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여행길을 들뜨게 하는 노래는, 음악가들이 함께 여행
하는 TV 프로그램에서 부른 노래다. 따라 부르노라면 그들과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 즐겁다. 최근에는 <이타카로 가는 길>에서 이홍기, 하현우, 윤도현이 함께 부른<풍선>이 우리 차에서 가장 핫한 곡이다.
...
음악이 없다면 낯선 타지에서의 두려움과 떨림, 떠나서 머무르고 되돌아오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그 피로를 어찌 덜어낼 수 있을까. 학회 참석차 타국에 머물게 되면, 나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음악을 많이 듣는다. 시차의 피로, 발표할 
자료 중 행여나 뭐라도 빼먹은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 서로 
다른 나라에 살기에 학회에서나 만나게 되는 공저자들과의 회의를 앞둔 긴장감, 향후 함께 일할 기회가 있을지도모를 잠정적 
공동연구자를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감 따위와 맞서려면 이어폰이 꼭 있어야 한다. - P255

천문학자들은 우주에 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게다가 달 과학을 한다니, 살아생전에 못 간다면 죽어서 뼛가루
라도 달에 뿌려지길 바랄 사람이 아닌가! 

흠. 뼛가루가 되어서라면 모를까 살아서는 가고 싶지 않다. - P256

우주에 관한 수많은 노래 중 내가 좋아하는 것은 메이비의 
<어 레터 프롬 에이벨 1689> 라는 곡이다. 에이벨은 은하단을 
조사하고 목록으로 만들었던 천문학자의 이름으로, 그가 남겨둔 은하단 목록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에이벨 1689는 에이벨 목록에 올라 있는 1689번째 은하단을 
뜻한다. 처녀자리 부근에 있는 이 은하단은 지구로부터 대략 
22억 광년 떨어져 있다. 1광년은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이고, 빛은 우주에서 가장 빠른 신호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에이벨 1689의 사진은 사실 22억 년 전의 모습이고 지금쯤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P257

문자도, 편지도, 수신자에게 도달되기에는 너무 먼 곳이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깉은 지구상에 있어도 문자를 보낼 수 없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하물며 에이벨 1689만큼 쩔어져 있다면 어떨까. 

아득히 먼 그곳에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편지는 아무리 일찍 부쳐도 이미 늦었다. 그래서 가슴이 아리다. - P258

 2024년 다시 달로 향할 미국의 우주비행사는 BTS를 들으며 
우주를 항해할 예정이다. 우주에서 그들이 떠나온 지구를, 
그 안에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 모두를 돌아볼 것이다.
지구 밖으로 나간 우주비행사처럼 우리 역시 지구라는 최고로 
멋진 우주선에 올라탄 여행자들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의 
생이 그토록 찬란한 것일까. 
여행길에서 만나면 무엇이든 다 아름다워 보이니까. 손에 무엇 
하나 쥔 게 없어도 콧노래가 흘러나오니까.
- P259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 선장은 착륙선의 사다리를 타고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디면서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 
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곳의 환경을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낯선 땅의 흙과 돌을 채집한 두 사람은 다시 달 궤도로 올라와 사령선과 재회하는 데 성공했고, 세 사람 모두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같은해 우리나라에는 대한항공이라는 회사가 생겼고, 
MBC 방송국이 개국했다. 그리고 삼선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폴로 11호가 성공적으로 달에 다녀온 지 
넉 달 만에 아폴로 12호의 달 방문이 또다시 전 세계에 생중계됬다. - P260

우주경쟁시대는 2차세계대전 종결 이후 시작된 ‘우아한‘ 종류의 
전쟁에서 촉발되었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한 국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려는 정치적 목적은 희미해지고, 
지구 밖 우주 공간의 매력에 푹 빠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우주라는 대자연을 탐구하려는 과학적 목적이 더 짙어졌다. 

미국과 소련은 달뿐 아니라 여러 행성에 수많은 탐사선을 
보냈다. 어느샌가 유럽도 합세했고, 90년대 들어서는 일본이, 
21세기에는 중국, 인도, 이스라엘이 우주 탐사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 흐름에 함께하지 못했으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우주 탐사 자료는 외국산이다. 
우주를 탐사하는 과학자들의 전통은 너그럽다. 통상 1년 전후의 독점 기간이 지나면 관측자료의 대부분을 공개한다. 탐사에 참여하지 않은 동방 어느 작은 나라의 대학원생도 인터넷으로 자료를 내려받을 수 있다. 모두 남의 나라 국민이 낸 세금으로 남의 나라 과학자와 남의 나라 기술자가 이뤄낸 성과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다. - P261

나를 어필하고 각인시키려면, 그 대상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자들이는 내 또래든 간에, 나는 놀랄 만큼 뛰어난 대학원생 이거나, 독특한 관측자료를 손에 쥐고 있거나, 특별한 관측장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평범한 대학원생이었고, 자료 독점 
기간이 지나 일반에 공개된 자료를 활용했다.  - P263

미국의 과학자들이 미항공우주국이라는 이름과 그 화려한 우주 탐사 이력에 끝없는 자부심을 드러낼 때, 나는 그 영광을 함께 
실감할 수 없었다. 아폴로 우주인의 달 착륙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던 시절은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나는 우주 사진이라면 
과학 잡지와 인터넷에서 질리도록 볼 수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학회에서 우주탐사선이 막 보내온 새로운 관측자료가 발표될 
때, 할리우드 영화 관객처럼 흥분하고 감동하는 타국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나는 어리둥절하곤 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달과 행성을 탐사하는 것은 그들에게 국가적 사업이었고, 어쩌면 과학 이상의 의미가 더해져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이나 일제강점기 시절 건축물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해 학문적 흥미 이상의 특별한 애착과 긍지를 느낄 것이므로.

- P264

행성 탐사를 해본 적 없는 국가의 행성과학자로서 갖고 있던 
그 자격지심과 부채감을 어느 날 입 밖으로 내보이고 말았다. 
한국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유독 내게 다정히 대해주고 
지지해주는 미국 학자에게였다. 내 얘기에 그는 조금 놀라는 듯
했다. 한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에게 한 번 더 물었다. 그와 나의 공동연구자 중에는 옛 소련
에서부터 활동해왔던, 지금은 우크라이나인이 된 원로 과학자가 있다. 우주경쟁시대 초반에는 소련이 늘 미국보다 한발 앞서 나갔는데 아폴로 우주인의 달 착륙으로 인해 상황이 역전 되었을 때, 그때도 달 과학자였던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 얘기라면 이미 나눠본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사람을 달에 보내서 기뻤다고 했단다. ‘우리‘는 미국인도, 미항공우주국 
관계자도 아닌, 인류 전체였다. 
이번엔 내가 조금 놀랐다. 과연 못난 자격지심 이었구나. - P265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
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 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 P265

우리나라도 이제 달 탐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한국형 달 탐사선이 얻은 관측자료를 전 세계와 나눌 차례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성과는 우리나라가 혼자서만 잘해서 
얻은 것은 아님을 생각한다. 

유사 이래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교육받고 서로의 연구를 공유
하고 참조해가며 쌓아온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지구상의 전 인류에게 ‘우리‘ 관측자료를 내어 놓을 그날을 기다린다. - P266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과학자 얘기가 나왔다. 우리 어릴 적에 
장래희망에 과학자나 선생님, 대통령 같은 전형적인 단골 답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더라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학부모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요즘 세상에 과학자가 어디 있어요?"
...
"과학자는 다 회사에 있지. 회사에 있는 사람들이 과학자지 뭐야 요즘은." - P267

대기업에서 스마트폰에 신기능을 불어넣는달지, 둘둘 말아 보관할 수 있는 TV를 만든달지 하는 사람들이 과학자라는 말에 다른 이들도 별 흥미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과학자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부터 파생된 
생각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것은 나뿐인 듯했다.

