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영화를 만나다
김영욱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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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있어서 축구란 놀이나 운동, 게임 그 이상의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나 보다. 축구뿐만이 아니라 농구가 되었든 복싱이 되었든 남자들에게 있어서 축구를 잘한다, 농구를 잘한다 혹은 축구를 한다, 농구를 한다는 것은 단지 한다, 잘한다의 의미를 넘어선 ‘남자다움’의 상징과도 같은 모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남자다움이란 더 이상 ‘아이’가 아닌 ‘남자’로서의 자격이 갖추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남자 아이가 축구를 한다는 것은 일종에 통과의례를 거쳐 남자가 되어감을 상징한다. 그림책 작가에 대해 말할 때 앤서니 브라운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일명 ‘윌리 시리즈’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작가는 작고 소심하고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이는 침팬지 ‘윌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과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과 소통한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축구선수 윌리>에 등장하는 주인공 윌리는 소심하고 체구가 작은 친구다. 다른 덩치 큰 친구들-이를테면 고릴라, 고릴라의 눈에 침팬지는 얼마나 왜소해 보이겠는가-은 이런 윌리를 축구에 끼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윌리는 비록 몸은 왜소하지만 덩치 좋은 선수들을 재치 있게 따돌리고 경기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 경기 당일, 윌리는 능수능란하고 정확하게 공을 다루어 결국 상대팀의 골망을 흔든다. 작가 앤서니 브라운은 이 작은 친구를 통해서 아이가 소년의 모습으로 성장하고 변화해 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동시에 편견이나 힘, 권위 앞에서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건강한 영혼을 담아내고 있다.



<그림책, 영화를 만나다>의 저자 김영욱은 그림책 <축구선수 윌리>와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잇대었다. 1980년대 영국 북부의 한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의 주인공 빌리는 탄광 마을의 다른 사내아이들과는 좀 다르다. 축구나 권투, 레슬링을 하며 노는 아니 교육받고 훈련받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빌리는 발레를 배우고 싶어 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많이 변화했지만 발레라는 것이 그렇다. 발레 포스터가 되었든 발레 관련 팸플릿이 되었든 여성인 발레리나Ballerina의 이름이 우선이며, 그 뒤를 이어서 남성인 발레리노Ballerino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건 일종의 불문율과도 같은 것으로써 그만큼 발레라는 영역은 여성성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예술-오늘날에는 발레리나, 발레리노를 구분하기보다는 남녀 무용수 모두를 통틀어서 발레 무용수(ballet dancer)로 칭하지만-이다. 80년대 그것도 영국 노동계급의 상징인 광산 마을에서 사내아이인 빌리가 발레를 하겠다고 하니 빌리의 아버지나 형은 의아한 것이 아니라 화가 날 지경이다. 노동계급으로서, 광부로서 사내다운 사내가, 남자다운 남자가 되어야 할 내 아들 빌리가 발레라니! 하지만 빌리는 말한다. 발레를 할 때만큼은 불타는 영혼을,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느낀다고. 결국 빌리의 아버지는 빌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들 빌리를 로열발레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광부들의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갱도 안으로 들어간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로 빌리가 런던에 위치한 로열발레학교로 가기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넓고 환한 세상으로 향하는 그 순간, 어두운 지하 갱도 안으로 들어가는 빌리의 아버지를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빌리는 정식 발레리노가 되어 날아오른다, 새처럼. <축구선수 윌리>와 마찬가지로 영화 <빌리 엘리어트> 역시 아이가 소년으로, 성인으로 성장하고 변화해 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빌리를 통해 세상이 정해 놓은 편견 앞에 굴복하지 않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변화시키고 가꾸려고 노력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담아내고 있다.



남자다움이란 무엇이며 또 여자다움이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의 말처럼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자,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하는 남성들, 혹은 여성들’을 두고 남자답다, 여자답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남자다움의 자격 그리고 여자다움의 자격은 다름 아닌 얼마나 건강한 영혼인가,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가꾸어 나가는가,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바꾸기 위한 용기를 가기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의 여하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침팬지 윌리와 발레리노 빌리는 사나이다운 사나이, 남자다운 남자가 아닐까.



