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무작정 그려서는 안 되며, 언제나 생각하면서, 의심하면서 그려야 한다. 잘 그리기 위해서 화가는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그의 그림이 그가 무엇을 봤는지를 설명한다.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봤는가? 앞장에 나왔던 관찰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면서, 받아들이면서, 내부에 있으면서, 혹은 동떨어져 한 번쯤 의심해보자는 것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조차도.
의심하지 못하면 자기 생각과 언어를 갖기 어렵다. 자기 그림을 그리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 P170
또는 나는 저렇게 그릴 수 없을거야. 작가가 될 만한 사람들은 따로 있어. 나는 특별하지 않아. 연습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 않을 거야.
정말 그럴까? 의심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려보길 바란다. 정말 그런지, 당신의 눈으로 한번 확인해 봐야 한다. 누군가는 당신을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사실일까? 그게 당신의 전부일까? 내가, 혹은 타인이 대상을 이해했다고 착각한 것은아닐까?
이것만큼은 오해와 이해의 잣대에서 벗어나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당신은 뭐든 할 수 있다. 이 작은 사실만 알아도 조금 더 용감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용기가 삶에 큰 힘이 된다. - P174
-피드백- 피드백에 관한 인상적인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입시 미술학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제는 서울대 기출문제 중 하나로, 해산물 파스타 패키지를 그리는 것이었다. 다들 늘 해왔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그림을 완성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종이를오려서 각자 패키지를 만들어보라고 시켰다.
종이를 자르라고요? 어, 만들어봐. 칼 선이 다 있잖아.
나를 포함하여 다들 당황했지만 더듬더듬 종이를 오려서 상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완성된 패키지가 책상 위에 놓였다. 항상 평면으로 된 그림을 그리다 갑자기 이렇게 디자인을 하라고 하니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만들어 놓으니 제법 그럴싸해서 깔깔대던 중, 선생님은 가만히 테이블을 둘러보다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너희들이 사고 싶은 디자인 앞에 줄 서."
아, 나는 이 순간의 절망을 평생 잊지 못할것이다. 내 그림 앞에 몇 명이 서든, 내가 누구의 그림을 선택하든, 이렇게 선택을 받는 것 자체가 몹시 불편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제발…… 하면서 머리를 떨어뜨렸던 기억이 난다.
기분을 견디기가 어려워 그 순간을 잠시 도려내고 싶었다. 친구들도 나랑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다들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다 이내 그림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당시 반에는 4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3개 정도의 디자인 앞에 줄을 섰다. (다행히 그중 하나가 내 것이었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입을 뗐다.
"어때? 그림이 많다고 고르기 어려울 것 같아? 봐봐, 너무 쉬워. 입시장에서도 마찬가지야. 너희가 앞으로 뭘 하든, 거기서 살아남는 사람은 소수야. 너희도 이제 곧 고3인데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 P178
피드백은 그게 어떤 형태이든 우리에게 너무도 확실하게 와닿는다. 그렇기 때문에 피하고 싶고,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사람들의 반응이 대개 몹시 솔직하다는 것이다. 다들 두루뭉술하게 숨기려고 해도 잘 숨기지 못한다.
만약 그림이 별로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의견이 한둘이 아니라면, 안타깝게도 정말로 그림이 별로일 확률이 높다.
사람들이 몰라봐 주는 것 아닐까요? 안타깝지만 아닐 확률이 높다. - P179
한번 당신의 그림을 남들에게 보여주자. 사람들이 당신의 그림 앞에 줄을 설까? 줄을 서는지 안서는지보다 그걸 확인해 볼 수 있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
아무도 줄을 서지 않았을 때, 스스로 뭐가 문제인지 되짚어 보며 다시 그림을 그리고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는 마음의 맷집이 당신에게는 있는가?
사실 이게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 더 필요한 능력이다. 그 맷집만 있다면 10년이고 20년이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나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 P179
…… 아무튼 그렇게만 생각된 채 잊힐수도 있겠구나. 잠시 서글펐지만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절대 이대로 잊히지 않을 거야. 모서리를 털고 일어나 세수를 했다. - P183
-공언- 당신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그림을 그리는 이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다녀야 한다. 내가 요즘 떠들고 다니는 소리가 하나 있는데, 바로 부자가 될거라는 말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인데, 나는 내가 부자가 될 것 같은 강한 확신이 든다. 그냥 내뱉고 다녀서 그렇다.
자신감이 없으면 말로 내뱉을 수도 없다. 반대로 말로 내뱉으면 자신감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니까 떳떳하게 나는 화가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길 바란다.
꼭 말이 아니어도 좋다.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에서는 보여주는 것이 곧 언어이기 때문에, 외국어를 잘하지 않아도 된다. 어찌나 편리한지.
