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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자아성찰 이야기
이제야 몇 자 적어보려고 하는 하루키의 책이 <태엽 감는 새>나 <상실의 시대>, 정작 그의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해변의 카프카>나 최근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압도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1Q84>와 같은 그의 대표작도 아니고,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논하지도 말라던 <먼 북소리>도 아닌, 90년대 후반의 작품이자 요란스럽게 홍보되던 그의 작품들과는 달리 제법 조용했던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라는 사실 또한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의아하다.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사랑 이야기’라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카피문구. 하지만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카피문구는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자아성찰 이야기’가 아닐까. 물론, 22살의 일본인 여성 스미레와 17년 연상 그러니까 39살의 한국인 여성 뮤와의 사랑 이야기는 그 설정 자체만으로 충분히 기묘하고도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다. 이 둘의 관계를 관찰자 시점에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나’ 또한 스미레와의 관계와 스미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생각해 봤을 때 이것 역시 결코 범상치 않은 사랑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동성간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고, ‘나’와 스미레와 뮤의 삼각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갈등과 양면성, 인간간 관계성의 고민을 통한 자아성찰을 이야기하기 위해 하루키가 심도 있게, 세밀하고 치밀하게 설치하고 연출한 무대장치이자 작품의 배경이며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다.
자아의 분열은 어쩌면 자아성찰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일지 모른다. 또한 자아성찰이란 결코 하나의 자아로 함축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여러 형질의 자아가 심지어 갈등하고 대립하는 양면적인 자아가 총체적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즉 자아성찰의 과정이란 결국 여러 자아를 구성해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뮤는 자아의 분열 이후 그만 자아의 구성을 놓치고만 것이다. 백발(白髮)의 그녀는 이쪽 세상에, 흑발(黑髮)의 그녀는 저쪽 세상에. 뮤는 완벽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외모와 지적이고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 그러나 14년 전 스위스의 어느 유원지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 그녀의 자아는 완전히 양분화되었고, 탐미적이고 욕망과 욕정 가득한 흑발의 그녀는 영원히 저쪽 세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쪽 세상에 남은 그녀는 더 이상 육체적, 성(性)적 욕망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식욕에 대한 갈망을 비롯 인간이 즐기고 누리고 동시에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욕망이라는 굴레에서 비껴나게 된다. 이것은 해탈이나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반쯤 죽어 있는 것이다. 욕망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기쁨도 행복도 슬픔도 분노도 느끼지 못한다. 뮤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게 된 스미레는 저쪽 세상의 뮤를 찾아 사라진다.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뮤를 찾아서. 그리고 스미레는 돌아온다. ‘나’와 스미레의 짧은 대화를 통하여 짐작하건데, 아마도 스미레는 자아의 분열이 아닌 자아의 구성을 이룬 듯하다.
“나야, 돌아왔어.” “그거 잘됐네.”
스푸트니크(Sputnik)는 1950년대 세계 최초로 발사된 러시아 인공위성의 이름이다. 정해진 궤도를 따라 우주 공간에서 홀로 비행하는 인공위성이란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어로 스푸트니크(Sputnik)란 ‘동반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름이 참으로 적절히 명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주 공간을 홀로 떠도는 듯한 인공위성은 사실 지구와 또 다른 인공위성들과 끈임 없이 소통(communication)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론 한없이 고독한 존재이며 인간의 내면은 끈임 없이 갈등하고 대립한다. 또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역시 끝없는 갈등과 대립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과 갈등, 대립은 좀 더 성숙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자아의 구성 곧 자아성찰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내 안에 내재된 또 다른 나는 나를 당황케 하고 혼란에 빠트리지만 결국 이 또한 나임을 자각하고 자아의 총체적 구성을 이루어 나갈 때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되고 자아의 성찰을 가능케 한다는 것. 하루키는 예의 그 섬세하고 세련된 필력을 바탕으로 뮤와 스미레, ‘나’와의 사랑과 관계 그리고 이들의 내면세계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아성찰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