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터데이
대니 보일 감독, 히메쉬 파텔 (Himesh Patel)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9년 12월
평점 :
품절


만약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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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터지는 탄산의 죄책감
<화양연화>, 캄보디아

<화양연화>는 스쳐 지나가는 삶의 섬광 같은 찰나를 가장 아프고아름답게 잡아낸 영화였다. 

홍콩 감독 왕가위가 연출한 <화양연화>의 영어 제목은 ‘In TheMood For Love 사랑하고 싶은‘ 였다. 차우와 리첸은 사랑하고 싶었다.

‘화양연화‘란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뜻한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차우와 리첸은 그 아픈 사랑을 절절히 앓고 있을 때,
정말 그 순간들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느꼈을까. 

고통스러운 나날이아름다운 시절로 부활하는 것은 언제나 ‘먼 훗날‘이다. 현재 시제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결국 과거 시제에서 추억을 발명함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자위한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언제나 과거라는 사실 속에 인간의 근원적인 절망이 있다. 

앙코르 지역에서의 첫 일몰은 프놈 바켓에서 보았다. 프놈 바켓은앙코르에서 해가 지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원이었다. 

호수 한가운데서 코이는 엔진을 껐다. 거대한 정적이 세상을 지배했다. ‘관광‘의 마지막은 무거운 침묵이 지배했다. 흙탕물 속으로 그물을 던지던 아이들 쪽으로 애써 고개를 돌리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콜라 캔을 비웠다. 탄산이 입에서 톡 쏘며 가볍게 터지고 음료가 목구멍을 시원하게 넘어갈 때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다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해도, 비참한 생활의 현장을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일만큼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덜 갖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가 상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나는정말 이들보다 더 행복한가. 

 이 흙빛삶의 터전에 비치는 태앙도 다른 어느 곳의 태양만큼이나 아름납다는 사실 속에는 기묘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이 어행은 이제 내게 어떻게 남을 것인가.

무엇일까 어딜까 그저 또
<행잉록의 소풍), 오스트레일리아

소녀들이 사라졌다. 하늘과 땅 사이. 희박한 대기 속으로, 아무 흔적도 없이, 1900년 2월 14일 오후, 행잉록이란 산에 소풍 갔던 길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이득한 산과 들판 그리고 고택, 소녀들은대체 어디로 간 걸까.

행잉록의 소풍에는 마력 같은 게 있었다. 신비만 남겨두고 설명은 거세한 영화. 실종의 모티브가 그 영화의 전부였다. 

어둡지 않은 침묵은 감미롭다. 수다스러운 어둠은 즐겁다. 허나침묵과 손잡은 어둠은 전혀 달랐다. 그림자처럼 몸에 붙어 떨어지지않았다. 내 발소리가 허리를 휘감고 타올랐다. 복도에 걸린 초상화들이 눈을 굴렸다. 1920년대에는 여기서 살인사건도 일어났다지.
저택은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무대 같았다.


<행잉록의 소풍>은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된 적이 없지만, 입소문을 통해 소수의 열혈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된 걸작이다. <트루먼 쇼>, <죽은 시인의 사회로 유명한 피터 위어 감독은 서른한 살 때 이 시대극을 신비롭고 우아하게 연출해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국민영화로 만들었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지만 내내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으스스한 긴장을 잃지 않는 개성 넘치는 스릴러.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적 환경 속에서 신부 수업을 받아오던 여학생들이 모처럼 행잉록이란 곳으로 소풍을 간다. 
그런데 소풍지에서 세 소녀가 흔적도 없이 실종되고, 그들을 찾아
 나선 여교사까지 없어진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겨울 바다에 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치바

부모님께 그들 사이를 인정받으려 떠났던 여정은 이별 여행이 되어버렸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츠네오는 경기 중 입은 부상 때문에 좋아하던럭비를 하지 못하게 된 게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생각해도 소용없는 일은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먼 훗날,
조제와의 지난 사랑에 대해 누군가 물을 때도 그는 그렇게 대답할수 있을까.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우리가 도망쳐왔던 그 모든 과거에 바치는, 돌아서서 뒤늦게 흘리는 눈물 같은 영화.

