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잉크냄새 > 고독도 삶의 연장선상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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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평점 :
책꽂이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밀란 쿤테라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마꼰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부엔디아 가문의 6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전염성 불면증, 유령과의 대화, 흙과 석회를 파먹는 레베까, 하늘로 승천하는 레메디오스, 죽음을 알리는 피, 노란 꽃비,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등 다분히 신화적이고 서사적이다. 또한 군부로 상징되는 식민지화, 바나나 농장으로 대변되는 미국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화와 비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하는가.
한 남자를 죽임으로써 고향에서 도망치듯 떠나와 새로운 도시 마꼰도를 건설한 부엔디아 가문의 6대에 걸친 처절한 고독과 죽음, 불완전한 사랑, 그리고 가문의 멸망을 보여주고 있다. 부엔디아 가문은 후천적이라기보다 선천적으로 유전형질 속에 고독이라는 인자를 운명처럼 품고 살다 죽음에 이른다. 아르까디오와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대물림 받으며 살아가는데 전자는 충동적이고 모험적이며 후자는 명민하며 은둔성을 지닌다. 자신만의 세상과 권력과 식탐과 성에 집착했던 그들중 특히 고독했던 인물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다. 아내의 죽음을 접하고, 독립전쟁에서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나 완벽한 도덕적 타락을 경험한다. 세속적 가치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만의 세상,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일에 빠져드나 다시 한번 열일곱명의 아들의 암살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유령의 영혼마저 사라지도록 묶여있다 죽어간 밤나무 아래에서 죽음을 맞는다. 우르슬라가 뱃속의 대령이 우는 소리를 듣고 결코 남을 사랑할수 없는 운명이라 여겼던 남자이다. 아우렐리아노란 이름을 물려받는 이들이 그토록 집착한 멜키아데스의 양피지는 결국 부엔디아 가문의 멸망사를 기록한 종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 허무한 결과이다. < 가문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여 있고 최후의 인간은 개미밥이 되고 있다>는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백년동안 고독했던 것일까. 고독의 끝은 결국 허무함 뿐이다.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에르케코르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소설이다. 아니 가문의 순환을 통해서 죽음으로도 넘을수 없는 고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고독의 일반적 의미가 홀로 있음으로 인한 외로움이라면 그 반대는 관계맺기가 아닐까. 부엔디아 가문의 남자들은 결국 순환적인 고독한 삶을 살고 마꼰도라는 한정된 공간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들은 성, 특히 근친상간을 통하여 더욱 고독하게 되는데 근친상간은 그들의 왜곡되고 한정된 인간적 관계맺기의 한계라고 할수 있다. 그들의 이름이 순환하듯 그들의 관계맺기는 근친상간이란 순환적 의미의 성으로 국한된다. 마꼰도말고 다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가 없다는 것이 공간적 관계의 한계를 보여준다. 결국 그들의 고독은 인간적, 시간적, 공간적 관계의 실패로 뒤따르는 필연적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고독은 거리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삶과 죽음의 거리, 사랑과 증오의 거리, 희망과 절망의 거리....상반되는 의미의 거리뿐만 아니라 동일한 의미 사이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그 거리 사이에 운명처럼 놓여있는 줄을 얼마나 잘 타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이 비단 사랑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듯 싶다. 삶의 모든 가치들에 적용되는 말이다. 고독은 극복해야할 대상도 체념해야할 대상도 아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삶, 사랑, 죽음처럼 고독도 삶의 연장선상에 서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