생각해보면 그 말에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 구석진 골방에 들어앉아 아무도 알지 못할 문제로 고민에 빠지곤 하는 괴짜만을 과학자라고 부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과학자들은 우리 삶의 다양한 부분에 스며들어 있다.
- P268

과학자는 무엇이고 연구자는 또 무엇인지, 직업 과학자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 지금도 그건 내게 아직 어려운 문제다. 
학생일 때는 어른들이 물어다주는 주제와 소재에 의존하면서 
대학원생도 과연 연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자문했다. 
그땐 자신이없었지만 대학원생들과 함께 일해본 경험이 쌓인 
지금은 그렇다는 걸 안다. - P269

과학자가 하는 일 중에 내가 아직 잘 모르는 것이 또하나 있다. 
과학자도 에세이를 쓰는가 하는 것이다. 책을 쓰는 과학자도 
있지만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책을 쓰더라도 대개는 전문적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책이나 대학의 교재를 집필한다. 
...
그래서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체 어떤 책을 
쓴다는 거야?‘ 원고를 쓰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질문을 
오래도록 품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책장에 꽂힌 김중혁 작가의 책 제목이 눈에 들어 왔다.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고, 삶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안갯속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글을 썼다. 
그래서 ‘어떤‘ 책이 되긴 되었다.
- P270

요즘 세상에 과학자가 어디 있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다시 말하면, 요즘 세상에 과학자는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학계에서 권위 있는 상을 받거나, 최고급 기술을 개발 하거나, 훌륭한 인재를 수없이 길러내는 사람 외에도 다양한 과학자가 있다. 
나중에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특출난 것 없는 연구자, 
특별한 계기나 인상적인 에피소드 하나 없이 과학자가 되어 
그저 그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 그런 평범한 과학자는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 자신과 꼭 닮은, 소소한 에세이를 쓰는 과학자 한 명쯤 
더 있다고 해도괜찮을 것 같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열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계절이 멀어지고 또다시 돌아오는 시간 중 대부분은 글을 쓰는게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이 뭐라도 되었을 무렵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소모되었다. 그렇게 무척 쓸모없었고 대단히 중요했던 열 계절을 
기꺼이 맞이한 끝에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다. 

이 한 권의 책에는 작은 구두점이지만, 
어느 별 볼 일 없는 천문학자에게는 
또하나의 우주가 시작되는 거대한 도약점이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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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션>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동료들과 함께 유인화성 
탐사에 나섰다가 불운한 사고로 홀로 화성에 낙오된다. 참담한 
상황에서도 마크가 유머를 잃지 않으며 오래 생존할 수 있었던 
데는 동료의 개인 물품 속에서 찾아낸 USB메모리 속 음악 파일이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 디스코 음악만 잔뜩 골라둔 동료의 
음악 취향에 질색하면서도 그는시종일관 음악을 들으며 공포와 우울과 고독을 버텨낸다. - P238

미항공우주국이 달로 향하는 우주비행사를 위해 음악 재생목록을 준비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수십 년만에 다시 달에 사람을 보내는 ‘아르테미스 프로젝트‘를 위해 미항공우주국은 
여러 가지 음악을 골라두었다. 선곡 과정에서 지구인들의 추천도 받았는데, 가히 지구 최강이라할 만한 팬덤을 보유한 BTS의 곡이 일찌감치 우주 디제이의 목록에 올랐다. 단순히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아니었다.
많은 후보곡 가운데 <소우주>와 <134340>, 그리고 멤버 RM의 <문차일드>. 이렇게 우주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선택되었다.
<소우주>와 <문차일드>는 제목부터 ‘우주적‘인데 <134340>은 무엇인가. 이 번호는 다름 아닌 명왕성의 또다른 이름이다.
본래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이었다가 2006년 8월에 국제천문연맹(IAU) 투표 결과에 의해 왜소행성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수금지화목토천해‘ 까지 읊은 다음 잠시 숨을 멈추게 만드는 바로 그 명왕성이다. 행성보다 작은 소행성, 왜소행성들은 번호가 공식 명칭이다. - P239

분명 행성이라고 배웠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지를 않나, 
지구의 세차운동 때문에 황도 12궁이 13궁으로 변해서 생일 
별자리가 바뀔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지를 않나, 하늘에 있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줄 알고 이 별은 너의별, 저 별은 나의 별 하며 갖은 맹세를 다 했건만 천상의 세계도 변한다니 이 무슨 
변고인가.

고대의 인류도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해가 이끄는 시간을 따라 생활하고, 별 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달을 눈으로 좋고, 혜성이 나타나면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때도 
명왕성은 제 궤도를 묵묵히 돌고 있었다.
우리가 행성이라 부르든, 왜소행성이라 부르든, BTS가 명왕성의 번호 134340을 노래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우주는 여전히 
자연 그대로인데, 우리가 밤하늘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고, 
교과서의 천문학 단원도 개정을 거듭한다. 대체 행성이란 
무엇이기에 명왕성을 따로 떼어야 한다는 것인가. - P240

‘행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이제 천문학적 정의의 문제를 넘어서,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주제어로도 꽤 잘 어울린다.
...
수성, 금성, 화성,목성, 토성은 맨눈으로도 보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부터인류는 밤하늘에서 별과 행성을 구분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되고 뻔한 개념이었으므로, 행성 개념을 특별히 정의할필요도 없었다. 태양 주위를 돌면 행성, 그 행성의 주위를 돌면 
위성, 위성은 아니지만 행성보다 많이 작으면 소행성, 때때로 
태양 주위로 다가와 먼지와 연기를 흩뿌리며 지나가면 
혜성이었다. 
그런데 관측 기기도 기술도 발전하면서 그런 대강의 분류에 
속하지 않는 예외가 많이 발견되었다. 명왕성 근처에서 비슷한 
천체가 여럿 발견되자 이들의 정체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명왕성을 행성이라고 하자니 그 이웃들도 모두 비슷한데 그중 누구만 행성이고 누구는 아니라고 하기가 애매모호해졌다. - P241

과학기술은 갈수록 더 발전해 앞으로도 명왕성의 이웃들이 더 
많이 발견될 텐데, 2006년에 그 기준을 정하게 되었다. 
태양 주위를 도는 둥근천체 중 궤도를 독점하면 행성, 궤도에 
이웃이 있으면 왜소행성으로 정하면서 자연스럽게 명왕성은 
왜소행성으로 분류되었다. 
명왕성을 발견한 게 미국의 연구팀이라는 사실에 유럽의 
천문학자들이 불만을 품고 행성 명단에서 끌어 내렸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천체를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 일은 국제천문연맹이 도맡아 
하고 있다. 그렇다고 국제천문연맹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고, 발견자에게 이름 붙일 기회를 주며 그 명단을 관리한다. 때때로 전 지구인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기도 한다. 명왕성의 
영어 명칭인 플루토Pluto 라는 이름도 공모전 당선작이다. 영국의 한 소녀가 로마 신화 속 저승 신의이름을 제안했던 것이다. 
내가 지구 밖 우주에 이름을 붙이다니, 그 이름을 전 세계인들이 영구히 부르게 된다니, 과학자들의 논문에도 그 이름이 사용된다니, 그것 참 근사하지 아니한가.
- P242

21세기 들어서는 태양계 안에서보다 바깥에서 행성이 더 자주 발견된다. 지금까지 발견해서 검증도 마친 외계행성이 2020년 기준으로 4300여 개.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발견한 팀에서 붙인 번호로 관리되고 있지만, 
가끔은 공모전이 열린다. 지난 2015년, 14개의 별 주위를 도는
총 31개의 외계행성의 이름을 공모했다. 1차로 받은 여러 후보 
중 몇 개를 추려 2차는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우주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니까 중요한 의미를 담은 것으로
고르게 된다. 보통은 신화 속 혹은 실존했던 인물의 이름을
붙이지만, 물건이나 장소의 이름, 혹은 어떤 추상적인 단어가 
될 수도 있다. 2차 투표에 어떤 후보가 올라왔나 둘러보았더니 
과연 ‘진실‘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본뜬 ‘베리타테Veritate", 
목성의 위성과 토성 고리를 발견했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름 ‘갈릴레오 Galiled‘ 등이 올라와 있었다.
- P243

2019년에 두번째 공모전이 열렸다. 이번애는 이름 지을 대상을 
나라별로 나누어 투표를 진행했다. 우리나라에 배정된 것은 
작은곰자리의 별 ‘8 Umi‘와 그 주위를 도는 행성 ‘8 Umi b‘였다. 
우리나라 천문학자들이 보현산 천문대의 1.8미터 망원경으로 발견한 첫번째 외계행성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특별한 대상이다. 당신의 지갑 속 만 원권 지폐 뒷면에나오는 바로 그 망원경이다. 요즘은 지갑에 현금은 없고 신용카드만 있는 경우도 많은데,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만 원짜리 한 장은 가지고 다니도록 하자.