<그림책, 영화를 말하다>는 기억의 편린 같은 저자의 소소한 추억들과 열일곱 여덟 편의 영화들 그리고 열일곱 편의 그림책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한 에세이다. 저자가 선택한 그림책-작가 크빈트 부흐홀츠와 로베르트 이노첸티에 대해서도 할 말이 너무 많지만-과 영화의 조우는 대체적으로 조화로웠으며 에세이로써 갖추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형식에 구애拘礙받지 않고 저자의 경험과 느낌,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좋은 에세이로써 부족하지 하지 않다.



“어느 독자라도 책을 읽으면서 자기 나름의 상상을 펼치며 이야기를 재해석한다. 내 그림책은 그런 수많은 상상의 결과물 중 한 예에 불과할 뿐, 정답은 아니다.”(…)그에게 그림이란 상상력을 발휘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도구다.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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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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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유전자에 대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성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주의는 보통 개체 행동에서도 이기성이 나타나는 원인이 된다. (40쪽) 이기성의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52쪽)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유전자 또는 DNA의 생존을 궁극의 목표로 하는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논제를 중심으로 아름답고 선하게 느껴지는 이타적 행위마저도 결국은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행동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는 도킨스의 주장을 많은 예시와 논리들, 논증들, 뛰어난 과학적 상상력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풀어나간 책이 바로 <이기적 유전자>이다.  

도킨스가 바라보는 유전자의 세계는 잔혹할 만치 비정하고 대단히 이기적이다.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본래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를 담아낼 수 있는 ‘생물’의 몸을 통해, 자기복제를 통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주의는 동일한 종 가운데서도 또는 타종들 간에서, 개체 행동에서도 이기성이 나타나는 원인이 된다.

생명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서양 근대 철학들이 그 철학함에 있어서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기적인 본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이기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욕망만을 좇는 존재인가? 피터 싱어는 동물세계의 비이기적 행동, 이타적 행위에 대해 ‘톰슨가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아프리카의 들개 떼가 노리는 톰슨가젤들은 들개 무리를 발견하게 되면 ‘스토팅(stotting)’이라는 이상한 뻐정다리 걸음을 취하며 뛰어가거나 높이뛰기를 한다. 이것은 다른 동료에게 위험을 알리는 일종의 경고 행위로써, 이러한 뻐정다리로 뛰어가거나 점프를 하는 몇몇 톰슨가젤은 빨리 뛰지 못하기 때문에 들개 떼에게 잡아먹힐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톰슨가젤의 행위에 대하여 도킨스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자하비의 이론을 끌어와 톰슨가젤의 행위에 대하여 주장하기를, 포식자는 본능적으로 쉽게 잡을 수 있는 먹이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무리들 중 가장 느리고 약하고 어리고 또는 늙은 개체를 노리게 된다. 이때, 높이 점프를 하는 톰슨가젤은 자신이 그러한 행위를 함으로써 나는 이렇게 높이 뛸 수 있을 만큼 젊고 대단히 건강한 개체라는 사실을 과장된 방법으로 보여주는 행위 곧 이타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이기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나를 잡으려고 하지 마라, 내가 아닌 다른 약한 개체를 쫓아라.”라는 필사적인 자기방어 행위이자 철저한 이기성이다.

도킨스의 이러한 이론의 바탕이 되는 결정론적 생명관, 곧 유전자가 모든 생명체들의 행위와 행동, 현상들에 우선한다는 주장과 유전자의 이기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실은 유전자의 지배와 통제에 한계 지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가 인간을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조종할지라도 인간이 생애 전반에 걸쳐 언제나, 늘 ‘유전자’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전자가 그리고 이 유전자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 해도 이타주의에 대하여, 타인에 대한 사랑과 베풂에 대하여, 선善함에 대하여 인간은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의식적으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고, 교육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도킨스가 그의 또 다른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이기적 열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이타주의는 분명 존재하며 이를 ‘고귀한 실수’라고 표현한 바 있다(도킨스는 이 고귀한 실수에 대하여 결국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인간의 후천적 노력과 이 고귀한 실수가 바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경계이자 동시에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유전자가 과학적으로, 사실fact로써 이기적이라고 했을 때)에 온전히 지배받지 아니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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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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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욕망 Desire

