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예술가들의 유쾌한 철학교실
프랑수와 다고네 외 22인 지음, 신지영 옮김 / 부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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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사유에 대한 대표적인 두 견해이자 상반된 두 견해는 지배적이었다.
 

베르그송을 필두로 언어는 풍요로운 사유를 제한, 왜곡할 수 있으며 대단히 한계적이라 사유하는 견해와 헤겔을 필두로 언어란 모호한 사유를 명료화하는 도구이며 언어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라 사유하는 견해. 이 괴물 같은 철학자들의 견고한 논리 앞에서 한 시나리오 작가는 이것도 저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이것도 저것도 꼭 맞는 말은 아니야 라고 피식, 여유 있는 웃음을 짓는다.
 

언어가 사유를 제압하는 것도, 사유가 언어를 제압하는 것도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유기적으로, 역동적으로 생성, 정립, 발전, 소멸, 변화하는 것. 우리의 몸(사유)이 우리의 어머니이고 우리의 언어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빠는 젖으로써 결국 언어와 사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끈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라는 모르지에브의 보들보들(견고함의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한 논리 앞에서 나도 그만 유쾌하게 웃고 만다. 

 

아이는 어머니의 진수이기 때문에, 아이는 곧 어머니이다. 언어는 모든 아이이자 모든 어머니이다. 언어는 어머니와 아이를 연결하는 끈, 사슬과 감옥이라는 모든 관념을 배제하는 생명의 끈이다. 우리가 우리의 몸인 것처럼, 사유는 우리의 몸이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어머니이고, 우리의 언어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그 몸인 동시에 빠는 젖이다. 

[삐딱한 예술가들의 유쾌한 철학교실 중 리샤르 모르지에브의 '사유는 언어의 포로인가?'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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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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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황토>는 ‘점례’라는 한 여인의 삶을 통해 굽이진 한국의 근현대사를 돌아보고 있다.
여인 아니 소녀 점례는 일본의 폭압과 압제가 가장 혹독했던 일제 말기, 억울하게 잡혀간 부모를 위해 주재소의 주임 야마다와 끔찍한 동거를 해야 했고 원치 않은 아이를 낳아야 했다. 해방이 된 이후 야마다는 자신의 나라로 도주했고 점례는 독립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모멸감과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 후 그녀는 집안 어른들의 명으로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박항구와 혼인을 하게 된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박항구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게 되고 어여쁜 딸아이도 낳는다.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행복을 누리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박항구는 부위원장이라는 직책으로 인민군들과 함께 나타난다. 미국의 개입으로 전세는 뒤바뀌고 남편 박항구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지킬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긴 채 다른 북한 군인들과 함께 북으로 도주한다. 점례에게 있어 이별의 아픔 같은 건 사치에 불과했던 것일까. 북한군 부위원장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군인들에게 잡혀간 점례는 고초를 겪게 되고 이때 그녀 앞에 미군 대위 프랜더스가 나타난다. 프랜더스는 점례가 처해진 상황과 자신의 위치 그리고 자신의 힘과 권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프랜더스는 그녀를 감옥에서 석방시켜 준 대신 자신의 울타리 안에 점례를 가두고 자신을 닮은 아이까지 갖게 한다. 얼마 뒤 전쟁이 끝나고 프랜더스는 작별의 인사도 없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