공모 결과 별의 이름은 ‘백두‘, 그 주위를 도는 행성 이름은 ‘한라‘로 결정되었다.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을 기리는 의미이기도 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뜻이기도 하다. 
백두별까지는 빛의 속도로 520년 정도 가야 한다. 그 주위를 
도는 행성 한라는 목성보다 약간 더 무거운, 목성과 비슷한 가스형 행성이다. 
...
물론 우리가 한라를 무엇이라고 부르는 한라는 별로 신경쓰지 않겠지만.
- P244

우리가 명왕성을 행성이라 부르는 왜소행성이라 부르든 
134340이라 부르든,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따돌림받고 소외당하며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자의 심정을 명왕성에 이입시키려 하든 말든 명왕성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 멀고 어둡고 추운 곳에서, 하트 무늬처럼 보여 지구인에게만큼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얼음평원 스푸트니크를 소중히 품은 채 태양으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중력의 끈을 잡고 있을 뿐이다. 
그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위성 카론은 명왕성의 위성으로 보기
에는 너무 덩치가 커서 위성이 아니라 명왕성과 이중행성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카론 역시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든 개의치 않는다. 

명왕성, 그리고 자신보다 더 작은 여러 위성 친구들과 서로 
중력을 주고받으며 아주 오랫동안 멈추지 않을 자신들만의 
왈츠를 추고 있을 뿐이다.
- P245

팟캐스트에서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말한다. 경유지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짐을 기다리는 동안 읽을 것도, 쓸 것도 없어 
눈멀도록 바다만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커피를 마셨노라고. 
그러다보니 계절이 지나가는 게 느껴지더라고.
나는 그 말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돌려 들었다.
- P246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건 여간 숨막히는 일이 아니다. 
망원경의 시야는 대단히 좁아서, 살짝만 건드려도 망원경 속 
하늘은 저멀리 달아난다. 
공개 관측회에 가서 소구경 망원경으로 뭘 보게 된다면, 부디
두 손은 뒷짐을 지거나 허벅지에 붙여두기를 바란다.
...
통일전망대 쌍안경 보듯이 망원경을 손으로 감싸는 순간,
담당자가 탄식을 하며 당신을 밀어내고 삼 분 동안 망원경을 독점할 것이며 뒤에 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뿜어져 나올 것이다. - P248

처음 뮤지컬을 보러 간 날, 시력도 시원찮은데 주머니 사정까지 시원찮은 바람에 높은 층 비탈 객석에 앉아 거북목을 한 채 눈을 가늘게 뜨고 하염없이 무대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조만간 일층까지 굴러떨어질까봐 신경이 쓰였는지, 
초면의 옆자리 관객이 오페라글라스를 빌려줬다. 
쌍안경으로 보니 배우의 표정은 물론이요, 특수분장으로 만든 상처의 주름까지 보여 과연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P249

대학 1학년이었다. 입학만 하면 별이 무엇인지 은하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배우며 망원경도 실컷 만져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다른 과학생들과 함께 물리 실험, 
미적분학,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공통 과목들로 시간표를 꽉 
채워야 했다. - P250

나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망원경이라는 것을 만져보기는 커녕 가까이에서 본 적도 없었다. 과학 잡지에서본 은하와 성단 사진, "나는 천문학과에 갈 거야" 라며 직접찍은 별 사진을 보내 주었던 중학교 동창, 각자 다양한 방면으로 괴짜였지만 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머금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었던 
고등학교 지구과학 선생님들, 그것이 대학 입학 전까지 천문학에 대해 접해본 전부였다. ‘천문학 전공자‘라는 알량한 이름은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P251

대학에 입학한 뒤에야 별자리 책을 하나 사서, 별을 보기에는 
너무 밝은 도시의 밤하늘과 책 속 별자리 그림을 한두개씩 맞춰 보았다. 그런 내가 그날 자연대 옥상에 누워서 처음으로 돌고래 자리를 발견했다. 여름밤 은하수 근처에 수줍게 빛나는, 꼬리가 달린 다이아몬드 모양의 별자리. 작은방패연 같기도 하고, 과연 
작은 돌고래가 물 밖으로 잠시 뛰어오르는 것도 같은 돌고래자리는 작고 어두워서 도시에서는 한참을 바라보아야 찾을 수 있다.

친구와 대화를 하는 등마는 둥 하며 가만 누워 밤하늘을 보고 
있던 그때, 돌고래가 조금 움직인 게 아닌가! 우리가 있던 곳 
주변에는 멀고 가까운 낮은 산들이 지평선 위로 불쑥불쑥 올라와 있었다. 동쪽하늘에 아주 낮게 떠 있던 돌고래자리가 20분쯤 지나자 조금 더 높아져 아까보다 산에서 더 멀어진 것이 보였다.
...
별이 움직이는 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이니 그 속도는 하루에 
한 바퀴, 360도를 24시간으로 나누면 한 시간에 15도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순한 계산. 천문학을 책으로 배운 내게는 그저 단위 환산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여러 숫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날, 돌고래가 내 마음속에서 뛰어오르기 전까지는.
- P252

내가 고요히 머무는 가운데 지구는 휙, 휙, 빠르게 돈다.
한 시간에 15도, 그것은 절대로 멈춰 있지 않는 속도다. 
별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 눈을 휘둥그레 떴던 밤을 기억한다. 밤도 흐르는데, 계절도 흐르겠지. 
나도 이렇게 매 순간 살아 움직이며, 인생을 따라 한없이 
흘러가겠지. 내가 잠시멈칫하는 사이에도 밤은 흐르고 계절은 
지나간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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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언제부터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을까? 
고인돌에도 별자리가 새겨져 있고,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에도 별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하긴, 별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원시 인류는 가로등도, 상점 간판의 불빛도,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매일 밤 보았을 테니까. 아니, 별이 쏟아질 듯해서 칠흑 같지 않은, 온통 블링블링한 밤하늘을 보았겠지. - P219

다큐멘터리 속 고릴라를 마주할 때면, 고리롱이 고향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의 삶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낮에는 그 우람한 
몸매와 끝없는 용맹의 위엄을 떨치고, 밤에는 설핏 잠을 깨어 
쏟아지는 별을 보았을까. 이따금씩 커다란 유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들어 별똥별이 지나간 
찰나의 길을 따라 허공을 그어보았을까.
나는 그의 말년을 잠시 엿보았을 뿐이지만, 그는 진정 멋지고 
상대에게 경외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최고의 수컷이었다. 
어쩌면 하늘의 별이 되었을, 안녕, 고리롱.
- P225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물결, ‘은파‘는 그런 뜻이다.

푸른 여름의 밤바다 위로 밝은 보름달이 고요히 떠오르면
연인들은 그 달빛 아래에 앉아 달이 아름답다고 서로에게
속삭이겠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달이 아름답네요‘로 번역했다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를 주고받으면서.

