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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79쪽)
문학 평론가 김현은 우리나라의 ‘비평’ 내지는 ‘평론’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이다. 김현의 저서 <행복한 책 읽기>는 그의 유고 일기이며 무수한 문학작품들, 인문학 서적들, 시, 영화에 대한 서평이고, 켜켜이 쌓아올린 단상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의 가장 끔찍한 전언은 맨 앞 대목에 숨겨져 있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그 동물은 체념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불편하고 더러운 것, 비인간적인 것에 익숙해진 인간의 모습은 더러운 것인가, 안 더러운 것인가? (71쪽)
몇 해 전에 읽었던 책인데 문득 다시 꺼내들어 읽으면서도 여전히 읽는 내내 긴장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끝없이 던져대는 난해하고 날카로운 질문들, 신랄하고 단호한 통찰과 주장 앞에서 주눅이 든다. 어째서 그는 이토록 맹렬하게 책을 읽고 글을 썼을까. 그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과 그 죽음을 예견한 김현의 글쓰기와 책 읽기는 날숨과 들숨이었고, ‘삶’에 대한 확인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치열하게 사유하고 팽팽한 긴장감이 묻어나는 물음들로 가득했던 것이 아닐까(문득 ‘죽음만이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도 괜찮게 만들어준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권위주의의 특성은,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라는 ‘믿음’에서 연유하는 오만과 뻔뻔함에 있다. 나는 옳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뻔뻔함과 나는 틀릴 리가 없다는 오만함은 동어반복에 기초하고 있다. 권위주의는 동어반복이다. 나는 권위 있으니까 권위 있다! (178쪽)
48세의 나이로 작고한 김현. 사망하기 반 년 전쯤 남긴 그의 마지막 일기이자 짧은 시 한 편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한 인간의 실존적인 두려움을 일체의 군더더기를 배제한 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삶을 향한 열정을, 생에 대한 고귀하고도 숭고한 욕망을 한 편의 시 안에 모두 토해내고 있다. 아, 살아 있다.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행복한 책 읽기: 김현의 일기 중 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