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쇼핑을 하고 돌아오니, 우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동안 소비를 너무 자제했나. 아하, 말을 건네는 걸 싫어하는 노인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우울증은 수용성이어서 샤워를 하면 좋아진다던데,
아무래도 금용성 같다. 돈을 써야 좋아진다.

정하가 도쿄에 왔다. 연휴에 연차휴가를 붙여 써서. 아침에 헤어지고 저녁에 만나도 반가운 자식인데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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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임시방편으로 일단 붙이고 다니던 얼굴이 그때는이미 진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여행하며 체험한 갖가지 일이가는 곳마다 마음을 스쳤던 색색깔의 생각이, 희망이며 슬픔이며 동경이며 실망의 조각조각이 그녀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풍요롭고 생생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그녀 본래의 얼굴 외에 무엇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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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해 깨달은 사실이 있어, 보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다 나를 돌봐주려고 하잖아. 그런데막상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실제로 아는 사람은 넘쳐나도 내게 신경 써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

"만약에 된다면?" 내가 물었어. "정말 과거로 돌아가 바꿀 수있다면 뭘 바꾸고 싶어?"
지아나는 고개를 돌리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비유하자면 태피스트리에서 실한 올을 뽑아내는 거잖아. 그러다 전체가 다 풀리면 어떡해." 지아나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 "나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전부 내가 가야 할 곳

으로 데려다주는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 그게 운명이든 신이든." 지아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계속 말했어. 
"내가 뭐라고 바꾸겠어. 아직 다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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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웃음, 입안에 감자가 가득한 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는널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그 전에 너무 긴 터널을 건너왔기 때문에 지금 이런 평범한 순간도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그러다가 멈췄던 시간을 깨고 네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지. 네 손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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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의미 없는 대화라도 두자와 새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마음을 나누었다. 그 사소한 말들의 무게가 두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발목을 붙잡았다.

시집오는 날 엄마는 나더러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새인생을 살라고 했다. 좋아진 세상도 없고 새 인생 따위도없다. 좀 덜 힘든 날과 좀 더 힘든 날이 있을 뿐이다. 딸도, 며느리도, 엄마도 되어본 엄마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괜히 더 서럽게. 정말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헛된 기대만 잔뜩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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