- P227

달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나서부터는 달을 바라보노라면 
달이 그렇게 아름다운가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달에는 풍찬노숙의 역사가 담겨 있다. 대기와 자기장에 포근히 
싸여 있는 지구와는 달리, 달은 어떠한 보호막도 없이 따가운 
햇살을 그대로 받아내야 하는 곳이다. 우주에서 날아오는 크고 
작은 돌덩이가 지구에서는 아름다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별똥별이 되어 타오르지만, 달에서는 여과없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힌다. 지금은 그런 유성이 가끔 하나씩 떨어지지만,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면 달은 그렇게 조용하지 않았다. - P227

시작부터 그랬다. 먼 곳에서 날아온 커다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달이 생겨났다. 날아온 소행성도 거기에 부딪힌 
지구의 일부도 산산조각이 났다. 조각들은 멀리 가지 못하고 
지구 주위를 맴돌다가 서로 얽히고설켜 달의 씨앗이 되었다. 
굴릴수록 불어나는 눈덩이처럼 씨앗은 남은 조각들을 주워 
삼키며 커다란 달로 자라났다. 

이번에는 또다른 소행성이 날아와 달에 부딪혔다. 한 개, 두 개, 열개…… 수없이 이어진 충격으로 달은 온통 불덩이가 되었다. 
여러 개의 화산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것처럼 땅 밑 여기저기에서 용암이 흘러나왔다. 소행성들의 대습격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달은 천천히 식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거대한 불바다를 이루었던 용암은 서서히 식으면서 제주도 현무암처럼 검은 땅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달의 바다 unar maria‘라고 부르는 어둡고 평평한 지역에 불지옥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고 나면, 그 무늬를 보고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둥, 
사람의 얼굴이라는 둥, 물 긷는 여인이라는 둥 하며 
낭만적인 상상만 해도되는 걸까 싶을 때가 있다.
- P228

달은 우리 인류의 오랜 벗이었다. 
농업사회의 기본이 되었던 음력, 정월대보름, 한가윗날 밝은 달 
아래 너나없이 손잡고 도는 강강술래, 그리고 수많은 옛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하얀 쪽배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 달에서 떡방아를 찧는 토끼,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불개가 먹었다 너무 차가워 
뱉은 달, 연오랑과 세오녀가 떠나자 사라졌던 달, 노피곰 도도샤 머리곰 비치오시는 정읍사의 달, 산허리를 가득 메운 메밀밭에 
소금을 뿌린 듯 흐뭇한 달빛…… - P228

달에서 살게 된다면 어디가 좋을까? 옥토끼가 사는 앞면이 
좋을 것이다. 
달의 뒷면에는 검은 바다가 없다. 지구에서 보이는 달처럼 
얼룩덜룩한 무늬도 없이 밝은 회색빛의 고원 지대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대충돌 시기에 용암 위를 둥둥 떠다니던 지각이 
보글보글 끓는 찌개의 거품처럼 달의 뒤편으로 밀려난 상태로 
서서히 식어 오늘날의 달 지형이 완성되어서다. 
달의 뒷면에 없는 것은 또 있다. 지구다.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듯이, 달의 뒷면에서도 지구가 보이지 않는다. - P229

달의 앞면에선 늘 지구가 보인다. 하늘의 어느 한쪽에 거대한 
파란 보석 같은 지구가 떠 있다. 지구는 달보다 네 배나 크다. 
다시 말하면 달에서 보는 지구는 우리가 지구에서보는 달보다 
네 배나 큰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지구가 떠있는 하늘을 가질 
수 있다니, 숨쉴 공기도 없고 먹을 유기물질도 없는 척박한 
그곳으로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 든다. 
게다가 달에서 보는 지구는 마치 선반에 올려놓은 오르골 
장식품처럼 달 하늘 어딘가에 떠서 제자리에서 천천히 돈다. 
낮에도 밤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지구의 위치는거의 변하지 
않는다. 달에 집을 짓는다면 지구로 향하는 창을 낼 것이다. 
창문이 곧 생동하는 액자가 될 테니. - P230

달은 우리의 오랜 벗이면서, 자주 이용당하기도 했다. 
냉전시대에는 특정 국가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데 쓰였고, 
과학 목적의 달탐사시대에는 우주와 태양계라는 대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견본으로 쓰였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달을 이용하려고 한다. 달을 중간기지로 삼아 화성으로, 그리고 더 먼 우주로 나아가려 한다. - P231

어느 여름날 경남 김해의 한 초등학생이 메일을 보내왔다.
"달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주로 가려면 정신력도 강해야 하고 신체적으로도 강해야 한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달은커녕 김해에도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면 한낮의 무더위에도 과학 시간을 뜨겁게 달구었을 그 열정이 사그라들어버릴까. 

인류 역사상 달 표면에 발을 디뎌본 사람은 열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1972년의 아폴로 17호를 마지막으로 
‘유인 달 탐사‘는 중단된 상태다.
숨쉴 공기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곳. 설혹 물이 있다고 해도 단숨에 끊어버릴 만큼 뜨거운 낮과 질소도 얼어버릴 차가운 밤이 보름마다 반복되는 곳. 그곳에 가보겠다는 꿈은 이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달에 가고싶다. 그리고 화성에도. - P233

아니, 잠깐. 조금 오래 머무르기에는 화성이 더 나을 수도있다. 
달에서 일교차가 300도가 넘는 이유는 낮과 밤이 각각 보름씩이나 되기 때문이다. 
반면 화성에서의 하루는 24시간 37분, 주당 52시간의 근로
기준법을 그대로 적용해도 될 정도다. 자전축이 25도 기울어져 
있어 지구와 비슷한 계절이 있지만 한 해가 1.9배로 느릿느릿 
흘러가는 곳이라 여름휴가도 19배로 길어질지 모른다. 적도의 
여름 한낮이면 영상 20도, 극지방의 겨울밤이라 봐야 영하 
140도다. 
온도의 범위가 지구에서와 비슷하다면 우리가 지구에서 개발하는 기계장치도 잘 작동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보호장구가 좀더 간단해진다.
- P233

화성사막연구기지는 항공우주 엔지니어 로버트 주브린이 
1998년에 설립한 비영리단체 마스 소사이어티 Mars Society가 기부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주브린은 오래전부터 화성에 갈 수 
있는 유인 우주선을 계획하며 미항공우주국과 협력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화성에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며 천수를 누리거나, 여차하면 지구로 돌아올 방법도 아직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 때문에, 정부기관인 미항공우주국은 유인 탐사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 P234

조금 더 적극적인 유인 화성 탐사 준비대로는 네덜란드의 비영리단체 마스 원Mars One이 있다. 
탐사 로버 rover와 주거용 시설을 미리 보내 거주환경을 갖춰둔 뒤 2026년부터 스물네 명을 화성행 편도 여행길에 보낸다는 
계획이다. 소식을 늦게 들어 지원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사실 마스 원은 화성에 갈 로켓이나 우주선을 갖고 있지 
않아서, 이 계획이 실현되려면 다른 회사에서 빌려와야 할 형편이다. 예를 들면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엑스 같은 회사 말이다. - P235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 일이다. 같은 반 친구가 이웃 도시로 
이사해서 이제 만날 수 없다고 하기에 우리가 놀러 가면 된다고 위로했더니 "하지만 우주선 타고 너무 멀리 가는거 아니야?"라고 했다. 친구가 이사 간 곳은 경기도 화성시.
"아, 그렇구나. 너무 멀어서 못 가겠다" 하고 대충 대꾸했는데, 이제 그 대답은 고쳐주어야겠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정말로 그곳, 화성에서 만날 수도 있다고.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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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는 어둠 속을 고요히 떠돌고 있는 커다란 돌덩이 곁에 라디오를 든 작은 우주선 친구를 붙여주는 것이다. 
라디오는 지구의 신호를 우주선에 전달하고, 우주선이 이 돌덩이에 대해 알아낸 것들을 다시 지구로 송신할 것이다.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로, 소행성의 궤도에 발맞추는 ‘랑데부‘다.