점례는 그렇게 아버지가 다른 세 아이(넷이었지만)를 낳고 기르며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삶을 버텨내야 했다.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긴 나라 잃은 민초들의 처절한 삶과 이념의 대립으로 하나의 땅에서, 하나의 민족이 서로 상처 주고 상처 입어야 했던 민중들의 고달픈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귀퉁이에 자리한 역사가 되었다. 이 아픈 역사를 저자 조정래는 소설이라는 문학적 장르를 통해, 점례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명시적으로, 함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지천에 널린 흙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밟히고 채이지만 흙의 본질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 흙 곧 황토는 생명의 근원이며 근간이고 대지의 시작이다. 저자는 제목 <황토>에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바로 생명의 모태 곧 어머니를 표상하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지탱하는 민초들을 상징하고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야마다와 박항구, 프랜더스가 단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점례의 삶 역시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점례의 인생은 우리의 어머니들이 혹은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여러 형태로 짊어졌던 삶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념이라는 명분 아래 대립과 반목이 되풀이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노력해야 하며, 강대국들의 이익 다툼과 힘겨루기 속에서 아이덴티티와 권리, 자주성을 잃지 않고자 애써야 할 것이다. 아픈 역사가 오늘날 또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조선의 주인이었고, 또한 독립 투사였습니다. 독립 투사란 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한 이 늙은이 같은 사람들만 독립 투사가 아닙니다. 왜놈들의 잔인무도한 핍박을 직접 받으면서 피해 입고, 손해 보고, 억울한 일 당한 여러분들도 독립 투사인 것입니다. 음으로 양으로 왜놈들에게 빌붙어 사리사욕을 채우며 일신의 영달만을 꾀한 친일파 무리들을 뺀 여러분 모두는 나라를 되찾는 데 똑같이 공을 세운 혁혁한 독립 투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157-158쪽)


내일 모레가 쉰 고개다. 험하고 고달프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세 자식뿐이었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허둥지둥하며 한시도 편할 때 없이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자식들이 잘되는 것만이 소원이었고, 그것이 유일하게 잡고 있었던 삶의 끈이었다.(…)그러나 그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바람이 자꾸만 엇나가고 버그러지고 있었다. 세 자식을 위해 몸 바스러지게 최선을 다했던 것은 무슨 덕을 보자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세 자식이 오손도손 사이좋게 살기를 바랐다. 그것이 눈물뿐인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신세가 가엾고 적막했다.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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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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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마비와 감정의 부재에 대하여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p.119)
한나의 이 물음은 재판장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물음이 아니라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자국自國인 독일 국민들에게 또한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을 향해 던지는 화두이다. 지독하리만치 명확한 답이 놓여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물음 앞에서 형편없이 주저하고 치졸하게 훈계하는 판사의 모습은 기실, 그에게서만 발견되는 모습이 아니다. 복수심도 아니고 방해가 되어서도 아니며 명령을 하달 받았기 때문도 아니고 위협해서도 아닌 그저 나에게 맡겨진 일을 했을 뿐 그들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항변 아닌 항변을 하던 독일인 트럭운전수의 술 냄새는 이미 그에게만 국한된 악취가 아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해졌을 때 그 상황이 지속되고 반복되고 되풀이 되어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리면 결국 인간은 이성과 감성이 마비된 채 감동도, 죄책감도, 책임감도, 수치심도 모두 잃어버리고 무감각과 무관심, 외면, 묵인 그리고 자기 합리화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한나가 그랬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던 당시의 독일인들이 그러했으며, 대동아 단결을 외치며 아시아인들을 도륙한 일본인들의 그러했고, 단일민족임을 자랑하며 이주노동자들을 학대하고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차별하는 우리네 모습이 그러하다. 

 

