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와의 첫 만남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윤주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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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은 때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비전을 찾기가 어려워 개종을 생각했고, 바쁜 생활에 치이니까 하느님과의 소통 시간이 줄어들면서 마음이 식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도서는 오히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여러 가지 영적 체험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제야 저는 제가 거쳐온 본당의 사제께 가르침 받은 훌륭한 주님의 말씀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제일 뿐만 아니라, 그 누구나의 얼굴 속에서 예수 그리스를 찾아내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아주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게다가 성탄 전야에는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아기 예수님이 모셔져 계시고, "예수님께는 내 마음이 바로 성소이자, 교회다."라고 말씀하신 가르침도 생각났습니다.


저는 늘 이미 장성한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 가르침을 받고 싶은 제자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아기 예수님도 역시 교회이십니다. 장성하기 위한 긴긴 시간이 필요하지요.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걸음과 말을 지금부터 천천히 배울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부딪힌 교회와의 충돌은 어린 예수님의 미숙함으로, 제가 실망하고, 절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집트 속담이 있습니다. "아침에는 4개 낮에는 2개 저녁에는 3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저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걸어갑니다. 아기 때는 손과 발을 이용해서 4개로 걷고, 자라서 청년이 된 우리는 두 발로 걷고, 노인이 된 사람들은 지팡이로 땅을 짚고 다니니 세 발로 걷습니다. 그러나 저는 네 다리로 걷고 싶습니다.


영적인 제 얼굴이 심하게 망가졌습니다. 꼬집혔고, 얻어맞았습니다. 피와 상처가 흐르는 가운데, 눈은 벌겆토록 멸시와 조롱, 미움과 불신들로 분노해 보입니다. 아, 이것은 절대로 사람이나, 천사의 얼굴이 아닙니다. 제 영혼이 악마와 비슷해져 갈 때, 그것을 막기 위해서 이 얼굴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나 봅니다. 그럼에도 이 도서에서 수록된 마지막 기도서를 읽으면서 주님께로 마음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영혼의 얼굴이 아파서 더러움을 씻는 세수도 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저는 아기들이 생각할 수 있는 생각, 어쩌면 '우정'이 아니라 '오해'의 이름인 대인관계로부터 해방을 원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미성숙한, 비 양심적인 생각을 꿰뚫으시어, 그 죄를 쉽게 용서하지 마시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주셔서, 스스로 반성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고백할 때, 무릎을 꿇고, 제 스스로 하느님 아버지의 앞에서 조용히 죄를 고백하길 희망합니다. 뜨거운 눈물같이 저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합니다. 12월은 가슴에 붉게 비치는 빛에 집중해서 당신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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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취하여라 - 교부들이 본 아가 가톨릭 성경 학교
안소근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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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를 서평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다가 수줍은 표현들이 많았지만, 언젠가 연인에게 편지를 쓸 때, 한 글귀 정도는 적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태어났는데요. 사랑이란 원래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야 불안감이 사라집니다. "이 여자, 이 남자, 내 거니까 건들지 마!"라고 경고하는 그런 느낌처럼요. 여러분, 아가서 정도의 플러팅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남의 연애편지가 제일 신기합니다. 



"아가의 끝맺음으로, 사랑이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세며, 강물로도 사랑을 휩쓸어 갈 수 없고 재산으로 사랑을 얻을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는 사랑에 대한 아가의 관점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구약"을 이해하기에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큽니다. "아가서"는 구약 중에서 술술 읽히는 편이긴 하지만, 노골적으로 표현된 사랑에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그 불편한 마음은 어디에서 들어온 감정일까요? 저는 진솔하게 성찰해 봤습니다.



