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과 편지 - 성폭력 생존자이자 《버자이너 모놀로그》 작가 이브 엔슬러의 마지막 고발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령 옮김 / 심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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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 성폭력 생존자 이브 엔슬러가 가해자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쓴 편지 형식의 글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죽기 전 까지 사과는 고사하고 성폭력조차 인정하지 않은 아버지를 고발하고 있다.

성폭력과 학대를 가할 때 마다 아버지는 ‘그림자 인간’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불러내어 범죄와 자신을 분리시키며 자신을 변호한다. 이 얼토당토않은 변명은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들이 자행하는 자기 합리화와 모순에 맞닿아있다. 수 많은 범죄행위를 열거한 뒤 끝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아버지의 말은 ˝여전히 사과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여성들˝을 위한 징검다리이자 그들을 향한 응원이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김영서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아버지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내용의 책을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출간했다. 수 년 후 본명으로 개정판을 낸 그에게 왜 이제야 본명으로 책을 출간했느냐고 비난하거나 저의가 무엇이냐고 의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성폭력 피해자의 용기와 선택이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피해자를 2차 가해한다. 미투운동이 사회를 휩쓸었을 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성폭력 생존자의 목소리를 둘러싸고, 누군가는 정치공작이라 선동했고 대중들은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며 피해자를 의심했다. ‘왜 이제 와서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가.’가 그들이 가진 의심의 핵심근거였다. 소매치기를 당한 사람에게 왜 소매치기를 당했느냐 힐난하지 않듯이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재단 당할 이유가 없다. 가해자의 권력으로 만들어진 서사는 오랜 기간 강요당한 침묵을 이제야 깨고 나온 피해자들을 공론의 장에서 퇴출시킨다.

죽고 나서야 받을 수 있었던, 그것마저도 성폭력 생존자인 자신의 말로 풀어낸 아버지의 사과. 아버지로부터의 지속적인 학대로 오랜 기간 자신을 버릴 만큼 고통스러운 날을 보냈지만, 저자는 그 시간들을 복기하고 기록하는 과정을 거쳐 상처를 극복한다. 결코 쉽지 않은 그의 용기와 의기에 찬사를 보낸다. 이렇게 “지금, 여기 존재를 걸고 말하는 진실의 목소리”가 있는 한 피해자는 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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