우주 랑데부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고민했던 사람은 아마도 아폴로 11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달에 방문했던 버즈 올드린일 것이다. 그는 달로 향하는 우주선에 탑승하기 수년전부터 랑데부 기법을 연구했다. 지상에서라면 속력을 높이거나 늦추는 방식으로 다른 물체를 따라잡을 수 있지만, 우주에서는 속력을 바꾸면 궤도의 높낮이도 같이 변하기 때문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
버즈 올드린의 랑데부 연구는 인류 최초의 유인 달 탐사에 크게 기여했고, 이후의 우주 탐사 임무를 설계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사람들은 그를 ‘랑데부 박사‘라고 부른다.
- P170

얼마 전, 일론 머스크가 운영하는 회사 스페이스엑스가 민간으로서는 최초로 유인 우주선을 국제우주정거장에 보냈다.
크루 드래곤 캡슐‘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우주선은 
지표면으로부터 400킬로미터 높이의 상공으로 올라가 시속 2만7000킬로미터의 속도로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국제우주정거잘으로 접근했다. 가까워질수록 점차 서로의 궤도를 맞추며 함께 
지구 둘레를 날았다. 성공적인 랑데부가 성공적인 도킹으로 
이어졌고 크루 드래곤이 우주정거장에 연결된 뒤, 19시간 전에 지구를 출발한 우주비행사들은 마침내 해치를 열고 우주정거장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정부 기관이 아닌 민간에서의 우주탐사시대를 여는 순간이었다. - P171

오래전 라디오에서 이런 사연을 들었다.

난 원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학교에 내는 ‘희망직업‘란에 드러머가 없었다. 난 엔지니어라고 썼고 손에는 스틱 대신 펜이 
주어졌다. 그리고 공부도 음악도 어중간한사람이 되어버렸다. 
결국 난 고장난 스피커나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되겠지.

신세한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낭만적으로 들렸다.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으면 덜 성공한 경우를 상상할 때조차 음악에 관련된 장비를 다루는 자신을 떠올리는 것일까? ‘고장난 스피커‘를 고치는 사람이라니, 음악을 사랑하며 실천하는 실로 멋진 방법이다. - P174

우리나라가 언젠가 달 탐사를 하리라는 것은 언젠가 남북통일이 되리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아직 추상적인 미래의 
일이었다.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정부의 ‘우주개발중장기계획‘은 1996년 김영삼 정부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
2000년 이후의 김대중 정부에서도 인공위성 관련 사업에 힘을 실어주었다. 인공위성과 더불어 이를 지구 궤도로 쏘아 올릴 발사체 기술도 착실히 개발되고 있었다. 
‘달 탐사‘가 전면에 등장한 것은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였다. 
2020년에 달 궤도선을 발사한다는 목표가 설정되었다. 아직은 정부 차원에서 논하는 단계였을 뿐, 탐사에 필요한 기술 개발 방안이나과학적 탐구 목표, 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 등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2011년 이명박 정부가 달 궤도선 발사 계획을 2023년으로 
미루면서, 구체적 실현 방안에 대한 논의 역시 시작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유예되었다. 
우리나라도 달 탐사를 하자고 강력히 주장하는 국민이 많다거나, 뛰어난 천문학자가 달 탐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일도 없었다. 
국내에는 달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자연히 그러했다.
그러다가 2012년 말, 우리나라는 갑자기 달 탐사를 준비하게 됐다. 대선을 앞두고 열린 TV토론회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가 달 궤도선 발사를 2017년으로 앞당기겠다는 공약을 내건 것이다.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그는 곧 대통령이 되었고, 그렇게 한국형 달 탐사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 기술적 난항을 겪으며 두 차례에 걸쳐 궤도선 발사를 연기했다.
현재는 2022년 여름에 발사하는 것이 목표다.
- P177

... 공학자들은 부랴부랴 궤도선을 설계•제작했고, 과학자들은 어떤 관측기기를 싣고 갈지 결정했다. 대학에서는 천문학의 다른 분야를 가르치던 몇몇 교수들이 급히달 팀을 꾸렸다. 2017년이 되어서야 국내에서 달 과학 전공으로 첫 박사학위자가 나왔다.

스마트폰이나 신형 자동차 개발이 그렇듯이, 달 탐사에도수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가장 쉽게 생각나는 것은 달 과학자다. 달의 이모저모를 연구할 과학자들과 대학원생들이 달과학의 기초를 탄탄히 해주어야 한다. 
...
과학자들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관측기기를 제작해주는 기업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개별 관측기기들이 부착될 탐사선 자체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공학기술이 실현되어야 한다.
...
발사체 기술도 필요하다.
- P179

...
따라서 훌륭한 공학자가 필요하고, 그들의 이론과 설계를 뒷받침해주는 기술도 실현되어야 한다. 지구에서 탐사선에 명령을 보내고, 탐사선이 보내오는 자료를 지구에서 받을 수 있도록 통신을 담당해주는 팀도 필요하다. 누군가는 탐사전용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누군가는 홍보자료를 만들고, 누군가는 이를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한국형 우주탐사선의 이름과 로고를 정하는 공모전을 진행하는 팀도 필요할 것이다.
나중에 유인 탐사를 하게 되면, 우주비행사는 물론 이들의 건강을 챙길 의사와 헬스 트레이너, 심리 전문가도 필요하다. 우주복을 설계하는 산업디자이너, 이를 제작하는 공장이 있어야 한다. 우주인이 먹을 식량, 달 표면을 탐사할 때 사용할 집게와 가방 따위도 만들어야 한다. 탐사선에 들어갈 전선 하나, 볼트
하나마다 여러 사람의 손길이 거쳐갈 것이다. 수많은 분야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주 탐사에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데, 당장 상업적으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기 때문에 대기업이 돈을 대는 일은 드물다.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러려면 정부에 우주 탐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것이 국가에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비전을 제시해주는 자문단이 필요하다. 
그 조언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드는 전문가, 이를 승인하는 최고
결정권자와 국회, 그리고 그 실무를 담당하는 수많은 공무원이
현장을 방문하고, 공문서를 작성하고, 예산 집행 내역을 들여다
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낸 세금을 기꺼이 우주 탐사에 쓰도록 허락하고, 공감하고, 지지하고,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봐주는 
국민이 필요하다. 당신이 꼭 필요하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우주를 사랑할 수 있고, 우주탐사에 힘을 
보탤 수 있다. 우주를 사랑하는 데는 수만 가지방법이 있으니까.
- P180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과 성운과 은하의 위치가 관측한 
지역마다 다르게 기록된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북극성의 고도가 38도 정도지만, 북극에 가면 
북극성이 고도 90도, 머리 꼭대기에 있다. 적도에서는 북극성이 지평선 부근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느 방향, 고도 몇도에 별이 있다는 기록은 그 지역에서만 
쓸모가 있다. 

대항해시대에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위치와 시간을 알아야했고,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관측하기 좋은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 간다. 심지어 우주에 밍원경을 띄워두기도 하는데, 고도와 방위각으로 천체의 위치를 논할 수는 없다. - P184

초승달은 해를 바짝 뒤쫓느라 초저녁에나 잠시 보였다가 이내 
지평선 아래로 가버린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달은 차오르고, 뜨고 지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 오후에 반달이 보인다면 해와 
한참 떨어진 동남쪽이다. 오른손 방향으로 볼록한 상현달이다. 
보름이면 서쪽으로 해가 질 무렵에야 동쪽에 달이 떠오른다. 
보름달은 해가 없는 동안 내내 밤을 지키다 해 뜰 무렵 
서쪽으로 진다.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은 매일 대략 50분씩 늦어진다. 보름에서 며칠이 지나 이제 왼쪽만 볼록한 하현달은 한밤중에야 잠깐 
떴다가 낮에 진다.
오전에 서쪽에 뜬 반달이 하현달이다. 며칠이 더 지나 그믐달 
무렵이 되면, 새벽녘에야 달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고는 곧 해가 올라오니 낮 동안 보이지 않는다. 
초승달은 많은사람들이 볼 수 있고 상현달과 보름달도 꽤나 
사랑받는다. 그러나 밤하늘에 하현달이 보이는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 
그믐달은 밤을 꼴딱 샌 사람들,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태양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소수의 사람들만 보는 그런 달이다.
- P186

그러나 우리가 수십 년째 외계 생명체를 그토록 찾아 헤매는 
것은 오로지 우주에 대한 궁금증,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탐구심 때문이다. 우리는 관찰자일 뿐, 바깥 천체를 마음대로 
주무를 권리는 없다. 생태계를 위해 어떤 잔인한 포식자 종을 절멸시키거나 가여운 피식자를 집중적으로 키워낼 권리가 우리 인류에게 없는 것처럼.