그 감정은 제 안에서의 사랑이란 감정을, 연인에게 사랑한다며 매일 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타인에게 들키기에는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사랑의 감정과 사랑을 고백할 때의 언어와 행위를 꽁꽁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의 사랑의 언어를 들킨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남편이 여럿이며, 정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크게 낙인 받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경 책은 우리에게 필요한 금욕을 가르쳐야 하고, 교과서처럼, 교양서처럼, 정숙한 신앙인이 바라는 대로 적혀서, 성스러움을 찬양하고, 숨이 넘어질 듯한 성령의 충만함처럼, 그들만의 커트라인이 구상돼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연인과 성적인 표현을 전하거나, 연애, 결혼, 임신에 관한 인간의 욕구를 강제적으로 부정시키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아! 우리들도 신부, 수녀처럼 살아야 하는가 보다."라고 혼자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의 금욕은 지나침의 행위를 경고하는 차원의 것입니다. 그 이상과 이하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가서"를 읽으면 한국에서 유명한 수필인 <B 사감과 러브레터>가 생각났습니다. 그 책은 노처녀인 사감 선생님이 타인의 연애편지를 몰래 읽고 가슴 설레하는 장면을 목격당해서 수치스러웠다고 적혀진 소설이었지요. 저는 "아가서"를 단순한 성적인 호기심과 신경을 자극하는 음란한 장면이 아니라, "어쩌면, 이 사람이 내 사람일까?"라고 판단할 적에 기준으로 삼아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는 사랑의 편지를 적을 때 베껴 적어도 좋고요.



"아가서"는, 여러 학자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크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육욕을 위해서 쓰인 걸까?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런 의문이라면 "사랑에 취하여라"라는 도서에서 4부로 나뉜 여러 학자의 견해와 연구를 전해 들을 수 있으니 관심을 표현해 주시길 바랍니다.



신앙인은 전부 다 알다시피, 성경 속 내용은 내가 필요할 때, 성경 책을 뒤적거리다가 눈에 들어오는 한 구절이 꼭 있습니다. 물론 그 부분이 "아가서"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중요 기관을 통해서 특별히 공인된 지시 사항이 없다면 더 이상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완전한 경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마르코복음서"를 두고 의견이 분분할 수 없는 것처럼, 색다른 느낌 때문에 의견이 분분한 '아가서' 역시도 사랑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 단지 수줍은 마음입니다. 저는 육욕이 저질스럽고, 죄를 부르는 감정이 아니란 걸 소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아가서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의 분류로, 성적인 에너지라고 말하는 "리비도"와 "교회와 신앙인 사이의 믿음과 헌신"을 한꺼번에 바라는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두 가지의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는 이유가, 신앙인들의 건전한 사랑과 언어를 강조하는 바가 아닐는지,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성'의 교과서가 아닌,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교회, 그런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서 아가서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사랑에 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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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일기 - 홍성남 신부와 함께하는
홍성남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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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이 골고루 발달되지 않기 때문에 내게 부족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정신과, 육체, 영혼을 파괴시키곤 합니다. 위 요소는 인간의 기본적인 골격으로 훌륭한 발달을 위해서 자신을 통제하거나, 보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 도서는 가톨릭 영성의 발달을 위함이지만, 신앙보다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골격을 다져줍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이 책을 체험하고 싶습니다.


이 도서는 가톨릭 영성을 돕고자 저술된 책이자,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훌륭한 일기장이기도 합니다. 책은 우리 인간의 세 가지 골격인 정신과 육체, 영혼을 고루 발달시키기 위함으로 우리가 골고루 발달시켜야 할 4가지의 방법을 기준으로 60일간 단련 시켜줍니다. 우리는 60일간 저자의 지도에 따라서 내 감정과 기분을 표현할 줄 알게 되고, '나'라고 하는 사람의 마음부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영적인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마지막으로 세 가지의 발달을 통해서 일상에 생동감을 불어 넣어 주게 됩니다.


살면서 내 기분이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괴롭다든지, 긴장된다든지, 두렵거나 답답한 감정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한 나머지 모든 불편한 감정을 더러 뭉퉁거려 '스트레스'라고 묶어버립니다. 그러나 다행인 건 고맙다는 감정과 만족스럽다는 감정, 뿌듯하거나, 유쾌한 감정은 잘 파악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역시 외롭다는 감정을 압니다. 그들의 어휘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심심하다"라고 표현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숙한 어른인 우리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어휘를 정확하게 구분 짓기 힘들기 때문에 "이것은 무슨 감정일까?"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아도 됩니다.


