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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네 고만물상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여기 있는 것들은 골동품이 아니야. 옛날에 쓰던 가재도구들이지.” (11쪽)
혹여 희소성의 가치가 굉장하다거나 오랜 역사와 우아한 전통, 기품 있는 내력을 가진 골동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조금은 당황스러운 나카노 씨의 설명이다. 학교에서 쫓겨난 전직 선생님이 취미로 찍은 조야한 흑백사진,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새겨진 라이타, 그냥 낡은 의자, 옛 스타의 전신 입간판, 문진, 딱지, 바구니, 삼백 엔짜리 원피스 등 나카노네 고만물상에서 취급하는 물건들은 값비싸고 귀중한 골동품이 아니라 단지 더 이상 쓸모가 없기에 버려진 혹은 헐값에 팔린 잡동사니이자 낡아버린 가재도구들이다. 하지만 이 쓸모없는 물건들이 누군가에겐 매우 쓸모 있는 물건이 되어주고, 누군가에겐 계속해서 발걸음하게 만드는 더 없이 소중한 소장품들이며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회상이고 기억이다. 공짜로 받아온 물건들 사이에 있던 낡은 과자통을 열어보니 노랑, 빨강, 오렌지색의 동물모양 지우개가 한가득 들어 있다. 점원 히토미와 다케오는 고민한다. 괜찮을까? 꽤 비싼 걸지도 몰라. 문득,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한 아이를 떠올려 본다. 보물이라도 다루듯 아이는 하나 둘, 작은 손으로 지우개를 소중히 담아두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과자통 안을 들여다보며 오렌지색 지우개처럼 웃었을 텐데.
“내가 언제 돌아올지는 하늘이나 알지.” (70쪽)
회사를 그만두고 느닷없이 고만물상을 연 주인장 나카노 씨, 나카노 씨의 누나인 비주류 인형예술가(?) 마사요 씨, 화장도 치마도 별반 관심 없는 이 책의 화자이자 점원인 히토미, 학창시절 괴롭힘 끝에 손가락 하나를 잃은 또 한 명의 점원 다케오. 나카노네 고만물상의 이 네 사람은 집단 일중독증에 걸린 일본, 경제대국 일본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요즘 일본 사회에서 문제시 되고 있는 정신질환적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引き籠もり)들도 아니다. 그저, 주류라고 규정하고 있는 무리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조금은 가난한, 조금은 느긋하고 어설픈 ‘마이 페이스’ 인생을 영유한다. 별반 사건도 없이 따분할 법한 이들의 소소한 일상은 저자 가와카미 히로미에 의해 흥미로운 사건들이 배치되고, 등장인물들의 심도 있고 농밀한 대화를 통해 웃음 짓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고만물상의 낡은 소품들과 마이 페이스 인생들을 소재로 사랑에 대해서, 상처와 치유에 대해서, 성장과 성숙에 대해서 유려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그래도, 나카노네 고만물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요. (330쪽)
황당한 사건들, 엉뚱한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카노네 고만물상은 문을 닫는다. 고만물상의 물건들은 이제 인터넷에서 거래가 되고, 히토미는 만원 전철로 회사에 출근하고 자격증 공부로 정신없다. 다케오는 웹디자이너가 되어 납기일 때문에 바쁘고 헬스클럽도 등록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땐, 상황도 사람도 조금씩 변해있었다. 이들의 변한 모습을 보고 섭섭하다거나 혹은 “주류가 되었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왠지 실례가 될 것 같다. 성장과 성숙. 이들은 조금 더 성장하고 조금 더 성숙해졌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게 되어서, 돈을 좀 더 벌게 되어서, 주류에 좀 더 가까워져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로 사랑했어.”, “내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 “나, 너무 슬펐어.”라고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진정한 마이 페이스를 즐기는 성숙한 사람들이 되었기에 말이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절판된 책을 발견했을 때, 중고 엘피판 상점에서 앨범들을 구경하느라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을 때, 지나간 시간들을 간직하고 있는 이 오래된 물건들 앞에서 잠시나마 즐거운 마이 페이스 리듬에, 아련한 추억의 편린들 가운데 몸도 마음도 느긋하게 맡겨본다.
내가 몰아붙인 상대가, 죽었을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한단 말이지. 젊을 때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잘 몰랐어.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까, 사람 목숨이란 게 참, 세상에 너무나도 간단히, 한순간에 끊어지더라고.(…)사고로 죽지, 병으로 죽지, 또 자기 손으로 죽지, 아님,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 의해서 죽기도 하고.(…)나한테 독한 말을 들은 직후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고, 그 이튿날 죽을지도 모르고, 한 달 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아무튼, 그게 언제가 됐든, 사람들은 죽게 마련이야.(…)상대를 몰아세우기 전에 나의 격한 증오심과 독설을 감당할 수가 있을 정도로 상대가 건강한지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 나이 먹었다는 증거지.(…)“그래서 나는 그렇게 연락이 없으면, 일단 그 사람이 그새 세상 하직한 건 아닌가 생각해.” (나카노네 古만물상 중 203-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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