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권 정치학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정배 옮김 / 대화출판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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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저서 <생명권 정치학>이 여타의 생태계 보존 관련서적이나 환경보호 관련서적과 차이를 둘 수 있는 이유는 생태계와 자연의 파괴의 심각성에만 머물지 않고 왜 자연을 그토록 함부로 대해왔는지에 대한 궤적과 원인 그리고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려 했다는 점이고, 바로 이러한 원인과 근거를 통해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해결책이 아닌 궁극적인 치유와 대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자 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인간을 나무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로써 지구라는 유기체와 상호공존, 상호의존하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오늘날의 인간 존재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이다. 리프킨이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근대 이후 인간이 추구하는 ‘안정성’이라는 개념은 결코 궁극적인 안정성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잘못된 안정성의 관념으로 인하여 인간은 물론 모든 생명체와 자연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와 같은 안정성의 관념으로 인한 폐해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태학적 각성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생명권 의식 곧 생명권 정치라는 사상이며 오늘날 생명권 정치 운동의 절박하고 확고한 필요성을 주장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정(security)을 추구한다. 방법과 방식, 근거와 이유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형태로든 인간은 끈임 없이 안정을 갈망한다. 리프킨이 우선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고대와 중세 전반과는 다르게 중세 후기를 시작으로 근대 산업화 세계에 들어서면서 안정에 대한 인간의 사고가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개인주의적이고 경제 중심적이며 물질 중심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안정되었다는 것은 재정적으로 자율적인 것을 뜻하며 부(富)를 축적하는 것이 곧 안정이며 자율적인 존재로 나아가는 통과의례"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재정적 자율성 곧 안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이 단지 수단과 도구로, 자원과 상품으로 전락했다는 것에 있다. 리프킨은 앞서 활동했던 그리고 근대주의 사고관 형성에 크게 기여한 데카르트(R. Descartes)나 존 로크(J. Locke)와 토마스 홉스(T. Hobbes)의 말들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어째서 도구와 상품으로 변모했는지에 대한 그 출발점을 되짚어본다. 데카르트는 “우리는 스스로 자연의 지배자와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했고 로크는 “완전히 자연에 내맡겨진 땅은 낭비”라고 주장했으며 홉스는 “인간의 노동도 수익으로 바뀔 수 있는 상품”이라고 사유했다. 이러한 서구 근대의 사고관을 전거로 하여 결국 모든 가치를 금전적 값어치로만 매겨지게 되었고, 돈으로 인간 자신의 안전성과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으며 모든 자연과 공유지, 공동체가 난파, 분리됨으로써 도구화, 사유화, 구획화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리프킨이 주목하는 것은 사유화와 구획화 즉 인클로저(encloser)의 개념이다. 자연과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나누고 사유화 하는 것으로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이렇게 분리된 자연은 수단과 상품으로 변형 되고, 인간은 자연과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단절되어 인간 스스로도 수단이 되어버린 채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더 많은 자원을 얻고자 분투해야 하는 상황이 오늘날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근대주의의 사상들이 오늘날 자연과 인간에게 처해진 상황의 이론적 토대-이를테면 세계는 면밀히 작동하는 톱니바퀴와 같은 거대한 기계로 생각하게 되었고, 신은 훌륭하고 냉정한 기술자로 변모했다-가 되었다면 이 이론들을 토대로 혹은 이 이론들에 힘입어 민족국가와 다국적 기업들이 자연을 경계 짓고 상품화, 사유화하여 생산과 소비를 확대시킴으로써 오늘날의 환경 위기를 발생케 했고 인간의 노동력마저 상품으로 전락케 했다. 계몽주의라는 기치 아래 민족국가와 기업들의 상호 밀접한 공조관계는 전세계적인 인클로저 운동과 식민지 정복을 가능케 했고 자연에 울타리를 침으로써 자연을 사유화하고 상품화할 수 있었으며 인간 또한 자원이나 도구로 환원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민족국가와 기업들에 의해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성찰이다. 리프킨은 인적 자원도 소비되어 왔다고 밝히면서 “시민 위상의 급격한 변화는 지구를 탈자연화시키고 인간을 생산의 도구로 환원”시켰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21세기는 핵무기로 인하여 일반시민 즉 “비전투원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졌으며 지구는 하나의 전장이 되었고 모든 인간 존재는 군사적 목표물로 정의”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하나의 상품으로, 돈으로 전락하고 리프킨이 말한 것처럼 인간이 생산의 도구로, 군사적 목표물로 환원되어버린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한다.