커피의 자극은 인간의 한계와 나태함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를 넘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는 것이 서양문화, 특히 근대화의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칠 줄 모르는’ 지속성이 기본요소이자 근간이 됩니다.(…)과도한 업무형태를 부추기고 지탱해준 것이 바로 ‘커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쪽) 개개인마다 커피에 대한 호불호, 마시는 이유, 마시는 양, 마시는 종류 등 제각각 다양하겠지만 분명한 건 언젠가부터 커피는 현대인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음료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는 욕망이라는 관점으로 커피의 속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커피를 음용함으로써 인간은 ‘깨어 있음’을 지향하고 치열한 경쟁의 세상 곧 이 현대사회에서 생존하고 더 나아가 성공하고자 갈망한다. 저자는 커피를 통해 멈추지 않는 지속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함께 물질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금과 철, 브랜드 등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또한 인간의 이러한 욕망으로 인하여 발생한 나라간 빈부의 격차와 착취, 삼림채벌과 이산화탄소 배출량 증가 등으로 인한 환경 파괴의 심각성에 대해 잊지 않고 짚고 넘어간다.


2. 모더니즘 Modernism

근대라는 시대는 중세와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인간을 중시하는 인간중심주의 시대입니다. (…)‘근대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관리당하고 권리를 침해당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90-91쪽)
근대의 태동은 신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인간의 자유라는 모토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신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인간은 또 다른 존재로부터 지배받게 되었고 권리를 침해받게 된다. 저자는 이 존재를 사회의 거대한 관리 시스템이라는 체계 속에서 우위에 있는 자 곧 ‘보는 자’ 더 나아가 ‘정보를 쥐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무한한 정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한다. 근대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깨닫고 이를 넘어선 탈근대, 포스트모던으로의 지향도 결국엔 또 다른 지배층을, 또 다른 피지배층을 다시금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제국주의 Imperialism

제국의 야망은 영역을 바꿨을 뿐 지금도 엄연히 살아있습니다. 특히 제국의 야망이 가장 심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은 경제 분야입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규모의 영토적 침략은 줄었지만 그 대신 금용기관들이 탐욕스럽게 먹이를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168쪽)
제국주의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한 괴물이다. 과거의 제국은 영토를 확장했지만 오늘 날의 제국은 경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칼에서 총으로 그리고 이제는 자본과 금융으로 침략하고 침략당하는 시대이며 자본이라는 무기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제국은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과거와는 다른 형태와 다른 속성을 가진 제국주의가 오늘 날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서 결국 이 제국으로부터 침략당하고, 침식당하고 있는 종속국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의 말처럼 이러한 현대의 제국주의가 가지고 있는 무서운 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덧붙여서 그렇기 때문에 실체의 명확성이 파악되기도 전에 이 거대한 제국으로부터 잠식되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한다.


4. 몬스터 Monster

남들이 다 가진 것을 자기만 갖고 있지 않다는 왠지 모를 열등감,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누군가가 갖고 있다는 부러움이나 질투심, 그런 여러 가지 불쾌한 감정의 반동으로 브랜드 물건을 향한 강렬한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186쪽)
저자가 세계를 움직인 몬스터로 꼽는 것은 세 가지다. 첫 번째 괴물은 여전히 역동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두 번째 괴물은 몰락했으며, 세 번째 괴물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몬스터인 자본주의는 많은 폐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인 ‘욕망’과 가장 절묘하게 궁합을 이루고 있기에 포기할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 모스터인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관료제가 강화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하여 노동자의 지나친 예속성은 필연적이며 노동자의 자발성과 성취욕은 저하되고 이는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경제적으로는 낙후와 침체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괴물은 몰락했다. 세 번째 몬스터인 파시즘은 과거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과 동시에 사라진 듯 보이지만 민족주의와 극우주의를 내세우고 감성과 폭력에 의지한 채 자국의 이익과 정부의 이익을 좇는 그런 나라, 그런 지도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5. 종교 Religion

기독교는 서양의 세계 침략에서 하나의 무기, 혹은 구실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그들은 기독교를 보급하는 것으로 미개한 사람들에게 ‘신의 구원’을 가져다준다며 정복의 명분으로 종교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악용한 이 방식을 예수가 보았다면 통탄할 일이죠. (241쪽)
15분. 인간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전쟁이 없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으며 전쟁이 없었던 시간은 단 15분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 통계가 팩트인지 아니면 상징적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세계사가 전쟁사이며 전쟁사가 곧 인류사라는 사실이다. 그 수많은 전쟁 가운데 종교는 주연이 되었든, 조연이 되었든 매우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출연이 잦은 배우는 바로 일신교들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차지하고 있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유일한 진리이며 자신이 믿는 신만이 참된 신이라고 여기는 일신교들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이 책 가운데 저자의 가장 빛나는 주장은 다름 아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가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적인 세계가 아니라 많은 신들을 포함하는 신화의 세계’라는 논리일 것이다.