열등감과 죄의식, 성장에 대하여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꿰뚫을 듯이 앞만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만하고, 상처받고, 길 잃은, 그리고 한없이 피곤한 시선이었다. 그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시선이었다."(p.176)
관찰자이자 서술자인 '나' 곧 미하엘 베르크가 묘사하는 한나는 섹시하고 매력적이며 동시에 부지런하고 강인한 여성이다. 하지만 무엇 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문맹文盲이라는 것. 한나는 이를 감추고 은폐하기 위하여 외톨이가 된 채 화내고 울고 소리치며 살아왔고 결국은 종신형마저 감수하게 된다. 한나의 이러한 행동이 일면 수긍이 가는 것은 왜일까. 들키고 싶지 않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 안에 잠재된 열등감으로 인하여 우리 또한 다른 방식으로 화내고 울고 소리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문맹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느니 차라리 종신형을 선택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 혹은 은폐하고 싶었던 것은 그저 자신의 이미지나 자존심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 안에 뿌리내린 채 곪아버린 열등감의 악취였을 것이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글을 익히기 시작한 한나는 점차 자신의 열등감을 치유해 가면서 스스로가 행했던 죄악을 마주보기 시작한다. 이것은 치유이자 성장이고 동시에 또 하나의 아픔을 가슴 속에 심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한나의 모습 속에는 전범戰犯 독일의 모습과 전후 독일의 모습이 뚜렷이 투영되어 있다. 너무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그녀의 죽음은 결국 이 아픔의 귀결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p.201)
열다섯 소년과 서른여섯 여인의 사랑은 이해받기 어렵다. 동성간의 사랑이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대인과 독일인의 사랑만큼이나.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인간관계'에 대한-조금은 극단적인-은유 곧 메타포(metaphor)로 작용한다. 어쩌면 <더 리더>의 저자 슐링크는 결국 이 말이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존재라는 것.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나름의 소통과 교감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안부 한마디 없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는 책의 낭독 소리에 감사와 감동, 이야기와 사랑이 오고 간다. 후회한다고 해도, 고통스럽다고 해도, 영원히 행복하지 않을지라도 인간은 쉽지 않은 관계의 구성 속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철학적 사유를 소설 <더 리더>를 통해 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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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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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20세기 초 세계는 온통 전쟁과 증오, 가난과 배고픔, 슬픔과 고단함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중화사상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중국 역시 이 세계를 피해 가지 못했고 패배자의 입장에서,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견뎌내야 했다. 예술은 고통 속에서 꽃 피운다고 했던가. 이 시대를 기점으로 중국의 3대 문호라 일컫는 루쉰과 라오서 그리고 <차가운 밤>을 남긴 바진의 문학작품들이 탄생하게 된다.


바진의 생애 마지막 소설 <차가운 밤>의 주인공 원쉬안은 성실하지만 가난하고 유순하지만 나약한 인물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습경보에 따라 몸을 숨겨야 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적은 월급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와 아내 수성이다. 보수적이고 낡아버린 가부장제의 관습을 간직하고 지켜나가는 원쉬안의 어머니와 대학교육까지 받은 그의 아내 수성은 서로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바진은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몇 천 년 간 이어져 온 중국의 오랜 구습과 그것을 수용치 않고 타파하려는 새로운 사상과의 갈등과 충돌을 그렸다. 이것이 <차가운 밤>의 첫 번째 테마이다. 

 

유약하기 그지없는 원쉬안은 그 사이에서 그저 슬퍼할 뿐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그 어떠한 역할도, 책무도 감당하지 못한 채 몸도 마음도 병들어 간다. 또한 그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각박하고 피폐해지기만 할 뿐 그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임신한 아내가 죽어갈 때조차 회사에서 일을 해야 했던 원쉬안의 친구를 통해서, 병든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가 자리를 지켜야 하는 원쉬안을 통해서 바진은 담담한 듯 그러나 처절하게 전쟁의 비참함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차가운 밤>의 두 번째 테마이다.

 