리프킨은 60년대 이후 기계주의적 태도, 기계적 의식에 반하는 치유 세대가 등장했다고 보면서 근대 시대를 지배해 왔던 안정성의 개념 곧, 세속적 풍요의 안정성에 도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치유 의식이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을 치유하는 것으로 인간의 몸을 부활시키고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으로 경제적, 정치적 제도를 재구성하고 학문과 과학 기술의 방향성을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 기계론적인 관점으로 지구를 바라보았다면 치유 의식은 치구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생태학적 각성은 모든 자연이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며 한 개체가 온전히 독립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생명권 문화에서 뜻하는 안정성이란 유기적 공동체로의 참여가 목표라고 보면서 인간과 자연은 별개의 독립적인 관계가 아닌 인간 존재가 지구 존재의 일부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구와의 소속감, 일체감을 바탕으로 한 생명권 의식은 자연의 몸을 치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지구를 다시 성화(聖化)함으로써 인간 존재 또한 재성화”하고 생명권의 공간적 틀 속으로 재통합함으로써 기계론적 사고의 변화를 요구한다. 또한 지리권의 개념에서 생명권의 개념으로의 인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생명권이란 살아 있는 물질들의 영역으로서 모든 생명이 존재하고 있는 지구를 둘러싼 땅과 물과 공기의 피막이다. 일차원적인 지리권에서 이차원적인 생명권으로의 전환은 곧 이 생명권 안에서 존재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지구의 모든 활동이 서로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의 바탕이 된다. 지구는 자기 조절을 하는 하나의 생명 유치체이며 생명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안정 상태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살아 있는 생물체이다. 바로 이러한 지구 유기체와 생명권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간의 상호 작용의 과정 속에서 계속적인 공생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프킨의 위와 같은 주장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종합적인 틀로써 구성하고 집약한 것이 바로 생명권 정치학이라는 개념이다. 생명권 정치는 지속력 있는 경제 발전에 근거를 두고 새로운 국제 정치적 제도가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조망하고 보호하도록 고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편성을 요구한다. 즉 구획화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지구 공유지를 개방하면서 지구를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국가나 다국적기업은 폭발적 경제 성장이 아닌 지속 가능한 발전을 지향하고, 민족 국가는 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맹렬히 추구하기 보다는 지구의 비무장화와 생명권적 의식을 바탕으로 한 “녹색운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근본적인 에너지 보존 계획과 대체 에너지 전략을 시행하고 지구의 생태학적 안녕에 대한 국제적인 책임감을 공유함으로써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은 공익적 가치뿐만 아니라 신성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공리주의적 생태학과 대조적으로 영적 생태학(spiritual ecology)은 창조의 놀라움과 자연의 경외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의 기계적론적, 안정적 사고와는 다른 지구적이고 영적인 새로운 안정성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이며 리프킨이 말하는 생명권 정치학의 핵심이자 진정한 전지구적 성화(聖化)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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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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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자아성찰 이야기

이제야 몇 자 적어보려고 하는 하루키의 책이 <태엽 감는 새>나 <상실의 시대>, 정작 그의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해변의 카프카>나 최근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압도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1Q84>와 같은 그의 대표작도 아니고,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논하지도 말라던 <먼 북소리>도 아닌, 90년대 후반의 작품이자 요란스럽게 홍보되던 그의 작품들과는 달리 제법 조용했던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라는 사실 또한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의아하다.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사랑 이야기’라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카피문구. 하지만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카피문구는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자아성찰 이야기’가 아닐까. 물론, 22살의 일본인 여성 스미레와 17년 연상 그러니까 39살의 한국인 여성 뮤와의 사랑 이야기는 그 설정 자체만으로 충분히 기묘하고도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다. 이 둘의 관계를 관찰자 시점에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나’ 또한 스미레와의 관계와 스미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생각해 봤을 때 이것 역시 결코 범상치 않은 사랑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동성간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고, ‘나’와 스미레와 뮤의 삼각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갈등과 양면성, 인간간 관계성의 고민을 통한 자아성찰을 이야기하기 위해 하루키가 심도 있게, 세밀하고 치밀하게 설치하고 연출한 무대장치이자 작품의 배경이며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다.