사이토 다카시가 고찰하고 있는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곧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는 모두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회전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책에 새로운 사실이나 새로운 논리는 없다)을 풀어 나가되, 세계사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매우 명쾌하며 일목요연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꼽은 다섯 가지 힘이 인류사에 미친 지대한 영향에 대한 일목요연한 통찰력과 세계사의 전반적인 흐름과 궤적을 살펴보는 즐거움은 상당히 크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제국주의나 파시즘에 관한 부분에서 교묘히 빠져나가는 저자의 영리함을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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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에센스 55 - 박종호가 이야기해 주는 오페라 55편 감상의 핵심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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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마>가 이렇게 뛰어난 작품이면서도 공연을 자주 보기 어려운 것은 노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좋다고들 말하면서도 자주 올릴 수 없는 작품, 그래서 항상 관객의 목마름을 요구하는 작품, 그것이 바로 <노르마>인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라는 세기의 소프라노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묻혔던 이 오페라가 관객 앞에 다시 섰다. (95쪽)
유럽 화폐가 통합되기 전, 이탈리아 지폐에 그려진 유일한 음악가는 비발디도 푸치니도 아닌 바로 벨리니였으며 그 지폐의 뒷면에는 벨리니의 작품인 오페라 <노르마>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노르마는 작품의 내용도 내용지만 아리아 ‘정결한 여신’의 그 고고한 기품과 아름다움은 단연 압권이다. 그리고 여사제 노르마 역이 보여주어야 하는 섬세한 감정선과 카리스마, 음악적 기교는 모든 소프라노들이 꿈꾸되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역할로 악명 높다. 그래서 무대 위로 쉽게 올리지 못하는 오페라 <노르마>. 하지만 세기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로 인하여 오페라 속 노르마는 현현顯現케 된다. 아니 노르마로 인하여 마리아 칼라스가 세기의 소프라노가 될 수 있었다고 해야 하나. 칼라스 이후 많은 소프라노들이 노르마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저자의 말처럼 칼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노르마는 마리아 칼라스’라는 등식은 깨지지 않고 있다.


무대 위는 아무도 없고 조용하다. 그때 유명한 간주곡이 연주된다. 고금의 모든 오페라 간주곡을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은 마지막 파국이 닥치기 직전의 폭풍 전야 같은 역할을 한다.(…)지중해의 코발트블루빛이 가득한 이 명곡은 비극을 예감이라도 하듯 유려하면서도 간절하게 흐른다. (333-334쪽)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꼽으라고 한다면 열 손가락 안에,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곡을 꼽으라고 한다면 첫 번째 손가락에 꼽게 되는 곡,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마스카니가 약관의 나이인 26세에 작곡한 이 명곡은 마스카니에게는 기적이고 행운이고 운명이었으며 동시에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 늪이자 넘지 못한 벽이 되었다. 자신의 데뷔작이자 성공작인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을 뛰어 넘는, 아니 그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82세에 이르러 사망할 때까지 다시는 쓰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은 이 오페라의 비극적 결말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저 처연하게 아름답고 사무치게 안타깝다. 한평생 얼마나 갈망했을까, 다시 한 번 명곡을 쓰고자.



