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고통을 간접경험하는 책이다. 얼마전에 읽은 <재능의 불시착>처럼 이 책도 하이퍼 리얼리즘이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책은 한 고등학생 여자 아이가 자신에게 친절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이야기다. 그것이 이 책의 주요지만, 화자의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 책은 아이의 고통을 촘촘하게 표현했다. 사실 책은 처음부터 불안한 기운을 풍긴다. 그 남자의 등장과 함께 이미 뒷일을 예상할 수 있다. 아이는 처음부터 그의 모든 호의를 당연하듯 받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던 제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런 일을 당할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상상하며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일 후에 사람들은 갖가지 말을 만들어냈다. 상처가 없어서, 신고를 직접 해서, 산부인과를 찾아가서, 일상을 살아내서 피해자인 제야에게 말에 말이 더해졌다. 나쁜짖을 한 사람은 나쁜 일을 생각보다 쉽게 걷어낼 수 있었다. 그가 저지른 나쁨까지 제야에게 덧씌워지기도 했다. 모두가 시키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려는 제야가 너무 멋있어서 눈물이 났다. 부모도 지키지 못한 ‘젊은’, ‘여자’, 혼자’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제야를 잊을 수 없을거다.- 은비를 생각하면 은비가 당했다는 일도 같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기억에서조차 은비는 자유로울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나.- 친절하고 비열할 수 있다. 다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 진실하고 천박할 수 있다. 그게 사람이다.- 나는 나로 살기 위해 내게 소중한 것들도 같이 내려놓기로 했어. 시작한다는 건 그런 거야. 내게 좋은 것만 쥐고 싫은 것은 버리고 그럴 수는 없어.+ 성폭행 담당 형사분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반항으로 목숨을 잃는 것보다 그냥 폭행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세상이 왜 자꾸 목숨을 하찮게 여기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다.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라고 내몰지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