게으름 피울 수 있는 권리
<나니아 연대기>, 뉴질랜드

아름다운 해변과 풍요로운 농장, 돌아오는 차 안에서 "행운을 타고나셨군요" 하고 농담 삼아 말을 건넸더니 키라가 정색을 하고 답했다.

예전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그저 작고 조용한 내 나라가 답답하게만 느껴져 몇 년간 외국으로 떠돌았다고, 밖에 나가서야 스스로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깨달았다고, 다시 돌아온 나는 이 땅을 너무도 사랑한다고.


☆행복은 맛이 강하지 않은 최상급 포도주 같은 것이다. 
얕은 입맛에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뉴질랜드 남섬 캔터베리 지역에는 영화 <나니아 연대기>와 관련있는 여행상품이 나와 있었다. 이 영화가 주요 국가에서 개봉된 지불과 한 달 만인 2006년 1월 초부터였다. <반지의 제왕 2001~2003과<킹콩>2005에서 <나니아 연대기>까지, 세계인에게 뉴질랜드는 온통판타지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 등장한 장소를 외지인에게 소개하는 게 생활인로브 같은 키위들에게 판타지는 곧 하루하루의 리얼리티였다. 여행객과 원주민,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나와 너.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가르는 것은 각도일 뿐, 사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응축하는 상징일 것이다. 그게 공간이든 시간이든, 혹은 사람이든,

어디선가 풍겨오는 오래된 저택의 고가구 냄새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소피가 물었다. "한국에 언제 돌아가세요?" 미래의 시간과 과거의 공간, 그 불가해한 시공의 좌표평면 위 한 점이 내가 밟아야 할 귀환점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들 모두는 시간을 초대해 놓고 있었다. 어쩌면 우린 너무 서두르기 때문에 매번 늦는 게 아닐까. 전릭 질주하는 문명의 아찔한 속도 안에서 필요한 것은 혹시 이런 게 아닐까. 

게으름 피울 수 있는권리, 최선이라는 말에 쫓기지 않을 권리, 주저하고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있는 권리.

 잠시 스쳐 지났던 이 이국의 도시에서 늘 서두르기만 하는 나그네는 모처럼의 평안을 얻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분했다. 
어차피 여행에서 얻는 것은 학습이라기보다는 휴식이고 각성이라기보다는 추억일 테니.

봄의 판타지와 가을의 리얼리티. 떠나온 봄과 떠나갈 가을,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 속을 우리가 흘러가는 것이다.

봉인된 시간
<글루미 선데이>, 부다페스트

우울한일요일 filtomy Sunday‘ 을 뜻하는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부제는 ‘사랑과 죽음의 노래‘ 였다. ‘사랑‘과 ‘죽음‘과 ‘노래‘, 음울하면서도 감상적인 사랑 영화에 이 세 가지 외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남자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힌 그녀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아닐 때, 행복은 종종 무의미해진다.

일로나가 안드라스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다음날, 둘을 만난 사보는 말한다. "완전히 잃느니 한 부분이라도 가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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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기억 못해도 심장은 기억한다. 먼저 기억하는 것은 정신이지만, 끝까지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몸이다.