저자는 인간이 심리적인 분열 상태를 짚어 이야기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감정의 조화로움이 깨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먼저 정신과 육체, 영혼을 균형감 있는 순서대로 인격, 즉 사람이라는 모양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영성적으로 좋은 말씀을 기대하시면서 종교적인 묵상하길 바라시는 분들께도 분명히 좋은 도서랍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구축시키는 좋은 말씀이 이 책에 담겨 있기 때문에 차근히 60일 동안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꾸준함을 가지고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친밀해지면서 보다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힘쓰고, 그 힘을 통해서 일상을 잘 살게 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얗게 빈 종이를 무작정 던져주면 화가는 즐겁지만, 우리들은 막막합니다. '감정 일기'라는 도서는 충분한 가이드를 제시해서 우리들을 이끌어 가니까 안정되고 편안한 묵상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노하거나 소리 지르면 고해소에 들어가서 잘못을 말해야 하는 종교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기분과 행동, 종교 생활과 표준적이라고 부르는 일상을 잘 살아가도록 가이드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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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조셉 켈리 지음, 안기민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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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가 저술한 수많은 저서들을 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고백록》이라는 책은 순수 철학과 신학에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고백록》은 '루소와 톨스토이'의 모방록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것보다는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수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우수한 평가를 받을 저서는 다시없으며, 지적인 면에서도 '톨스토이'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글의 참고 도서인 《러셀의 서양 철학사 - 저자 버트런드 러셀》의 서적에 따르면 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 서로마 교회의 박사로 불린다고 적혀 있는데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에서 살며, 주교로 일할 때, 큰 전쟁으로 인해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서양 철학사의 급작스러운 발전으로 말미암아, 신진 세력인 '마틴 루서' 세력에의 일부 참고 신학 도서가 되었지만, 가톨릭 신학의 쇠퇴로 '암브로시우스'가 저술한 여러 권의 책과 그리스도교 교리가 쇠퇴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본 도서인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그 평가는 날카롭고, 오히려 비판적인 느낌으로 다가와서, 주인공은 '마니교'에 관하여 오랫동안 신앙이 머물렀던 아쉬움이 있었지만, 모쪼록 아우구스티누스의 방황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누구나에게나 귀감과 교훈이 될 인생으로서 훌륭한 평가와 참고가 됩니다.


젊은 귀족 청년의 일그러진 방황과, 그 시절에 쉽게 오를 수 있었던 성직자 신분이란 급작스러운 신분 상승에 대해 지적받는 의문들과 비판에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업적과 자유로운 생애가 가져다줬던 지식과 신앙의 탐구를 높이 사, 스토아학파와 교부 철학자와 같은 신학자는 다양한 입장에서 인물 탐구를 하고 있습니다.