<스타 트렉> 시리즈에서는 우주 곳곳의 문명이 서로 교류하며 행성 연방을 구성하는데, 연방의 규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다른 외계 문명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이 ‘프라임 디렉티브‘ 규칙에 완전히 동의한다. - P191

그런 지구에 물과 유기물질이라는 생명의 씨앗을 가져다준 
여행자가 있었다. 인류가 탐사선을 쏘아 올리기 훨씬 전부터, 
아폴로 우주인이 달에 도착하기 전부터, 보이저호가 태양계의 여러 행성을 차례차례 방문하기 전부터 태양계를 누비던 여행자, 소행성과 혜성이다. - P193

혜성탐사선 지오토와 로제타를 통해 우리는 혜성이 메테인과 
같은 탄소화합물을 풍부하게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혜성에는 다량의 물이 들어 있기도 하다. 소행성의 암석 속에서도 다양한 유기물질과 물을 찾을 수 있다. 태양계 초기의 열기가 
한풀 가라앉은 뒤, 이제는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지구에 태양계 곳곳에서 물과 유기물질이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바다가 생겨나고 그 속에서 생명이 잉태되었다. 벌이 꽃밭을 날아다니며 수분하듯이, 혜성과 소행성, 그리고 작은 먼지 입자들이 
지구에 생명을 가져온 것이다.
- P194

지구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인류와 문명이 발달한 후에도 여행자들은 종종 찾아온다. 생명의 씨앗 말고도 우주의 신비, 태양계의 경이로움을 알려줄 힌트를 하나씩 떨구고 간다. 
혜성과 유성, 운석을 통해 
인류는 우주라는 거대한 자연을 배운다. - P195

천문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천문학은 실로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학문 중 하나다. 네안데르탈인도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보았을 것이고, 어쩌면 인류 혹은 그 비슷한 종족이 나타나기 전에도, 이를테면 백악기의 공룡들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 좋아하는 야행성 동물들은 보름달 무렵에는 밤새 너무 밝아 활동을 조심했겠지.
- P196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옛 천문학자로는 마야문명의 공무원이 있다. 돌로 만들어진 공간 안에서 원통형의 관을 통해 주위를 둘러싼 
천체를 관찰하고 있는 사람의 그림이 전해진다. 유적 중에서도 
하늘을 관찰할 수 있는 창이 여럿 나 있는 건물이나, 머리 바로 
위 천정zenith 방향으로 창이 난 지하실이 발견된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마야 사람들은 일 년의 길이와 달의 주기뿐 
아니라, 금성과 화성의 주기까지 알고 있었는데, 이들이 추정한 
값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와 매우 가깝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금성의 회합 주기가 583.92일인데, 마야인들의 계산으로는 584일이다. 실제에 거의 근접하게 계산해낸 것이다.
마야 사람들은 태양을 기준으로 하는 양력과 금성을 기준으로 하는 금성력, 두 종류의 달력을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P198

종교나 점성술, 농경에 필요한 달력 계산을 벗어나 천문학이 보다 학문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그리스시대라고 할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인위적으로 좌지우지할 수없는 대상으로 보고, 
천체의 움직임 또한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다. 
...
피타고라스학파는 원과 구를 특별한 것으로 취급했는데, 여기에 더해 플라톤은 하늘에 있는 천체들이 그 특별한 구형이며, 
이들이 커다란원 위에서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그 중심에는 지구가 있고, 다른 천체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 P198

그러나 행성의 움직임은 너무나 오묘했다. 별과 달리 행성은 때때로 방향을 바꾸어 역행하가가 다시 본래의 방향으로 순행하곤 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태양을 중심에 두고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각자의 주기로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철학은 우주의 중심에 오로지 지구만를 허락했다. - P199

... 오늘날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은 복집한 가정을 억지로 
끼워 맞춰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을 비유할 때 언급되는 슬픈 운명을 맞이했다. 설명은 간단할수록 좋다는 ‘오컴의 면도날‘ 개념의 대척점이라고나 할까. 
태양을 중심에 두고, 행성의 공전 궤도로 원이 아니라 타원을 
도입하면 간단히 끝날일이다.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얘기지만 
말이다.
- P200

오늘날 지동설의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중세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다. 
그는 아주 꼼꼼한 사람이었다.아무리 계산해보아도 지구를 
중심에 두고서는 행성들의 운동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자
관측자료를 다시 분석했다. 그의 자료는 태양 중심의 지동설을 말하고 있었다.
태양이 가운데 있고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순서로 행성들이 배열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분석을 해놓고도 정작 자신의 결과를 믿지 못했다. 과학자로서 
확신이 부족했던 것인지, 지동설을 주장하는 순간 시작될 교회의 탄압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 것인지, 그가 지동설을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정리한 것은 말년의 병석에서
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뒤에야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발간되었다. 훗날, 그가 완벽하게 옳았음이 증명되고, 지동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발상의 대전환을 촉발하는 사건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이라고 비유하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 P201

브라헤의 관측자료는 다음 세대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넘겨졌다. 브라헤의 관측기록이 어찌나 정교했던지, 그 자료를 
분석한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행성은 태양 근처에서는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태양에서 멀 때에는 느리게 움직이며, 공전 궤도의 장반경이 
공전 주기의 3분의 2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 세 가지는 ‘케플러 법칙‘으로 불리며,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기본규칙이 되었다.

브라헤가 활동하던 바로 그 시기에 망원경이 등장했다.
최초로 망원경을 발명한 사람은 1608년 네덜란드의 안경
제조업자 한스 리퍼세이이지만, 이를 개량해 천체 관측에
사용한 이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망원경으로 목성을 관측하던 갈릴레이는 목성 주위에 네 개의 작고 밝은 점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날 갈릴레이 위성이라고 불리는 목성의 네 위성, 가니메데, 
칼리스토, 이오, 유로파였다. 
- P202

태양계 천체의 모든 궤도를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공식이 
드디어 등장했으니, 바로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모든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 힘은 
서로의 질량이 클수록 커지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제곱만큼 
작아진다. 
이것은 태양계 행성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물체, 밤하늘의 
모든 별, 그야말로 ‘만물‘에 다 적용할 수 있다. - P203

뉴턴은 반사망원경을 제작하기도 했다. 좁고 기다란 형태였던 
기존의 굴절식 망원경의 단점을 보완해 렌즈 대신 거울을 
활용한 것이 핵심이다. 그러면 망원경의 길이도 줄일 수 있었고, 렌즈 표면을 아주 정밀하게 가공하는 기술이 부족했던 당대에도 밤하늘의 별을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덕분에 후대의 사람들은 뉴턴의 제작 방식을 따라 대형 망원경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 P204

반사망원경에 푹 빠진 나머지 400여 개가 넘는 망원경을 직접 
만든 월리엄 허셜은 망원경 제작 말고도 많은 업적을 역사에 
남겼다. 그는 요즘 말로 ‘엄마 친구 아들‘이라 불릴만한데, 
일단 삼십대 초반까지는 클래식 음악 연주자이자 저명한 
작곡가였다. 수많은 교향곡과 협주곡을 만들었고, 연주회를 열 
정도로 이름난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음악 이론을 파고들던 허셜은 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더니 곧 스스로 망원경을 만드는 전문 기술자가 되었고, 
그 망원경을 이용해 밤하늘의 별을 체계적으로 관측하기 시작
했다. 눈으로 볼 때는 별 하나처럼 보이지만 망원경으로 자세히 보면 쌍성인 별들을 수백 개나 발견해 목록으로 만들었고, 토성 너머의 또다른 행성, 천왕성을 발견했다.

토성까지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천왕성부터는 너무 멀어서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인류는 망원경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는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우리 이웃 행성의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 P204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는 샤를 메시에라는 천문학자가 별이 
아닌 천체의 목록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1774년, 성운과 성단, 은하의 목록을 완성해 발표했는데, 이 ‘메시에 목록‘은 오늘날
까지도 망원경으로 밤하늘 관측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기본 중의 기본 자료다. 