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투란도트는 류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사랑의 가치를 생각한다. 류는 죽음으로써 투란도트에게 사랑을 가르친 것이다.(…)마지막 장면에서 투란도트는 천자 앞에서 만인에게 공포한다. “그의 이름을 알아냈다. 그의 이름은…… 사랑!” (405쪽)
2003년,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는 오페라 <투란도트>가 공연되었다. 최대 규모의 야외오페라, 거장 장예모 감독의 연출, 장대한 스케일, 화려한 무대와 함께 음향 시스템의 문제, 관객들의 매너 문제 등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연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잊혀지지 않는 오페라다. 왜냐하면 오페라 <투란도트>였으니까. 오페라의 거장 푸치니의 유작 <투란도트>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푸치니가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작업을 했던 투란도트는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이 책의 저자 박종호의 말처럼 투란도트의 피날레는 아직도 창작의 여지가 남아 있기에 지금도 피날레는 여러 가지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되고 있으며, 인간의 개념과 의식의 변화에 따라 오페라 투란도트는 지금도 여전히 재창조되고 있는 살아있는 오페라다. 암으로 무너져 가는 육체와 싸우며 탄생한 거장의 마지막 작품 그리고 미완으로 남은 피날레. 위대한 오페라 투란도트보다 더 위대하고,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보다 더 감동적인 한 음악가의 삶의 마지막. 지금도 그의 이름과 그의 음악은 이렇게 불멸의 존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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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두 얼굴 : 외부 조종자 - 상황 속에 숨겨진 인간의 진짜 모습
EBS <인간의 두 얼굴> 제작팀 지음 / 지식채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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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기고 사람들이 졌습니다.(…)상황의 힘에 의해 그들은 일주일도 채 안 되는 감옥 생활 동안 그들이 일생동안 받은 교육을 해체해버렸습니다. 인간적 가치는 유보되었으며, 자아는 무시되었고, 인간 본성의 가장 흉하고 비열한, 병적 측면이 표면에 드러났습니다. (38쪽, 41쪽)
2002년 상영되었던 영화 ‘엑스페리먼트(The Experiment)’는 1971년, 스탠포드에서 행해졌던 ‘모의 교도소 실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독일 영화이다. 이 영화는 2010년 미국에서 동일한 제목으로 다시 한 번 리메이크될 만큼 이 실험의 과정과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지금까지도 위 실험은 사회적 요인, 상황, 환경, 권위 등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거대한 힘에 대한 논리를 전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실험이자 증거로써 제시, 거론되고 있다. 그만큼 이 실험은 단지 흥미로운 실험으로서의 의미를 넘어선, 상황에 의해 압도되고 지배당하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실험이었다.

 

그저 일제히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만으로 우리는 흔들리고 만다. 그 눈이 우리에게 상황을 구성하는 하나의 힘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렇게 악한가?’ 하는 질문은 사실 ‘인간은 그렇게 약한가?’로 대체되어야 한다. (68쪽)
어째서 인간의 무궁한 내면에 대해 몰두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하고, 가장 이성적인 학문으로써의 철학을 정립하는데 앞장섰던 독일인들이 순식간에 그토록 광포하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되어 한 민족을 말살하는데 동조했던 것일까. 군대 내, 의경 내에서의 집단폭행, 구타 사건이나 도저히 어린 학생들의 행동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잔악한 학내에서의 집단 따돌림 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거나 악한 유전자가 따로 있어서 혹은 개인의 심성이나 인성에 결함이 있어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인간의 두 얼굴>에서는 이에 대하여 인간은 집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굴복하기 쉽고, 집단 구성원들의 의견에 동조하려는 경향이 있고, 권위 앞에서 쉽게 복종하려 하며, 집단 내 안전하게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여러 실험들을 통해 밝히고 있다. 즉, 인간은 악惡한 존재라기보다는 상황이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 지배당하고 압도되고 굴종하는 한없이 약弱한 존재라는 것이다. 

 

상황의 힘을 재인식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상황을 바꾸는 인간의 힘을 믿는 것이다. 상황은 언제나 우리를 옭아매고 지배하지만 그것을 깨고 나오는 최종적인 행동의 선택권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170쪽)
2001년 1월 일본, 일본인 취객이 선로로 떨어졌을 때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는 열차가 곧 들어오는 즉, 자신이 목숨을 잃게 되는 거대한 상황 속에서, 이 압도적인 상황의 힘을 이겨내고 선로로 뛰어들어 취객을 구하고 이수현 씨 본인은 목숨을 잃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건 이후, 한국에서도, 개인주의가 극심한 일본에서도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해내는 놀라운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 <인간의 두 얼굴>은 인간의 의해 저질러지는 실수들과 과오들, 악행들과 죄악들을 상황의 탓으로 돌리고자 함이 아니며, 인간은 상황의 의해 지배당하고 종속되어 있는 나약한 존재임을 주장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이 책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은, 상황의 힘을 인식하고 원인을 파악하여 인간이 역으로 얼마든지 상황의 힘을 이겨내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상황을 지배할 수 있으며 압도적인 상황의 힘을 뚫고 나와 타인에게 선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이타심은 인간이 떨쳐 낼 수 없는 본능이라는 것.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것처럼, 악이 재생산되는 것처럼 선善 역시 퍼져나가는 것이며, 선함이 선함을 낳고, 선 또한 끈임 없이 재생산된다. 인간은 분명 상황에 지배당하는 평범하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상황을 바꾸고 이겨낼 수 있는 존재이며 선하고 능동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혹은 희망과 믿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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