스러운 거래. 근데 나는 둘 다야. 기분이 완전 똥이야. 똥.똥.똥.”
엄마의 목덜미 정중앙에는 ’amor fati가 아닌 amor party라고 적혀 있었다. ‘운명을 사랑하라’나 ‘사랑 파티’나

<생사람들>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4수생 세윤. 그러나 아직까지 수능을 한 번도 보지 않은 4수생. 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는 언니는 임신 상태. 갑자기 산낙지가 먹고 싶다는데..
요즘 귀신은 MZ라 곡 같은 건 안 한다는데?

작가님 이렇게 아낌없이 다 쓰시면 다음 작품을 쓰실 수 있는건가요?
우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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