별은 아무리 큰 망원경으로 보아도 그저 밝은 점일 따름이지만, 메시에 목록에 나온 천체들은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볼수록 예쁘고, 오래 볼수록 사랑스럽다. - P205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다른 모든 자연과학과 공학이 그러했듯이 천문학의 범위 또한 대단히 확장되었다. 인류는 이제 더 먼 우주의 수많은 은하단을 발견하고, 은하의 구조와 진화를 논하고, 
우주의 기원과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우주에 망원경을 띄워두기도 하고, 태양계 안의 여러 이웃들에게 수많은 탐사선을 보내고 있다. 
1977년에 지구를 떠난 보이저 1호, 2호 탐사선들은 이제 태양의 영향권이 미치는 끝자락, 태양권계면 너머까지 나아갔다. 
지금 이순간에도, 보이저의 항해는 계속되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이루어지는 천문학자들의 모험도 그렇다. - P205

오늘날 우리의 대학이라는 것은 서양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다. 
건물의 외형만 보아도 한옥보다는 서양식 건물이 압도적으로 
많다. 집도, 직장도, 상점도 대부분 그렇듯이. 어디 건물뿐인가. 
학문의 종류에 따라 학부를 나누되 전공에 상관없이 다양한 ‘교양‘ 과목을 배우게 하는 것은 오래전 태동한 서양식 대학 교육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학문적‘ 혹은 ‘과학적‘이라 부르는 태도, 자연과 사회, 
인류를 탐구하고 그에 관해 토론하는 태도, 역시 다분히 
서양식이다. 
밤하늘의 별과 행성을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계시를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 보고 관찰하고 탐구하는 태도는 그리스시대부터 흥했던 사고방식이다. - P207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날 전 지구에 널리 퍼져 있지 않다고 해서 동양의 사고방식이 열등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어려운 이유가 우리말이 
지구상에서 널리 쓰이는 언어가 아니라서 타국의 대중이나 
평론가가 접근하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듯이 말이다. 

별자리만 해도 그렇다. 서양식 별자리는 점성술이나 이달의 
운세뿐 아니라 천문학에서 공식 용어로도 쓴다. 예를 들어 우리
은하 중심에 있는 블랙홀의 이름은 사지타리우스sgr A*인데, 
궁수자리에 있는 A별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천문학에서 별을 부를 때는 
북두칠성이 아니라 큰곰자리의꼬리, 
직녀성과 견우성이 아니라 리라자리의 베가와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라는 이름이 통용된다.

- P208

그런데 동양에 살던 옛사람들도 별을 보았다. 가장 오래된 기록을 꼽는다면 고인돌을 들 수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에 송송 새겨진 작은 홈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고대의 별자리를 
인위적으로 표시해놓은 흔적이다. 별의 위치는 물론이고 홈의 
크기를 조절해 밝고 어두운 별을 구분해놓았다. 은하수를 표시한 것도 발견된다. 
제작 시기가 청동기나 후기 신석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도 여럿 있다고 하니, 인류가 오래전부터 별을 
깊이 관찰해왔다는 점에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

특이한 점은, 전 세계 고인돌 태반이 한반도 부근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오래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별을 특히 
사랑했거나, 돌을 조각하는 기술이 특히 좋았던 것 같다. 
고대의 무덤 벽화에서도 별자리는 흔히 발견된다. 

예를들어, 씨름무덤(각저총)과 춤무덤(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
수십 기의 벽과 천장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밤하늘의 실제 별 위치가 반영되어 있다. 북두칠성, 남두육성 같은 우리 
고유 별자리들이다.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별자리 그림은 고고학과 천문학이 만날 수있는 지점이기도 하고, 남한과 북한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 P209

서양식 별자리는 밤하늘의 별을 88개의 구획으로 나누고, 
해, 달, 행성이 지나는 길에 있는 별자리들을 특별히 황도 12궁
이라고 부른다. 

반면 우리 옛 선조들은 밤하늘을 세구역으로 나누고 자미원紫微垣, 태미원太微垣, 천시원天市垣이라고 이름 지었다. 
밤하늘의 중심이 되는 북극성 근처는 자미원으로 하늘의 궁궐을
감싸는 울타리다. 자미원 너머에는정부에 해당하는 태미원, 
백성들이 주로 오가는 시장에 해당하는 천시원이 있다. 

해와 달, 행성들이 지나는 길에 있는 별들은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 28수로 묶어두었고, 동방의청룡, 서방의 백호, 북방의 
현무, 남방의 주작이 각각 7수씩을 맡고 있다. 
28수는 윷놀이 말판에서도 볼 수 있다. 말판을 잘 보면 한가운데 칸 주위로 28개의 칸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북극성과 28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 P210

한자 宿을 ‘별자리 수‘로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래는 ‘잘 숙‘자인데 동양 별자리에서 28수의 ‘수‘자로 쓰인다. 
28수는 밤하늘에서 달이 하루씩 머무는 영역을 별자리로 묶어
놓은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각에 달의 위치를 관찰하면 매일 동쪽으로 옮겨가는데, 한 달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달이 하루 묵어가는 자리라서 宿자를 쓴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잘 숙‘과 ‘별자리 수가 함께 쓰임을 알 수 
있다. 별자리뿐 아니라, 별의 이름도 기존의 한자를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동방칠수는 각, 항, 저, 방, 심, 미, 
기의 일곱 별인데, 한자사전에서 각이나 항자를 찾아보면 
열번째쯤 항목에 ‘별 각‘ ‘별 항‘ 같은 내용이 나온다. - P210

... 안상현 박사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별자리」라는, 
우리 전통 별자리에 관한 책이 나온 것이다.
...
지금은 서양식 현대 천문학을 하느라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내가 할머니가 되면 우리 고천문학古天文學을 연구하시는 분들 
곁에서 기웃기웃해보고 싶다. - P211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만 원권 지폐의 뒷면에도 우리 전통 
별자리가 나온다. 세종시대의 천문 관측기기 혼천의와 보현산 
천문대 망원경의 뒷배경에 희미하게 보이는 수많은 동그라미가 바로 한반도의 옛 밤하늘을 담은 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다. 
조선시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 는 석탁본, 목탁본, 필사본 등 
종류도 다양하게 여럿 전해진다. 잘나가는 집안이라면 탁본 하나씩은 갖고 있어야 폼 좀 났던 모양이다. 대개 맨 위에 이름이 크게 써 있고, 가운데에는 세밀한 천문도가, 위아래로는 설명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
중국, 일본에도 유사한 천문도가 전해지는데, 그 후예들이 동의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것이 가장 정교하다고 알려져 있다. 
별의 밝기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표시하고, 별들의 위치도 시대에 맞게 개정하는 등 우리 선조들은 천문도에 꽤나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탁본은 흑백이지만, 필사본은 은하수를 하늘색으로, 별은 밝기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 아름답게 꾸민 것도 여럿 전해진다.
- P212

재밌는 것은,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을 새기는 일이 국가의 중대사였다는 점이다. 전쟁중에 원본이 유실되자 남아있던 
탁본을 가지고 다시 석각으로 만든 것도 태조가 명했기 때문이다.

633년 무렵, 그러니까 신라의 선덕여왕도 천체 관측시설을 건설했다. 첨성대는 가운데에 난 창으로 들어가 꼭대기에 얹어진 
네 귀퉁이를 기준 삼아 하늘을 관찰한 현장이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다.


사실 유사 이래 천문학에 있어 동서양의 가장 큰 차이는 주체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서양은 개개인이 관측하고 기록을 남긴 데 반해, 동양, 특히 우리의 천문 관측과 기록은국가가 주도했다. 그래서 천문 기록이 역사서 속에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더 오랜 기록인 『고려사』에도 
태양의 흑점과 오로라의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분석해보면 태양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줄어들었다 하는 11년 주기와 일치한다. 태양 활동이 활발하면 태양 표면에 나타나는 흑점의 
개수도 늘어나고 크기도 커진다. 오로라도 자주 나타나고 중위도까지 내려오기도 한다. 오로라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흑점은 
눈으로도 보이기 때문에 시대를 불문하고 관측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데, 조선의 기록까지 합치면 오로라 기록 건수가 700회를 넘는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만 가진 놀라운 자산이다.