원쉬안은 그의 아내 수성을 사랑했다. 그녀가 떠나지 않기를,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다정히 저 문을 넘어서서 돌아오기를 고대했지만 그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내 수성을 원망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았다. 원쉬안은 그저 미안할 뿐이었고 그녀를 사랑할 뿐이었다. 어느 덧 전쟁은 끝이 났고 일본의 항복으로 중국은 승전을 축하하는 경축행사와 승리의 축포가 터졌다. 그러나 이 축포는 중국의 서민들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쉬안에게는 사랑도 기쁨도 행복도 가족도 건강도 돌아오지 않았다. 원쉬안에게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외로운 곳일 뿐이다. 이것이 <차가운 밤>의 세 번째 테마이자 바진의 <차가운 밤>이 더없이 차가운 밤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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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노트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80가지 생각 코드 지식여행자 11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석중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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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갈릴레이가 말한 것처럼 되어 있는 앞의 명문구는 전설로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도달한 신념을 협박 때문에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며, 머리와 마음속까지 지배당하지는 않는다는 비유로도 쓰이고 있다. 그래서 이 전설에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힘이 있다. (80쪽)
중학교 사회 과목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께서는 갈릴레이의 명언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이의 제자들 혹은 후세에 사람들이 그의 비겁함을 변명하기 위해,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이지 정말 그가 한 말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중학생이었던 당시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지어낸 이야기라니. 하긴 살벌하기 그지없는 종교재판을 받고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겨우 살아남은 갈릴레이가 정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다면 재판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도로 체포되어 신성모독죄는 물론 법정모독죄, 괘씸죄까지 적용되어 끔찍한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부인하고 풀려나는 순간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진술하여 결국 화형에 처해졌다’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허구임이 분명한 이 명언이 어째서 지금까지도 갈릴레오를 대표하는 명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교양 노트>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는 이에 대해 그런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 함부로 자신의 뜻을 표출할 수는 없었을 테지만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곱씹고 또 곱씹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으로 확립한 신념이 억압과 협박으로 인하여 외부적으로는 굴복할지 몰라도 결코 머리와 마음속까지 지배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레이의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전설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동설을 부인했던 갈릴레이를 과연 비겁한 겁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은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수도에도 다국적 호텔 자본이 속속 진출해, 도쿄 한가운데에 있는 고급 호텔과 비교해도 손색없이 외양과 내실을 자랑하고 있다.(…)하지만 호텔 울타리를 벗어나 펼쳐지는 세계에 한 걸음이라도 발을 들이면, 너무나도 극명한 대비에 현기증이 날 것이다.(…)선진국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는 쾌적함과 편리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인가.(…)선진국은 딱 이 호텔처럼 개발도상국의 거대한 바다에 붕 떠 있는 고독한 섬 같다. (126쪽)
요네하라 마리는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와 체코 등 동구권 나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러시아어 통역사가 되어 역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많은 경험과 이야기를 축적했다.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와 동구권 나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저자는 무너져가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보며 일종의 회환과 아련함을 느낀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주의 국가가 사라진 것에 대한 회환이 아니라 유년시절의 세계가, 추억의 보금자리가 사라진 것에 대한 아련함일 것이다. 그리고 구 사회주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 역시 그들만의 소박함과 아름다움이 밀려드는 자본주의에 의해 상처받는 모습들을 보며 느껴지는 아픔들을 이야기한다. 흔히들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사이의 너무나 깊은 갭, 선진국이 그렇지 않은 나라들에게 행하는 21세기의 착취와 상처들. 글 곳곳에서 상처받고 사라져가는 유년시절의 보금자리들을 돌아보며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아련함이 묻어난다.


“별은 언제 어느 때에도 하늘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 남자는 말했다. 낮별은 밤별보다도 밝고 아름다운데, 태양의 빛에 가려져 영원히 하늘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그날 밤부터였다. ‘낮별을 보고 싶다!’ 하는 강렬한 소망에 사로잡힌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데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반대로 압도적인 현실로 인식되던 것이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뒤편에 놓인, 틀림없는 또 하나의 현실, ‘낮별’은 그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비유였다. (16쪽)
요네하라 마리는 참 많은 글들을 썼고 많은 에세이를 출간했다. 그녀의 글들은 유쾌하지만 깊이가 있고, 지적이지만 재미있고, 소소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녀만의 시각으로 다르게 보기를 통해 특별해지고, 블랙유머를 즐기고 냉소적이지만 그 안에 따뜻함이 담겨 있다. 2006년, 요네하라 마리는 5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난소암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고 끈임 없이 글을 썼다. 현실에 존재하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은 밤별보다도 더 밝은 낮에 뜨는 ‘낮별’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 자신이 글을 쓸 때, 다른 이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깨닫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태양의 빛에 가려져 영원히 하늘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낮별을 발견해 내고자 했던 요네하라 마리. 별은 어떤 순간에도 하늘에서 사라지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너무나 밝게 빛나는 낮별을 요네하라 마리는 글을 통해 그 존재 또한 하나의 현실이며 실재임을 알려주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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