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여행은 흔히 꿈에 비유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 둘이 만나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여행과 영화라는 두 가지 판타지는 조급한 나그네를 맞아종종 서슬 퍼런 리얼리티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에 시간 탓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용없는 핑계였다. 여행뿐만이아니라 삶 자체가 시간의 문제일 테니까. 어쩌면 거듭된 여행에서내가 배운 게 있다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것이다.

봄의 판타지와 가을의 리얼리티
떠나온 봄과 떠나갈 가을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 속을 우리가 흘러가는 것이다.

세상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
러브레터 , 오타루

숲을 이룬 꽃은 시든다.
비포 선셋, 파리

<비포 선라이즈> 의 마지막 장면을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했다. 그 남자 제시와 그 여자 셀린은 과연 6개월 뒤에 빈 기차역에서 재회했을까.

비포 선라이즈>의 9년 후 상황을 그린 속편 <비포 선셋 의 궤적을 밟아 프랑스 파리를 돌아다니는 여정은 어쩔 수 없이 세월의 위력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비포 선셋>은 9년 전 그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있었던 일을 소설로 쓴 제시가 ‘저자와의 대화‘ 행사에 찾아온 셀린과 만나며 시작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의 재회가 이뤄진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서점으로 갔다. 파리 5구에 있는 이 유명한 헌책방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치쌓인 책더미 사이의 통로를지나서 열세 개의 좁은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갔다.

제시는 말했다. "제 삶은 평범합니다. 하지만 모든 삶은 드라마입니다." 사랑도 그럴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사랑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모든 사랑에는 휘몰아치는 드라마가 있다.

2층에서 내려오려다 입구에 붙은 글귀를 본순간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졌다. "나그네에게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엇갈림은 열정적인 재회보다 더 큰 의미를지닌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탁자 위 냅킨에 적힌 ‘르 퓌르 카페‘ 글씨 뒤에는 점 세 개가 말줄임표처럼 찍혀 있었다. 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오래전 그날처럼 삶과철학과 종교와 사회에 대해 폭넓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끝내 풀어내지 못하고 줄여버린 말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의 수명을 결정하는것은 결국 입 밖으로 내뱉은 낭만이 아니라 심장으로 삼킨 연민이다.

서로 새끼손가락만 걸고 산책하는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연인들이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드는 세월 앞에서 무모하게도 감정을 약속하는 사람들이다.

안타까웠던 9년 전을 떠올리며 셀린은 "다시 만났으니 추억을 바꿀 수 있어. 허무했던 우리의 마지막 대신"이라고 말하고, 제시는
"살아 있는 한 추억은 계속 바뀌지"라고 답한다. 
세월 앞에서 좌초한 감정을 목도한 어떤 연인들은 추억의 내용을 바꾸면서까지 기어이 감정을 살려낸다.

파리에 머물렀던 젊은 시절,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도센 강변의 헌책방 풍경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것은 100여 년 전 릴케가 적어놓은 글의 묘사가 내가 본 것과 아주흡사했다는 점이다.

"이따금씩 나는 센 강변의 작은 가게들을 지나간다. 골동품 가게나 작은 헌책방, 동판화 상점, 진열장에는 물건들이 가득 차 있지만가게를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전혀 거래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의자에 앉아서 뭔가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가게도 염려하지 않으며 대부분 개나 고양이를 기른다. 개는 주인 앞에 앉아 있고 고양이는 책 표지의 이름들을 지우려는 듯 나란히 꽂힌 책들을 가볍게 스치며 주변적막을 더욱 깊게 한다."

센 강의 다리인 퐁 생 마리를 지나기 직전에 본격적으로 분위기를잡는다.
"이곳을 지날 때면 다리 아래 그림자 속에서 모르는 사람과 눈을감고 키스를 하는 게 전통이랍니다."
물은 언제나 낭만을 부추긴다.

인연이란, 관계가 진행되는당시에는 말할 수 없는 단어다. <비포 선셋>을 감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Linktater의 성이 뜻하듯, 인연이란 시간이 흐른 ‘나중에서야 서로 연계‘ 되며 뒤늦은 깨달음을 안기는 법이다.

회상되는 것은 세월이 아니다. 우리가 문득문득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순간이다. 순간은 도도한 세월 앞에 늘 무릎을 꿇지만, 결정적인 지점에 되살아나서 그 모든 시간을 무화시킨다. 지루한 영원은 폭발하는 찰나를 동경한다.

편안하면서 슬프고, 묵직하면서 살짝 떨리는 니나 시몬의 노래 <당신이알았더라면 You Knew)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알았더라면, 당신이 믿었더라면, 당신이 있었더라면,

사랑은 소화불량으로 죽는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시카고

한때 가장 높았던 빌딩‘은 ‘현재 가장 높은 빌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척도로나 사용될 뿐이다. 한때 그토록 아름다웠던 사랑‘은,
현재이기에 가장 생생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사랑‘ 앞에서 감상적인 원경으로만 희미하게 흔적을 남긴다. 어느새 시어스타워가 까마득히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드레이크 호텔에서 닉 드레이크를들으면 멋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오산이었다. 기타 반주 하나로 고독과 절망을 나지막이 토해내는 영국 포크 가수 닉 드레이크의 목소리와 함께 시카고의 첫밤을 맞고 있자니 일순간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노래웨이 투 블루Way To Blue)가 의미하듯 그건 우울로 가는 길이었다.

사랑은 굶주려 죽지 않는다. 그것은 늘 소화불량으로 죽는다.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은
<이터널 선샤인>, 몬탁

"사랑은 자동차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저 핸들과 승객, 그리고 도로 사정뿐이다."
프란츠 카프카

좁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뻑뻑한 핸들 탓을 했다. ‘밸런타인 레인123번지‘가 나올 때까지 급격하게 휘어지면서 이어지는 도로를 뱅뱅 돌며 한참을 헤맸다.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지도책 뒤져가며 영화의 촬영지를 찾이나서는 여정은 늘 이런 식이었다.
뉴욕시 북쪽 20여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욘커스시의 평일 오후는한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함께 지내는 기쁨보다는 부대끼는 권태가 더 커져서 이별을 맞게 된 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그런 영화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거리 이름이 낭만적이기 이를 데 없는 ‘밸런타인 길‘ 이라니. 마약으로 신음하는 마을 한가운데 우뚝 선 아파트 이름이 낙원을 앙망하는 ‘에덴 골짜기‘ 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