태양의 11년 주기는 서양에서 19세기 들어서야 발견되었다. 
기록은 우리가 한참 앞섰는데 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초기로 돌아가 고려의 흑점 기록을 분석해 일찌감치 온 세상에 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P214

핼리혜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 기록에서 자주 등장한다. 
워낙 밝은데다 꼬리도 길어서 밤하늘에 일단 나타나기만 하면 
뭇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역사서뿐 아니라 옛사람들의 그림이나 태피스트리로도 남아 있다. 
재밌는 것은 이 혜성이 76년마다 지구 근처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혜성을 기록한 예술작품의 연대를 추정하기 좋다는 점이다. - P214

우리나라 사료에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핼리혜성 기록은 ‘고려사‘에서 시작한다.
...
이 기록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말인 1835년까지 핼리혜성이 
76년 주기로 지구 근처를 지날 때마다 관측한 기록이 남아 있다. 

혜성뿐 아니라 초신성, 일식과 월식, 오로라, 행성들의 움직임은 물론 매일의 기상 상태와 지진, 가뭄 등의 이상 현상을 아주 오랜 세월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해왔다. 자연을 이용하는 시계
장치와 정교한 관측기기도 만들었다. 
그런 흔적들을 만 원권 지폐의 배경 그림에서 만날 때마다 한편
으로는 자랑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착잡하다.

- P215

지폐 하나에 천문학 관련 아이템이 셋씩이나 새겨진 나라는 
많지 않다. 
해외 학회에서 만난 다른 나라 연구자들에게 지폐를 자랑하면, 
한국 사람들은 천문학에 무척 관심이 많고 지폐에 새길 만큼 중요하게 여기나보다 하는 말을 듣는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런가?‘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동양의, 우리나라의 멋진 천문학사를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는 고3 학생에게 우리는 어떤 시선을 보내는가. ‘천상열차분야지도‘ 그림이 새겨진 티셔츠와 NASA 로고가 붙은 티셔츠를 판다면 어느 것이 더 잘 팔릴까?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다. 이제부터 덧붙여질 한국 천문학사는 더욱 다채롭고, 그 가치를 널리 인정받고, 더 많은 사람의 환호와 함께 계속되기를.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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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스아바바에서, 타이베이에서, 도쿄에서, 치앙마이에서 
그 나라의 언어라고는 고작 몇 글자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면서 서점 구경만은 신나게 하며 돌아다녔던 것을 떠올리면, 나에게도 「행성어 서점」의 화자가 지긋지긋해하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분명히 있었던 셈이다. 그 안의 내용은 이해할 생각이 없으면서 
낯선 언어가 주는 이국적 경험만을 소비하려는 태도가.
- P7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서가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목소리를 낮추어 밖에서보다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고,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찬찬히 서가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뒤늦은 아쉬움이 조금씩 밀려들었다. 왜 가장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때에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그때야말로 나에게 이 책들, 다른 차원의 것들이 필요했는데. - P10

좋은 것들을 천천히 느리게 알아가고 있다. 남들이다 좋다고 
할 때는 들은 체도 않다가, 어쩌다 우연히 경험한 다음에야 
"아, 난 왜 이제 알았지" 하고 뒷북을 치는 거다. 
포항을 떠나기 직전에야 들여다보게된 책방도, 
우연히 책을 만나는 기쁨 같은 것도 그렇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취향이 무척 확고한 독자이며,
어떤 책을 좋아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서점은 단지 
이미 구입하기로 결정한 책을 가서 사 오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내 취향에 대한 확신이
오히려 나의 세계를 좁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P10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만 빙글빙글 맴돌며
익히 아는 즐거움만을 찾고 있었다. 
큰 서점에 가거나 온라인 서점에 접속하면 
망설임 없이 특정 분야의 서가로 직진해서 혹은 
특정 카테고리를 열어서 그곳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도서관에 가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언제나 자연과학 서가 근처만을 돌아다녔다.

어쩌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그렇지만 꽤 재미있는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아주 약간 열어놓는 것. 
그건 소설가로 살아가고 싶은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태도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세계를 자꾸 의식적으로 넓혀나가지 않으면, 소설도 내가 편애하는 자그만 세계 안에 
갇히고 말 테니까.

그렇게 책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조금 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내 일상에는 소박한 즐거움이 하나 늘었다. 일 때문에 장거리 이동을 하는 날이면,  꼭 그 지역의 책방을 찾아본다. - P11

찰리 제인 앤더스의 《아메리카 끝에 있는 서점》에는 
늘 일촉즉발의 적대 관계에 있는 두 나라 사이 국경 지대에 위치한 서점이 나온다. 가치관도, 사고방식도, 세계관도 너무 다른 
양쪽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입구를 통과해 서점으로 
들어오고, 책을 찾아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간다. 
서점주인 몰리는 굳이 두 세계를 섞이게 하는 대신, 
다들 원하는 책들만을 접해도 무방하도록 책을 배치해둔다.

어떤 책들이 우리를 생각지 못했던 낯선 세계로 이끈다면, 
책방은 그 우연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는통로다. 
좀 더 많은 책들이 그렇게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 P13

그날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읍읍‘이라고 읽는 시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은, 내게 돌아올 답이 검은 봉지만큼 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엄마를 따라 걸으며 사람이 
언어를 갖기 전에 어쩌면 새처럼 그런 소리로 누군가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검은 새가되는 
엉뚱한 상상과 함께.
- P21

엄마는 한동안 말없이 눈을 감았다가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던 밤에 펼쳤던 책들, 무슨 말인지 모를 문장에 밑줄을 그어가며 
그것이 자신의 삶인 것같아 애써 이해하려 노력했던 시간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늙어 죽는 일이 두려워 책 속으로 
달아나려했던 시도들, 그리고 이제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삶과 마침내 이른 편안함에 대하여, 마치 수도 없이 대사를 연습한 
배우처럼 긴 독백을 막힘없이 내뱉었다. - P22

나는 엄마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노년을 향해 가는 여성의 삶이 엄마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고, 내게는 그것이 자꾸 읍읍이라 읽혔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때 그 시는 책 속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그 ‘읍읍‘이란 시를 여기저기서 읽은 적이 있다. 
시장의 여자들에게서, 어떤남자의 양복 소맷자락에서, 
술집 테이블에 혼자 남아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이에게서, 엄마의 몸에서. 
대체로 그 ‘읍읍‘의 시는 ‘엉엉‘이 되기 전에 사람의 목구멍 
깊숙한곳으로 사라졌는데, 그런 걸 생각하면 사람의 몸에서 목구멍처럼 깊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다들 몇 편의 시를 숨기고 살아가는지... - P23

지금 나는 그때의 엄마처럼 길을 걷고 있다. 

내가 엄마에게서 배운 것은 
물음이 많아지는 날에는 걷고 읽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걷다보니 다시 그곳이다.
오래전, 우리의 걸음을 붙잡았던 그 서점 앞. - P23

옛 서적들을 모아둔 서가에서 《생의한가운데》를 찾아냈다. 
오래전에 읽었던 그 책을 펼치는 순간, 우연히 내게 달려든 문장.

"인간은 생의 의미를 물으면 결코 알지 못하게 되지요. 오히려 그걸 묻지 않는 사람만이 생의 의미를알고 있는 것이에요."

소설 속 니나의 말이다. 그런데 과연 물음이 그치는 날이 올까.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강박에 얼마나 헤매고 걸어야 물음이 
다 닳아 비로소 그저 걷고 있음에 자족할 수 있을까. 
닳아버린 물음을 벗어던지고
맨발처럼 가벼운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오래전 내가 읽었던《생의 한가운데》는 엄마의 책이었으니 이제 내 것을 가져야 할 때라 생각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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