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여행길을 들뜨게 하는 노래는, 음악가들이 함께 여행
하는 TV 프로그램에서 부른 노래다. 따라 부르노라면 그들과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 즐겁다. 최근에는 <이타카로 가는 길>에서 이홍기, 하현우, 윤도현이 함께 부른<풍선>이 우리 차에서 가장 핫한 곡이다.
...
음악이 없다면 낯선 타지에서의 두려움과 떨림, 떠나서 머무르고 되돌아오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그 피로를 어찌 덜어낼 수 있을까. 학회 참석차 타국에 머물게 되면, 나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음악을 많이 듣는다. 시차의 피로, 발표할 
자료 중 행여나 뭐라도 빼먹은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 서로 
다른 나라에 살기에 학회에서나 만나게 되는 공저자들과의 회의를 앞둔 긴장감, 향후 함께 일할 기회가 있을지도모를 잠정적 
공동연구자를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감 따위와 맞서려면 이어폰이 꼭 있어야 한다. - P255

천문학자들은 우주에 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게다가 달 과학을 한다니, 살아생전에 못 간다면 죽어서 뼛가루
라도 달에 뿌려지길 바랄 사람이 아닌가! 

흠. 뼛가루가 되어서라면 모를까 살아서는 가고 싶지 않다. - P256

우주에 관한 수많은 노래 중 내가 좋아하는 것은 메이비의 
<어 레터 프롬 에이벨 1689> 라는 곡이다. 에이벨은 은하단을 
조사하고 목록으로 만들었던 천문학자의 이름으로, 그가 남겨둔 은하단 목록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에이벨 1689는 에이벨 목록에 올라 있는 1689번째 은하단을 
뜻한다. 처녀자리 부근에 있는 이 은하단은 지구로부터 대략 
22억 광년 떨어져 있다. 1광년은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이고, 빛은 우주에서 가장 빠른 신호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에이벨 1689의 사진은 사실 22억 년 전의 모습이고 지금쯤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P257

문자도, 편지도, 수신자에게 도달되기에는 너무 먼 곳이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깉은 지구상에 있어도 문자를 보낼 수 없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하물며 에이벨 1689만큼 쩔어져 있다면 어떨까. 

아득히 먼 그곳에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편지는 아무리 일찍 부쳐도 이미 늦었다. 그래서 가슴이 아리다. - P258

 2024년 다시 달로 향할 미국의 우주비행사는 BTS를 들으며 
우주를 항해할 예정이다. 우주에서 그들이 떠나온 지구를, 
그 안에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 모두를 돌아볼 것이다.
지구 밖으로 나간 우주비행사처럼 우리 역시 지구라는 최고로 
멋진 우주선에 올라탄 여행자들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의 
생이 그토록 찬란한 것일까. 
여행길에서 만나면 무엇이든 다 아름다워 보이니까. 손에 무엇 
하나 쥔 게 없어도 콧노래가 흘러나오니까.
- P259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 선장은 착륙선의 사다리를 타고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디면서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 
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곳의 환경을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낯선 땅의 흙과 돌을 채집한 두 사람은 다시 달 궤도로 올라와 사령선과 재회하는 데 성공했고, 세 사람 모두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같은해 우리나라에는 대한항공이라는 회사가 생겼고, 
MBC 방송국이 개국했다. 그리고 삼선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폴로 11호가 성공적으로 달에 다녀온 지 
넉 달 만에 아폴로 12호의 달 방문이 또다시 전 세계에 생중계됬다. - P260

우주경쟁시대는 2차세계대전 종결 이후 시작된 ‘우아한‘ 종류의 
전쟁에서 촉발되었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한 국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려는 정치적 목적은 희미해지고, 
지구 밖 우주 공간의 매력에 푹 빠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우주라는 대자연을 탐구하려는 과학적 목적이 더 짙어졌다. 

미국과 소련은 달뿐 아니라 여러 행성에 수많은 탐사선을 
보냈다. 어느샌가 유럽도 합세했고, 90년대 들어서는 일본이, 
21세기에는 중국, 인도, 이스라엘이 우주 탐사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 흐름에 함께하지 못했으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우주 탐사 자료는 외국산이다. 
우주를 탐사하는 과학자들의 전통은 너그럽다. 통상 1년 전후의 독점 기간이 지나면 관측자료의 대부분을 공개한다. 탐사에 참여하지 않은 동방 어느 작은 나라의 대학원생도 인터넷으로 자료를 내려받을 수 있다. 모두 남의 나라 국민이 낸 세금으로 남의 나라 과학자와 남의 나라 기술자가 이뤄낸 성과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다. - P261

나를 어필하고 각인시키려면, 그 대상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자들이는 내 또래든 간에, 나는 놀랄 만큼 뛰어난 대학원생 이거나, 독특한 관측자료를 손에 쥐고 있거나, 특별한 관측장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평범한 대학원생이었고, 자료 독점 
기간이 지나 일반에 공개된 자료를 활용했다.  - P263

미국의 과학자들이 미항공우주국이라는 이름과 그 화려한 우주 탐사 이력에 끝없는 자부심을 드러낼 때, 나는 그 영광을 함께 
실감할 수 없었다. 아폴로 우주인의 달 착륙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던 시절은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나는 우주 사진이라면 
과학 잡지와 인터넷에서 질리도록 볼 수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학회에서 우주탐사선이 막 보내온 새로운 관측자료가 발표될 
때, 할리우드 영화 관객처럼 흥분하고 감동하는 타국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나는 어리둥절하곤 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달과 행성을 탐사하는 것은 그들에게 국가적 사업이었고, 어쩌면 과학 이상의 의미가 더해져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이나 일제강점기 시절 건축물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해 학문적 흥미 이상의 특별한 애착과 긍지를 느낄 것이므로.