자아의 분열은 어쩌면 자아성찰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일지 모른다. 또한 자아성찰이란 결코 하나의 자아로 함축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여러 형질의 자아가 심지어 갈등하고 대립하는 양면적인 자아가 총체적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즉 자아성찰의 과정이란 결국 여러 자아를 구성해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뮤는 자아의 분열 이후 그만 자아의 구성을 놓치고만 것이다. 백발(白髮)의 그녀는 이쪽 세상에, 흑발(黑髮)의 그녀는 저쪽 세상에. 뮤는 완벽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외모와 지적이고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 그러나 14년 전 스위스의 어느 유원지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 그녀의 자아는 완전히 양분화되었고, 탐미적이고 욕망과 욕정 가득한 흑발의 그녀는 영원히 저쪽 세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쪽 세상에 남은 그녀는 더 이상 육체적, 성(性)적 욕망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식욕에 대한 갈망을 비롯 인간이 즐기고 누리고 동시에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욕망이라는 굴레에서 비껴나게 된다. 이것은 해탈이나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반쯤 죽어 있는 것이다. 욕망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기쁨도 행복도 슬픔도 분노도 느끼지 못한다. 뮤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게 된 스미레는 저쪽 세상의 뮤를 찾아 사라진다.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뮤를 찾아서. 그리고 스미레는 돌아온다. ‘나’와 스미레의 짧은 대화를 통하여 짐작하건데, 아마도 스미레는 자아의 분열이 아닌 자아의 구성을 이룬 듯하다.
“나야, 돌아왔어.” “그거 잘됐네.” 
 

스푸트니크(Sputnik)는 1950년대 세계 최초로 발사된 러시아 인공위성의 이름이다. 정해진 궤도를 따라 우주 공간에서 홀로 비행하는 인공위성이란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어로 스푸트니크(Sputnik)란 ‘동반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름이 참으로 적절히 명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주 공간을 홀로 떠도는 듯한 인공위성은 사실 지구와 또 다른 인공위성들과 끈임 없이 소통(communication)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론 한없이 고독한 존재이며 인간의 내면은 끈임 없이 갈등하고 대립한다. 또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역시 끝없는 갈등과 대립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과 갈등, 대립은 좀 더 성숙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자아의 구성 곧 자아성찰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내 안에 내재된 또 다른 나는 나를 당황케 하고 혼란에 빠트리지만 결국 이 또한 나임을 자각하고 자아의 총체적 구성을 이루어 나갈 때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되고 자아의 성찰을 가능케 한다는 것. 하루키는 예의 그 섬세하고 세련된 필력을 바탕으로 뮤와 스미레, ‘나’와의 사랑과 관계 그리고 이들의 내면세계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아성찰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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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1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1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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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서울에 살면서도 무슨 복福인지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개나리며 벚꽃이며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찬 기운을 털어낸 포근한 봄바람에 묻어오는 꽃내음은 잠시나마 도시의 소음과 거친 눈동자를 토닥여준다. 4월의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이 따사롭고 아름다운 시간이 찰나의 순간처럼 아쉽기만 하구나. 일 년 중 한 차례 찾아오는 봄의 향기처럼 인생의 길목에서 마주하게 되는 아름답고도 찬란한 순간은 아마도 나를 찾아온 시의 향취에 흠뻑 취하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친구야, 왜 시인들은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시들을 써내려갔을까. 시인들이 외로움을 많이 타서일까 아니면 인간이란 본래가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일까. 시인 정호승은 신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마을로 내려오고 종소리마저 외로워서 저 멀리까지 울려퍼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정호승의 ‘수선화에게’ 中)이라고 냉정한 듯 몰아붙이는 이 시인은 사실, 우리들의 심연 속에 자리 잡은 서글픈 외로움을 그 누구보다 이해해주고 있으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인간의 외로움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 주고 있다. 인생 어디쯤에선가 눈이 내리면 씩씩하게 눈길을 헤쳐 걸어가고 비가 내리면 담담하게 빗길 속으로 나아가라는 당부와 함께. 그래, 산다는 것은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것(신경림의 ‘갈대’ 中)임을 알고 있는 또한 알아주는 시인들의 시 한 편이 있어 인간이기에 짊어져야할 이 외로움이 사무치도록 쓸쓸하지만은 않구나.

