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온통 잿빛이다. 어둡고, 꿉꿉하고, 거슬린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내용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청년 채용을 위해서라며 중장년층에게 퇴직을 종용하거나 다른 업무를 주며 괴롭히는 회사와 통신탑 건설을 두고 싸우는 주민들과 하청업체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을 관망하는 경찰 병력이 그러하다.자본은 개인을 지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을 끝내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저성과자라 낙인 찍혀 명예퇴직을 요구받고, 알 수 없는 교육을 받다가 집에서 3-4시간 거리의 사무실로 발령받고, 그래도 버티던 그는 시골로 발령받은 뒤 마침내 ˝9번˝ 이라는 이름을 얻는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개인이 지워지지 않을 방법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매 문장마다 치열한 노동의 실태를 조명하며 독자에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찾으라고 말한다. 또한 자본주의 안에서는 자본을 가지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피해자라는 것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무섭게 치솟는 물가상승률에도 최저임금을 동결하자는 기업과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파업 농성을 하고 있는 현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김혜진 작가는 사회파 소설 『9번의 일』로 한국의 오늘을 진단한다. 고민하고 사유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책무임을 다시 생각케 한다.
성소수자를 낙인찍던 ‘퀴어‘나 페미니스트를 억압하던 ‘메갈‘ 등은 당사자들이 단어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더 이상 혐오의 표현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모든 이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우리에게 갖춰진다면 ‘정상성‘이나 ‘보편성‘이라는 개념 역시 무력화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