일생의 반전으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강론들을 통해서 가톨릭의 매료로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물론 다양한 성적 체험과 가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뛰어난 지식과 인품으로 하여금 '히포의 주교'로서 수많은 신자들의 존경으로 하여금, 아주 충분한 신뢰로서 성직자 생활을 이어 갔습니다. 그의 신분 역시 그리스도교인들의 열열한 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고백록》에서 많은 여성들과 함께 교회 활동을 펼친 것에 대한 비판 아닌 비판, 칭찬이라면 칭찬인 평가와, '파스칼'과 같은 신진 서양 철학자들이 신학에게 가지고 있던 종교의 회의감이 진하게 배겨져서,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의 작가인 <조셉 켈리>의 아쉬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플라톤'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초기 시절의 주인공은 철저한 '마니교' 교리의 탐닉으로,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저술할 때에도, 교회법으로 인준하여 사용이 가능한 신중한 단어 선택과, 신을 표현할 때의 표현, 신앙인들을 표현할 때의 표현을 가려서 표현했으며, <수사학>으로 신학을 펼칠 수 있던 환경 때문에 보다 자유롭게, '플라톤'처럼 수려하고 화려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 그리스도의 정의에 관해 참고했으며, '플라톤'이 내세운 내세의 삶에 대해, 깊이 집중했던 젊은 시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혼 불멸성과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신학을 증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 노력했던 흔적이 남아 있어서 흥미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는 '암브로시우스'에 관하여, 제게도 다양한 감정과 지식의 전달에 대한 기대를 충족 받을 수 있었는데요. 다만 주인공은 누군가들에게 지식에의 존경과, 성직자로서의 사랑을 기대하기보다 진리를 탐구하고, 미지의 세계인 천상 세계의 일을 학문으로 다가와, 그 이전 시대에서 사랑받는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훌륭한 성인으로서 그리스도인과 지식인들에게 지지 받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도서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바라보았고, 정직한 평가를 한 것으로 큰 기억을 남깁니다. 그를 우수하게 평가하고, 지지하기 위해 다양한 교재들로 조사한 정성들도 오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술한 다양한 서적들이 참고되어 있으니까, 많은 독자께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은 어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무엇을 더러 말해야 할까?" 생각에 빠진 채로 감상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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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 굳건히 머무르십시오
요셉 라칭거 지음, 방종우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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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의 야훼,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소통을 자주 하신 것으로 살펴 보입니다. 때로 우리들의 죄가 지나칠 때, "나는 몹시 가슴이 아프다." 하고 말씀하셨지요. 여러 번의 말씀 끝에 세상의 정화가 이루어졌고, 때에 따라서 세상의 정화란, 인간의 멸망이라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종말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대책은 방공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몹시 가슴이 아프시다는 말씀에 먼저 주목해야 함이 옳은 것은 아닌지요. 저는 슬픈 마음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성경 책은 많은 문학 장르의 집합이라 불러도 좋을 텐데요. 그중에서 예언서의 말씀에는 여러 비밀이 있겠지만, 예언서란, 멸망보다는 정화를 말하고, 정화보다는 평화를, 평화보다는 사랑을 말해야 함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기본 중에 기본을 찾고 있고, 그 기본이라는 지혜라는 것은, 그날의 내 기분과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순수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절대적이어야만 합니다.


옛적에 아담과 하와와 함께 산책 가시자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던 말씀이 그립고, 이제 "사람아, 너 어디에 있느냐?" 하고 부르셔도 대답 못할 죄가 나이만큼 많아서, 저는 죽음 이후에 보내질 곳에 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자기 의지대로 지은 죄인 허물과 수치심으로, 밝혀지는 잘잘못의 고문을 당할 때, 마치 뜨거운 인두를 보면서 소스라치게 겁먹도록 살지 말고, 지금부터는 원망이나 저주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어두운 밤에 달의 힘으로 이끌린 바다의 썰물처럼, 전부 쓸고 가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도서에서는 중요한 교리의 사안을 가져다 놓고, 유사 종교의 종교인들과 대담을 통해서 통합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채택된 교리를 가지고서 종교의 전교가 이루어져 일치 단합을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신학의 배경지식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으련만,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이것을 '모르겠다.'하고, 미지의 세계라는 열등감으로 나 몰라라 할 문제가 아니라, 이 분야에서도 '관심을 가지자.'하는 능동적인 움직임도 필요하겠다며 생각합니다. 종교란, '전교'가 최고의 가치를 가진 종교적 힘이다. 싶은 오해보다 고도의 진리를 가지고 논의하고, 채택되거나, 버려지는 법들이 많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름도 모를 신학자, 대사제와의 담화 내용을 읽으면서, 저는 대체로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고차원적이다 싶을 만큼의 어려운 질문 같은 것으로, 인간의 생과 죽음에 대한 정의, 미사와 제물, 제사를 지낼 때의 예식 거행 방법 및 방식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인가?"에 대한 꾸준히 논의되는 이야기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서서히 고찰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우리들이 금송아지를 모아서 부두적인 종교의 힘을 조금이라도 덜 바라지 않을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종교적 행위를 취하는 걸까요? 저도 이 도서를 읽으면서, 이렇게 어려운 교회의 일치 단합에 대해서 생각이란 것을 해봤습니다. 가톨릭과 유사한 종교들과 함께, 단일한 교회, 단일한 교리를 확정 짓는 일이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유대인에게는 필요 없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와 유대인 대학살 등에 관한 담론에 집중해 보는 것도 아주 훌륭한 종교적 활동임이 될 것이라고 힘을 주면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몰라도 되는 교리와 교회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눈이 그렇게 확장될 수 있게 되기를 이 도서를 통해서 빌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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