- P264

행성 탐사를 해본 적 없는 국가의 행성과학자로서 갖고 있던 
그 자격지심과 부채감을 어느 날 입 밖으로 내보이고 말았다. 
한국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유독 내게 다정히 대해주고 
지지해주는 미국 학자에게였다. 내 얘기에 그는 조금 놀라는 듯
했다. 한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에게 한 번 더 물었다. 그와 나의 공동연구자 중에는 옛 소련
에서부터 활동해왔던, 지금은 우크라이나인이 된 원로 과학자가 있다. 우주경쟁시대 초반에는 소련이 늘 미국보다 한발 앞서 나갔는데 아폴로 우주인의 달 착륙으로 인해 상황이 역전 되었을 때, 그때도 달 과학자였던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 얘기라면 이미 나눠본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사람을 달에 보내서 기뻤다고 했단다. ‘우리‘는 미국인도, 미항공우주국 
관계자도 아닌, 인류 전체였다. 
이번엔 내가 조금 놀랐다. 과연 못난 자격지심 이었구나. - P265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
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 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 P265

우리나라도 이제 달 탐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한국형 달 탐사선이 얻은 관측자료를 전 세계와 나눌 차례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성과는 우리나라가 혼자서만 잘해서 
얻은 것은 아님을 생각한다. 

유사 이래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교육받고 서로의 연구를 공유
하고 참조해가며 쌓아온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지구상의 전 인류에게 ‘우리‘ 관측자료를 내어 놓을 그날을 기다린다. - P266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과학자 얘기가 나왔다. 우리 어릴 적에 
장래희망에 과학자나 선생님, 대통령 같은 전형적인 단골 답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더라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학부모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요즘 세상에 과학자가 어디 있어요?"
...
"과학자는 다 회사에 있지. 회사에 있는 사람들이 과학자지 뭐야 요즘은." - P267

대기업에서 스마트폰에 신기능을 불어넣는달지, 둘둘 말아 보관할 수 있는 TV를 만든달지 하는 사람들이 과학자라는 말에 다른 이들도 별 흥미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과학자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부터 파생된 
생각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것은 나뿐인 듯했다.

생각해보면 그 말에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 구석진 골방에 들어앉아 아무도 알지 못할 문제로 고민에 빠지곤 하는 괴짜만을 과학자라고 부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과학자들은 우리 삶의 다양한 부분에 스며들어 있다.
- P268

과학자는 무엇이고 연구자는 또 무엇인지, 직업 과학자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 지금도 그건 내게 아직 어려운 문제다. 
학생일 때는 어른들이 물어다주는 주제와 소재에 의존하면서 
대학원생도 과연 연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자문했다. 
그땐 자신이없었지만 대학원생들과 함께 일해본 경험이 쌓인 
지금은 그렇다는 걸 안다. - P269

과학자가 하는 일 중에 내가 아직 잘 모르는 것이 또하나 있다. 
과학자도 에세이를 쓰는가 하는 것이다. 책을 쓰는 과학자도 
있지만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책을 쓰더라도 대개는 전문적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책이나 대학의 교재를 집필한다. 
...
그래서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체 어떤 책을 
쓴다는 거야?‘ 원고를 쓰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질문을 
오래도록 품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책장에 꽂힌 김중혁 작가의 책 제목이 눈에 들어 왔다.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고, 삶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안갯속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글을 썼다. 
그래서 ‘어떤‘ 책이 되긴 되었다.
- P270

요즘 세상에 과학자가 어디 있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다시 말하면, 요즘 세상에 과학자는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학계에서 권위 있는 상을 받거나, 최고급 기술을 개발 하거나, 훌륭한 인재를 수없이 길러내는 사람 외에도 다양한 과학자가 있다. 
나중에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특출난 것 없는 연구자, 
특별한 계기나 인상적인 에피소드 하나 없이 과학자가 되어 
그저 그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 그런 평범한 과학자는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 자신과 꼭 닮은, 소소한 에세이를 쓰는 과학자 한 명쯤 
더 있다고 해도괜찮을 것 같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열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계절이 멀어지고 또다시 돌아오는 시간 중 대부분은 글을 쓰는게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이 뭐라도 되었을 무렵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소모되었다. 그렇게 무척 쓸모없었고 대단히 중요했던 열 계절을 
기꺼이 맞이한 끝에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다. 

이 한 권의 책에는 작은 구두점이지만, 
어느 별 볼 일 없는 천문학자에게는 
또하나의 우주가 시작되는 거대한 도약점이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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