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df2234 > '밤마다 연필을 깎다 잠드는 버릇'을 들여준 그대들에게
쨍한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300
박혜경.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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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에게 아주 늦게 찾아왔다.

명색이 우리 문학을 배웠지만 그쪽 공부를 통해 밥 벌어먹고 살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떤 운명의 예비하심인지는 몰라도 알량한 전공을 들입다 쏟아부어도 모자랄 직업을 갖게 되었다. 매일매일 시집과 소설집을 뒤져 인용문들을 찾아 헤맸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일 때문이었을 뿐, 작품을 읽는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주변의 좋은 벗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시를 읽었고 문지시인선을 알고 있는 내 또래가 으레 통과의례처럼 겪게 되는 기형도의 시집을 그중 누가 선물했었던 것 같다. 시가 마음 한구석에 오롯이 자리 잡기 시작했던 건 시집을 선물했던 그 사람 역시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했었던 때였는지도 모른다. 소중한 시집을 찬찬이 넘기기 시작한 그때는 나도 어느덧 벗들의 어깨 너머로 시를 들여다보던 시절을 훌쩍 지나 이성복, 황지우, 기형도 등의 이름을 알기 시작했고 더 위로는 황동규, 정현종, 김광규를, 그리고 최근에는 박용하, 김중, 진은영의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시,라는 것이 가슴에 남는 시절이 따로 있을까마는 유독 화인처럼 남는 시절은 역시 시와 사랑을 어느 순간 동일시하게 되는 이십대가 아닌가 싶다. 시도 그렇게 알면서도 모를 것 같은 감정들과 함께 찾아왔고 천천히 이십대가 저무는 지금 문득 가슴 한 켠에 고이 모셔진 것 같다. 그러나 300호 시선집을 손에 받아든 순간 서점과 도서관, 벚꽃과 낙엽, 이른 아침이며 한밤중 같은 '시와의 시간'이 문득 다시 찾아든다.

시집들을 나날의 세상일에 찌들어 책장 한구석으로 모두 몰아넣고 살았었지만 300호 시선집과 함께 묶인 노트의 빈 공간을 본 순간 '시와의 시간'이 남겨준 쨍함-혹은 아래의 어느 리뷰에서 쓰신 것처럼 찡함-을 느끼면서 무언가 적어보고픈 충동을 느낀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란, 어쩌면 그런 작은 '쨍함' 또는 '사랑의 시절의 다른 이름'으로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나에게 그런 '쨍한 사랑'을 가르쳐준 시의 다른 이름은 문지시인선일 것이다. 그렇게 시의 이름을 가르쳐주고 사랑의 다른 이름을 가르쳐준 사람은 가고 없어도 문지시인선 아래에서 '밤마다 연필을 깎다 잠드는 버릇'을 들였듯이 아마 이 한권의 시선집과 노트도 오랜 밤동안 연필을 깎게 만들 것 같다.

사랑을 했던 사람들이면 누구나 중얼거릴 수 있으리라. "우리도 한때는 아름다운 불씨였다."(기형도,「廢鑛村」)고. 그러나 문지시인선은 한때가 아닌, 작지만 찬란한 우리 문단의 불씨로 오래오래 남아주기를 기대한다.

* 알라딘의 오랜(?) 손님이지만, 그동안은 정말로 '손님'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리뷰다. 쑥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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