앞의 여학생이 《다윈상‘The Darwin Awards> 이라는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봤다. 국내에도 출간되어 나 역시 흥미롭게 읽은적이 있는 그 책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죽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류의 진화에 기여한 사람들의 실화를 모아놓은 책이었다. 바닷가에서 욕조를 보트처럼 띄워놓고 물놀이를 즐기다가 물이 들어온다고 물 빼는 바닥의 마개를 뽑아서 익사한 사람, 건물 옥상에서번지점프를 즐기기 위해 발을 묶고 아래로 뛰어내리다가 장력을염두에 두지 않은 밧줄의 긴 길이 때문에 바닥에 부딪쳐 사망한 사람까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실수로 마지막을 맞은 죽음의 사연들이 그 책에 빼곡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 1999, <어댑테이션 2002에 이어 또 하나의 걸작 시나리오를 써낸 찰리 카우프먼이 2005년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따냈다. 오래된 연인들이 갈등 끝에 서로에 대한기억을 모두 삭제하지만, 또다시 서로에게 끌리면서 재차 사랑에 빠지게되는 역설적인 사랑 이야기.

사랑을 말하면 사랑을 하게 된다
<러브 액츄얼리>, 런던

 "살아가는 일이 우울해질 때 난 히스로 공항으로 간다.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반갑게 포옹하는 풍경들을 넘치도록 쓸어 담으며 시작한다.

그 조용한 골목길의 줄리엣 집 2층은 낮인데도 밝혀놓은 장식용
 꼬마전구들이 사랑스럽게 빛났다. 그 집이 있는 곳은 줄리아 로버츠와 휴그랜트가 주연한 영화 <노팅힐>1999의 배경이 되었던 노팅힐 근처였다. <러브 액츄얼리>의 감독인 리처드 커티스는 <노팅힐>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다. 커티스는 자신이 직접 살아온 장소들을 <노팅힐이나 <러브 액츄얼리> 같은 영화 속에 심어놓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애틋해도 결국 모든 크리스마스는 지난 크리스마스‘가 되어버리고, 추억은 사랑의 과거 시제로 화석화된다.

런던을 관통하는 템스 강의 남쪽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템스 강에서 가장 예쁜 다리로 정평이 나 있는 앨버트 다리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 때마침 비가 그치고 선명히 무지개가 펼쳐졌다. 

옷을 사는 대신 음반 매장에 들어가 영화 속에서 캐런이 듣는 조니 미첼의 시디 보스 사이즈 나우 Both Sides Now)를 샀다. 담배를 수십 년간 피운 것 같은 목소리라고 남편 해리가 말하자, 캐런은 "조니미첼을 사랑해요. 진실한 사랑은 평생 가죠. 무미건조한 내게 감성을 불어넣은 스승이에요" 라고 대꾸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사랑을 하게 된다. 사랑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이유는 어디에서든 사랑을 애타게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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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한 타이밍에 의도치않은 순간, 미소를 지으며 눈이 마주친 둘.
옆 무덤의 남자 벤니, 옆 무덤의 여자 데시레.
서로에게 운명적인 사랑이지만 너무나 다른 둘.
자신의 삶은 조금도 양보않고 희생하지 않으려 눈치만 보던 그들은 결국 사랑만으로 함께할 수 없는 현실에 이별하게 된다.

이제 그 누구도 벤니가 내게서 보았던 것을 볼 수없을것이다. 그가 내게 보여주었던 것도 다신 볼 수 없을것이다. 그는 나를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주었지만이제 마법의 주문은 사라져버렸다.

한 시간이라는 시간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1분이 존재했다. 그리고 내 삶에서 그 1분 1분은 너무나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에는 물론 제대로 잠을 이루지못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놓쳐버린 많은 것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리고 매일 밤 새로운 것들이 점점더 많이 떠올랐다.

난 선택을 했고, 이젠 농장과 가정이라는 두 다리 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타와 함께. 다들 이홍게살아가드있었다. 분명 내가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문득 황새가 등장하는 오래된 농담이 생각났다. 황새를 본 적은 있지만, 믿지는 않는다는,
난 사랑‘을 해본 적은 있지만, 믿지는 않는다.

터겨버린 비눗방울을 되살리고
눈이 축 거긴 인형을 웃게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언젠가 바겐세일을 하는 신발 가게 꿈을 꾼 적이 있다.
진열대위에 놓인 수많은 신발 중에 끈이 달린 파란색 가죽 구두를 발견하고는 오른쪽 한 짝을 신어보았다.