팔로워가 5년 동안 겨우 600명 남짓했던 인스타그램 하나를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 그림을 올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내가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 이라고 인지했다.
그렇게 기억되는것이다. - P184
몰래 숨어서 연습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잘 그려서 깜짝 놀라게 하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마라. 자연스럽게 항상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까지 남들에게 다 보여줄 것. 그것이야말로 강하고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방법이다.
‘작가가 되는 것‘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작가로 불리는 것‘은 남들의 기억에 남아야 한다. ... 당신이 그저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만족한다면 남들에게 그림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나를 설명하길 기대한다면, 그림을 보여주고 공언해라. - P185
물은 참 신기하다. 낯선 사람에게는 숨 쉴 수 없는 공간이지만, 적응한 이에게는 더 멀리 부드럽게 갈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이 된다. 밖은 시끄럽고 소란한데 수영장에서는 거품 소리만 들리며, 푸른 타일과 그걸 가르는 내 손끝이 뚜렷이 보인다.
처음엔 물이 나를 밀어낸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내가 물을 밀어낼 수 있게 된다. 저항을 도구로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저항을 만난다. 늘 나를 밀어낸다는 기분이 들고 나만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서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이용할 저항이기 때문이다. - P196
모든 고통을 한 몸에 받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저항을 최소화하면 더 쉽고 부드럽게 나아갈 수 있다. 우리를 괴롭히는 어떤 일들과 사람은 미련없이 흘려보내야 한다. 마치 몸을 유선형으로 만들어 물결을 가르는 것처럼 말이다.
수영에서는 필요한 저항과 불필요한 저항을 구분하여 이용한다. - P197
태어난 것에 의지가 개입할 틈이 없었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릴 것.
태어난 후의 삶은, 특히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은 모든 것이 ‘선택‘에 달려 있다. - P202
모두가 여러분을 속이려 들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 안정적인 직장에서 월급 받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면 인생이 탄탄대로 꽃길일 거라고.
아니다. 지금 내가 대기업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힘주어 말할 수 있다. 속지 마라. 대기업에 다니고 결혼하는 것이 당신의 진짜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그리고 싶을 때에 아무런 그림이나 그리고, 쓰며 살고 싶다. 돈도 적당히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대기업을 다니는 일과 무슨 상관인가. - P203
예전에는 괜찮지 않았는데 지금은 남들이 다 나처럼 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다. "뭐, 그럭저럭." 이런 이방인의 기분을 참을 수 없어서 안정에 집착했다.
매달려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영영 이방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나는 오히려 돌아와야 했다. 나에게 말이다. - P205
내가 진짜 안정감을 느끼는 때는 내가 나라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예민하고 우울한 내가 싫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을 때, 친구는 내가 나여서 그래도 된다고 말했다.
그 어떤 좋은 회사나 공간에 머물 때보다도 큰 안도를 느꼈다. 진짜 당신이 안정을 느끼고 싶다면, 당신에게 안정을 줄 외부세계를 탐색하지 말고 내부로 시선을 돌리길 권한다. - P205
뭘 그릴지 모르겠으면, 우선 내가 뭘 그리고 싶은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가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건 타고난 나의 시선을 인지하는 일과 같다. 나를 오히려 멀리서, 남을 보듯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남 눈치 봐왔던 만큼, 아니 그것의 배로 자신을 살펴라. 그럼 굉장히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당신은 무척 이상한 사람이라는 사실말이다.
당신의 이상함을 잘못으로 치부하여 고치지 말고 그대로 바라보길 바란다. 모두가 깎아내고 지적하는 부분, 그 뾰족함에 주목하는 것이다. - P206
타인의 시선과 내 시선을 두루 갖출 수 있는 것. 둘 중 더 어려운 것은 내 시선을 수호하는 일이다. 왜냐면 항상 사회는 당신을 교정하고 싶어 하니까.
그림을 고쳐달라고 남들에게 말하는 일을 되도록 삼가라. 대신 당신이 봤을 때 좋아 보이는 그림들을 찾아라. 그것들이 왜 좋아 보이는지 이유를 스스로에게 계속 되묻길 바란다.
그런 질문들이 거듭되면서 비로소 대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린다는 것은 사실 90퍼센트 이상이 보는 일에 달려 있다. - P208
그림이 무섭다는 건, 간단하게 말하자면 스스로에게 기대치가 높다는 의미다. 나도 이것을 경험했고, 현직 작가도 그럴 것이며, 혹은 그림이 아닌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느낄것이다.
뭐든 욕심이 나면, 내 손이 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 게 실망스럽고 싫어진다. 실패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실패를 아예 안 하려고 시도조차 안 하게 된다. 자신의 기대를 외면하는것이다. - P211
그렇다면? 그림 연습을 안 하니까 그림 실력은 제자리고, 불안함만 커진다.