친구야, 너에게 시가 어디서,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할까. 칠레의 시성詩聖 파블로 네루다는 모르겠다고,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고 읊조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날 시가 그를 부르며 찾아왔다는 것. 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와 대면하면서 그는 어렴풋이, 뭔지 모를 첫 줄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보았지. 풀리고 열린 하늘을, 휘감아도는 밤과 우주를 그리고 신비의 모습에 취한, 심연의 일부인 네루다 자신을 보았다(파블로 네루다의 ‘시’ 中). 그의 심장과 영혼은 그렇게 열렸고 네루다가 쓴 시는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고동치게 한다. 시인 김용택은 저문 들길에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렸고 그러던 어느 날 시가 그에게로 찾아왔다. 저 깊은 산속에서, 그의 어두운 발등을 밝혀주는 환한 목소리로 시가 그를 불렀다. 나에게 시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왔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읊어주시던 김소월의 초원 중 어느 한 구절을 타고 날아들었을까. 네게 생일 선물로 받은 기형도의 시집 가운데서 나를 불러 세우는 시인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일까. 알 수는 없지만 4월의 길목에서 어김없이 찾아오는 라일락 향기처럼 인생의 길목 어딘가에서 시의 향기를 만나게 된다. 시는 나에게 또한 너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그렇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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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네 고만물상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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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것들은 골동품이 아니야. 옛날에 쓰던 가재도구들이지.” (11쪽)
혹여 희소성의 가치가 굉장하다거나 오랜 역사와 우아한 전통, 기품 있는 내력을 가진 골동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조금은 당황스러운 나카노 씨의 설명이다. 학교에서 쫓겨난 전직 선생님이 취미로 찍은 조야한 흑백사진,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새겨진 라이타, 그냥 낡은 의자, 옛 스타의 전신 입간판, 문진, 딱지, 바구니, 삼백 엔짜리 원피스 등 나카노네 고만물상에서 취급하는 물건들은 값비싸고 귀중한 골동품이 아니라 단지 더 이상 쓸모가 없기에 버려진 혹은 헐값에 팔린 잡동사니이자 낡아버린 가재도구들이다. 하지만 이 쓸모없는 물건들이 누군가에겐 매우 쓸모 있는 물건이 되어주고, 누군가에겐 계속해서 발걸음하게 만드는 더 없이 소중한 소장품들이며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회상이고 기억이다. 공짜로 받아온 물건들 사이에 있던 낡은 과자통을 열어보니 노랑, 빨강, 오렌지색의 동물모양 지우개가 한가득 들어 있다. 점원 히토미와 다케오는 고민한다. 괜찮을까? 꽤 비싼 걸지도 몰라. 문득,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한 아이를 떠올려 본다. 보물이라도 다루듯 아이는 하나 둘, 작은 손으로 지우개를 소중히 담아두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과자통 안을 들여다보며 오렌지색 지우개처럼 웃었을 텐데.

“내가 언제 돌아올지는 하늘이나 알지.” (70쪽)
회사를 그만두고 느닷없이 고만물상을 연 주인장 나카노 씨, 나카노 씨의 누나인 비주류 인형예술가(?) 마사요 씨, 화장도 치마도 별반 관심 없는 이 책의 화자이자 점원인 히토미, 학창시절 괴롭힘 끝에 손가락 하나를 잃은 또 한 명의 점원 다케오. 나카노네 고만물상의 이 네 사람은 집단 일중독증에 걸린 일본, 경제대국 일본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요즘 일본 사회에서 문제시 되고 있는 정신질환적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引き籠もり)들도 아니다. 그저, 주류라고 규정하고 있는 무리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조금은 가난한, 조금은 느긋하고 어설픈 ‘마이 페이스’ 인생을 영유한다. 별반 사건도 없이 따분할 법한 이들의 소소한 일상은 저자 가와카미 히로미에 의해 흥미로운 사건들이 배치되고, 등장인물들의 심도 있고 농밀한 대화를 통해 웃음 짓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고만물상의 낡은 소품들과 마이 페이스 인생들을 소재로 사랑에 대해서, 상처와 치유에 대해서, 성장과 성숙에 대해서 유려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그래도, 나카노네 고만물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요. (330쪽)
황당한 사건들, 엉뚱한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카노네 고만물상은 문을 닫는다. 고만물상의 물건들은 이제 인터넷에서 거래가 되고, 히토미는 만원 전철로 회사에 출근하고 자격증 공부로 정신없다. 다케오는 웹디자이너가 되어 납기일 때문에 바쁘고 헬스클럽도 등록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땐, 상황도 사람도 조금씩 변해있었다. 이들의 변한 모습을 보고 섭섭하다거나 혹은 “주류가 되었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왠지 실례가 될 것 같다. 성장과 성숙. 이들은 조금 더 성장하고 조금 더 성숙해졌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게 되어서, 돈을 좀 더 벌게 되어서, 주류에 좀 더 가까워져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로 사랑했어.”, “내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 “나, 너무 슬펐어.”라고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진정한 마이 페이스를 즐기는 성숙한 사람들이 되었기에 말이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절판된 책을 발견했을 때, 중고 엘피판 상점에서 앨범들을 구경하느라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을 때, 지나간 시간들을 간직하고 있는 이 오래된 물건들 앞에서 잠시나마 즐거운 마이 페이스 리듬에, 아련한 추억의 편린들 가운데 몸도 마음도 느긋하게 맡겨본다.