난 나머지 한짝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찾아낸왼쪽 신발은 다섯 살아이에게나 맞을 것처럼 아주 작았다.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점원은 무심하게 말했다.

"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 가게에 딱 하나 남은 물건이니까요." 하지만 짝이 맞지 않는신발을 어떻게 산단 말인가? 발의 반쪽을 잘라내기라도 해야 하나? 나는 몹시 실망하며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페르타의 용수철도 그렇게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양철 오리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안의 용수컬시간이 흐르면 다시 작동이 가능해진다.
는 사실이다.

10월이 되자 평범한 기적이 일어났다. 신발 가게의 쇼윈도에서 끈이 달린 파란색 가죽 구두 한 쌍을 발견한 것이다. 꿈에서본 그 구두였다. 나는 당장에 가게로 들어가 신발을 산 다음, 곧바로 바꿔 신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전화를 걸었다.

난 기적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기적을 일으기는 게 내 일이기 때문이다.
씨를 뿌려 새로운 생명을 거두어들이는 일,
하지만 우리는 그 기적이 이디에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기적은 뒤에서 몰래 다가와당신의 목덜미를 움켜잡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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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여행은 흔히 꿈에 비유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 둘이 만나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여행과 영화라는 두 가지 판타지는 조급한 나그네를 맞아종종 서슬 퍼런 리얼리티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에 시간 탓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용없는 핑계였다. 여행뿐만이아니라 삶 자체가 시간의 문제일 테니까. 어쩌면 거듭된 여행에서내가 배운 게 있다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것이다.

봄의 판타지와 가을의 리얼리티
떠나온 봄과 떠나갈 가을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 속을 우리가 흘러가는 것이다.

세상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
러브레터 , 오타루

숲을 이룬 꽃은 시든다.
비포 선셋, 파리

<비포 선라이즈> 의 마지막 장면을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했다. 그 남자 제시와 그 여자 셀린은 과연 6개월 뒤에 빈 기차역에서 재회했을까.

비포 선라이즈>의 9년 후 상황을 그린 속편 <비포 선셋 의 궤적을 밟아 프랑스 파리를 돌아다니는 여정은 어쩔 수 없이 세월의 위력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비포 선셋>은 9년 전 그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있었던 일을 소설로 쓴 제시가 ‘저자와의 대화‘ 행사에 찾아온 셀린과 만나며 시작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의 재회가 이뤄진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서점으로 갔다. 파리 5구에 있는 이 유명한 헌책방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치쌓인 책더미 사이의 통로를지나서 열세 개의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갔다.

제시는 말했다. "제 삶은 평범합니다. 하지만 모든 삶은 드라마입니다." 사랑도 그럴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사랑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모든 사랑에는 휘몰아치는 드라마가 있다.

2층에서 내려오려다 입구에 붙은 글귀를 본순간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졌다. "나그네에게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엇갈림은 열정적인 재회보다 더 큰 의미를지닌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탁자 위 냅킨에 적힌 ‘르 퓌르 카페‘ 글씨 뒤에는 점 세 개가 말줄임표처럼 찍혀 있었다. 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오래전 그날처럼 삶과철학과 종교와 사회에 대해 폭넓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끝내 풀어내지 못하고 줄여버린 말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의 수명을 결정하는것은 결국 입 밖으로 내뱉은 낭만이 아니라 심장으로 삼킨 연민이다.

서로 새끼손가락만 걸고 산책하는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연인들이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드는 세월 앞에서 무모하게도 감정을 약속하는 사람들이다.

안타까웠던 9년 전을 떠올리며 셀린은 "다시 만났으니 추억을 바꿀 수 있어. 허무했던 우리의 마지막 대신"이라고 말하고, 제시는
"살아 있는 한 추억은 계속 바뀌지"라고 답한다. 
세월 앞에서 좌초한 감정을 목도한 어떤 연인들은 추억의 내용을 바꾸면서까지 기어이 감정을 살려낸다.