아, 나 그림 그려야 되는데…… 그런데 무서워서 못 그리니까, 뭔가를 열심히 찾아볼 것이다.
그럼 여러 가지 방법이 나온다. 크로키를 해라, 도형화를 해라, 모작을 해라……… 결국 그리라고 말한다.
근데 그냥 그리라고? 그냥 그리는 게 어려운데 말이다! 그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 P212
나도 겁이 많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아주 잘 안다. 그래서 해결책을 고안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겁내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10가지 방법. [212p ~ 220p]
1. 겁이 날 때, 그때야말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가장 좋은 때다. 2. 종이에 아무 선이나 긋고 시작한다. 3. 쉬운 것부터 그린다. 4. 지우개를 쓰지 않는다. 5. 지우개를 쓴다. 6. 보정,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7. 나 하나도 안 무서워, 스스로를 세뇌한다. 8. 망친 그림은 혼자 간직한다. 9. 끝까지 완성하도록 한다. 10. 언제나 모든 그림이 처음 그리는 그림임을 기억한다. - P212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편지 중 이런 말이 있다.
만약 가슴 안에서 ‘나는 그림에 재능이 없는걸‘ 이라는 음성이 들려온다면 반드시 그림을 그려보아야 한다. 그 소리는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잠잠해진다. - P213
예전에 오은 시인의 강연을 들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있다.
머리를 싸매며 창작을 하는 오은 시인에게, 어머니께서 "너는 시를 10년을 넘게 썼으면서도 시 쓰는 게 어렵니?" 라고 물었다.
이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머니, 저는 시를 10년 넘게썼지만 이 시는 처음 쓰는 시예요." - P220
우리 모두 그림을 그린 지는 오래됐지만, 그럼에도 그림이 두려운 이유는 지금 그리는 이 그림이 처음이기 때문이지 않은가. 몹시 당연한 일이다. 나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어도 계속 두렵겠구나. 그리고 누구나 두려워하면서 창작을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두려움이 부끄럽거나 하찮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울 정도로, 욕심이 날 정도로, 덜덜 떨릴 정도로 내가 그림을 잘하고 싶고 사랑하는구나. - P221
생생한 슬럼프의 터널 안에서 슬럼프에 대해 글을 쓴다. 뭐라도 써야하는데 별로 떠오르지 않고, 이전에 써둔 글도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게임에 빠져서 툭하면 졸리니까 게임 한 판만 하자, 하면서 일들을 미뤘다.
그 대가로 어떻게 되었는가? 글은 단 한줄도 쓰지 못했고 게임 레벨만 높아졌다. - P223
신기하게도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다른 일을 더 열심히, 흥미롭게 하게 된다. 지금의 나도 어쩌면 수많은 일들로부터 도망치면서 이만큼의 내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도망이 무조건 나쁜 일은 아닌게, 영감은 도망친 일에서 발견된다. - P224
아무리 두려워도 저자가 되는 멋진 미래가 나로부터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참에 슬럼프의 생김새나 한번 묘사해 보자. 이 녀석은 몰래 온 손님이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아차, 시간만 허비했구나‘ 자각하게 된다.
눈을 내려 발밑을 바라보면 두 발이 진흙에 질퍽질퍽 빠져 있다. 이런때에는 어쩔 도리 없이 단 두 가지의 선택지만 갖게된다. 진흙에 계속 있든지 아니면 빠져나오는 것. - P224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냅시다.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중 - P227
애초에 이 책을 그림 그리는 순서로 구성했는데 슬럼프는 정말 딱 이 지점 즈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게 정말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걸 겪었다면 당신은 뭔가에 진심이라는 뜻이고, 나 또한 해결 방법을 알 수 없어 힘들지만 그래도 발버둥 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단지 이것이다. 슬럼프를 겪고 있는가? 나도 지금 그렇다. 당신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위안이다. - P228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연필 조각과 손끝에 묻은 흑연, 지우개 가루, 의미가 새겨진 종이 한 장, 약간 빨개진 손가락.
무엇이든 그린다. 그렇게 잔뜩 흔적을 남긴 다음에 잔여되는 것은 그 다음 종이, 백지다.
그게 아마 그리기의 마지막 단계가 아닐까? 연결을 염두에 두는 것. - P231
예술은 장면마다 나누어진 사진이 아니라, 필름과 같은 하나의 영화가 아닐까. 삶에서 상영을 멈춰서는 안 된다. - P231
훗날 후회하지 않을 말들을 적으려고 노력했다. 내 목표는 언제나 전체이용가다. 누가 봐도 이해할수 있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들이 좋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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