내가 몰아붙인 상대가, 죽었을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한단 말이지. 젊을 때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잘 몰랐어.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까, 사람 목숨이란 게 참, 세상에 너무나도 간단히, 한순간에 끊어지더라고.(…)사고로 죽지, 병으로 죽지, 또 자기 손으로 죽지, 아님,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 의해서 죽기도 하고.(…)나한테 독한 말을 들은 직후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고, 그 이튿날 죽을지도 모르고, 한 달 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아무튼, 그게 언제가 됐든, 사람들은 죽게 마련이야.(…)상대를 몰아세우기 전에 나의 격한 증오심과 독설을 감당할 수가 있을 정도로 상대가 건강한지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 나이 먹었다는 증거지.(…)“그래서 나는 그렇게 연락이 없으면, 일단 그 사람이 그새 세상 하직한 건 아닌가 생각해.” (나카노네 古만물상 중 203-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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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Mr. Know 세계문학 33
A.스뜨루가쯔키 외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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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절망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러시아 문학은 결코 낯설지 않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등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낯설기는커녕 이미 동서양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성과 감성 속에 농밀하게 자리하고 있다. 혹자는 러시아 문학이 지나치게 대우받고 있다며 시기어린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위대한 고전과 걸작들을 열거할 때, 러시아 문학작품을 제외한다면 현악4중주 가운데 바이올린이나 첼로 혹은 비올라 하나쯤 없어도 상관없다는 기이한 궤변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러시아 문학’이라는 앞서 말한 표현이 갑작스럽게 무색해지는 것은 1960년대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았다는 아르까지 스뜨루가츠끼, 보리스 스뜨루가츠끼(이하 스뜨루가츠끼 형제)라는 이 낯선 이름과 러시아 과학소설이라는 낯선 장르와 마주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과학소설과는 워낙에 안면이 없고 더욱이 러시아 과학소설은 이전에도 접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SF작가, SF소설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타이틀을 걷어내고 들여다본 스뜨루가츠끼 형제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이나 20세기 초반을 장식했던 디스토피아(dystopia) 문학, 풍자 문학 등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러시아 체제와 사회적 모순을 비판했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조지 오웰의 <1984년>이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의 디스토피아 문학, 고골리의 <외투>나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같은 풍자 문학 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백 년 만의 폭염이 닥친 6월의 어느 날, 천문학자인 말랴노프를 비롯한 물리학자, 정밀 공학자, 생물학자, 동양학자 등 러시아의 유능한 학자들이 각자 대단히 중요한 연구 결과를 앞두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부터 모든 연구를 전면 중단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들의 생명까지 위협 당하는 거대한 공포와 압력 앞에 직면하게 된다. 이들은 넓게는 인간으로서, 좁게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자유, 인간성과 존엄성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돈이나 출세, 명예와 같은 세속적, 물질적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를 앞에 두고 처절하게 고뇌하고 갈등하고 절망한다. 말랴노프를 위시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결국 이 미지의 세력 앞에 굴복, 순응하고 오직 수학자인 베체로프스키만이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존엄함을 지키고자 자신들을 억압하는 미지의 존재를 향해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복선을 남기며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시종일관 냉철하고 기품이 넘치던 베체로프스키는 이러한 신념으로 인해 전례가 드문 악성종양이 재발하거나 누군가 그와 그의 집을 불태울지 모른다. (그 미지의 세력은 이런 짓을 할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그러나 얼핏 비극적으로 보이는 이 소설이 단지 참담하고 절망적인 시선으로만 점철된 소설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저자인 스뜨루가츠끼 형제는 베체로프스키의 입을 빌려 러시아인들에게 또한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을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너와 글루호프의 연구가 10억 년쯤 후에 수백만의 다른 연구와 결합되어 마침내 지구의 종말을 유도해 내는 일이 없도록 진행될 거야.(…)10억 년의 세월이 우리 앞에 있어.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시작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중에서)』 

이 소설이 내재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가치는 아마도 스뜨루가츠끼 형제의 용기(설령 70년대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해 한동안 집필하지 못해다 하더라도)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존엄성이 어떠한 위협과 억압 아래에서도 이러한 가치들을 품고 구현할 수 있다는 인간 존재에 대한 긍정과 희망의 시선일 것이다. 절망하기에는, 좌절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의 시간이 있고 동시에 우리는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있고 또 그래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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