파리에 머물렀던 젊은 시절,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도센 강변의 헌책방 풍경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것은 100여 년 전 릴케가 적어놓은 글의 묘사가 내가 본 것과 아주흡사했다는 점이다.

"이따금씩 나는 센 강변의 작은 가게들을 지나간다. 골동품 가게나 작은 헌책방, 동판화 상점, 진열장에는 물건들이 가득 차 있지만가게를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전혀 거래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의자에 앉아서 뭔가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가게도 염려하지 않으며 대부분 개나 고양이를 기른다. 개는 주인 앞에 앉아 있고 고양이는 책 표지의 이름들을 지우려는 듯 나란히 꽂힌 책들을 가볍게 스치며 주변적막을 더욱 깊게 한다."

센 강의 다리인 퐁 생 마리를 지나기 직전에 본격적으로 분위기를잡는다.
"이곳을 지날 때면 다리 아래 그림자 속에서 모르는 사람과 눈을감고 키스를 하는 게 전통이랍니다."
물은 언제나 낭만을 부추긴다.

인연이란, 관계가 진행되는당시에는 말할 수 없는 단어다. <비포 선셋>을 감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Linktater의 성이 뜻하듯, 인연이란 시간이 흐른 ‘나중에서야 서로 연계‘ 되며 뒤늦은 깨달음을 안기는 법이다.

회상되는 것은 세월이 아니다. 우리가 문득문득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순간이다. 순간은 도도한 세월 앞에 늘 무릎을 꿇지만, 결정적인 지점에 되살아나서 그 모든 시간을 무화시킨다. 지루한 영원은 폭발하는 찰나를 동경한다.

편안하면서 슬프고, 묵직하면서 살짝 떨리는 니나 시몬의 노래 <당신이알았더라면 You Knew)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알았더라면, 당신이 믿었더라면, 당신이 있었더라면,

사랑은 소화불량으로 죽는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시카고

한때 가장 높았던 빌딩‘은 ‘현재 가장 높은 빌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척도로나 사용될 뿐이다. 한때 그토록 아름다웠던 사랑‘은,
현재이기에 가장 생생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사랑‘ 앞에서 감상적인 원경으로만 희미하게 흔적을 남긴다. 어느새 시어스타워가 까마득히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드레이크 호텔에서 닉 드레이크를들으면 멋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오산이었다. 기타 반주 하나로 고독과 절망을 나지막이 토해내는 영국 포크 가수 닉 드레이크의 목소리와 함께 시카고의 첫밤을 맞고 있자니 일순간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노래웨이 투 블루Way To Blue)가 의미하듯 그건 우울로 가는 길이었다.

사랑은 굶주려 죽지 않는다. 그것은 늘 소화불량으로 죽는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은
<이터널 선샤인>, 몬탁

"사랑은 자동차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저 핸들과 승객, 그리고 도로 사정뿐이다."
프란츠 카프카

좁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뻑뻑한 핸들 탓을 했다. ‘밸런타인 레인123번지‘가 나올 때까지 급격하게 휘어지면서 이어지는 도로를 뱅뱅 돌며 한참을 헤맸다.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지도책 뒤져가며 영화의 촬영지를 찾이나서는 여정은 늘 이런 식이었다.
뉴욕시 북쪽 20여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욘커스시의 평일 오후는한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함께 지내는 기쁨보다는 부대끼는 권태가 더 커져서 이별을 맞게 된 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그런 영화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거리 이름이 낭만적이기 이를 데 없는 ‘밸런타인 길‘ 이라니. 마약으로 신음하는 마을 한가운데 우뚝 선 아파트 이름이 낙원을 앙망하는 ‘에덴 골짜기‘ 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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