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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내가 왜 네게 빠지게 됐는가를 종일 생각하다가 먼저 떠오른 것은, 너의 손이다. 내가 처음 보았던 너의 손은, 우리 집 데크의 내 흔들의자 팔걸이에 자연스럽게 놓여져 있었다. 네가 산책하던 중 내 집에 들어왔다가 무심히 그 의자에 앉아 잠든 날 보았던 손이다. '놓여져' 있었다는 내 표현에 주목해다오. 그것은 네 의지로 네가 내려놓은 손이 아니었다. 우연히, 그곳에 놓여져 있었다. (92쪽)
박범신의 <은교>는 크게 세 가지의 범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첫째는 칠순을 바라보는 도저하고 명망 높은 시인 이적요와 열일곱의 고등학생 한은교를 통해 가질 수 없는,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과 열망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이라는 건 사랑하려고 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팔걸이에 그저 ‘놓여져’ 있었던 은교의 손처럼 사랑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순간 우연히, 불현듯이 마음속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인지, 없는 사랑인지 아니면 통용될 수 있는 사랑인지, 그렇지 않은 사랑인지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사랑은 툭 하고 마음속에 놓여져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은교는 ‘빛’이었고 이적요는 그림자 즉 ‘어둠’이었다. 빛 가운데 어둠은 존재할 수 없고,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소멸된다.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다는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다. 질투심이 꼭 정열의 증거는 아니라고 했다. 정말 질투심이었다면, 나의 질투심이, 은교를 선생님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질투심인지, 아니면 선생님을 은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질투심인지, 그것이 아니면 재능에 있어 선생님의 그림자조차 따라갈 수 없는 고통에 따른 질투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224-225쪽)
범주의 그 둘째는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를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아득한 간극에 관해서 그리고 사랑과 증오, 연민과 모멸이 공존하는 이중적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이적요와 은교의 이야기뿐 아니라 오이디푸스 신화를 근간에 둔 이적요와 서지우의 이야기 역시 이 소설의 굵은 줄기이다. 특히나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이를테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를 읽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소설이든 영화든 잘 짜여진 구성이 주는 쾌감은 역시 크다.
문학에서까지, 층위를 제멋대로 나누어놓고, 모든 작가 작품을 마치 공산품에 품질 표시를 하듯 표시해서 칸칸마다 나누어 몰아넣으려는 듯한 지식인 독자들의 일반적 습관에 나는 경멸감을 갖고 있었다.(…)그들의 분류 기준이란,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대개는 전근대적 '양반의식'이 이월상품처럼 전이돼온 것이다. (141쪽-142쪽)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250-251쪽)
그 셋째는 작가 박범신의 목소리다. 사랑에 대한, 늙음에 대한 그의 성찰과 역사 저편으로 흘러간 고단했던 청춘을 향한 위로와 안타까움 그리고 대한민국 문단의 전근대성과 편협성에 관해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 문학에는 호불호가 있는 것이지 양반과 상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나이가 들어감은 자연이며 과오일 수 없고, 늙는다는 것은 범죄가 아니고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청춘의 욕망, 노년의 욕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갈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적요의 목소리가 아니라 박범신 자신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려는 듯 소설 곳곳에 박범신의 실제 시집인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의 시詩들을 배치하고 있다.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욕망은 한껏 당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고요했다.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310-311쪽)
그 숱한 사랑 이야기들은 결국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의 귀결이다. 이적요의 입을 빌려 저자는 사랑은 본래 미친 감정이고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랑이란 무엇이다라는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정형화되어 있는 범주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사람들은 틀을 짜고 잣대를 들이댄다. 사랑은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고 또 많은 형태와 방법이 있다. 그것은 광기일 수도, 욕망일 수도, 헌신일 수도, 열망일 수도 있다. 소설 <은교>는 나에게 넌 빛이었기에 가질 수 없음에도 끝없이 갈망했음을, 한없이 사랑했음을 이야기한다. 지극히 간절했기에 나의 해체를 통해 소유의 욕망이 아닌 내어주고 싶은 욕망으로 그리고 욕망을 넘어선 사랑이었다고 말이다. 적어도 이적요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