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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가장 귀중한 것이다.
개개인의 일상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 다양성을 가늠하기 조차 힘들 때가 많다. 오죽이나 그 다양성이 다양하면, 건강 분야에서는 전 세계 60억의 인구를 두고, 그 60억의 치료 방법이 각기 다르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기적의 밥상?'(기억이 왜곡이 있을지도)과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버섯을 먹었는데, 병이 나았다'는 말을 흘려보내지 않고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버섯은 정말 그 사람에게 적합한 음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관점을 돌려 보면, 그게 나한테도 적합하리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저 프로그램의 아무개의 버섯처럼, 나는 나에게도 적합한 무엇인가를 찾아 끊임없이 탐색한다. 그게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일상의 수집이다.
진시황은 돈과 권력, 여자와 많은 수하들을 거느렸지만 불로 장생을 찾아 일생을 헤매었다. 그 가운데, 인삼이며 홍삼이며, 수은이며 갖가지 방법들을 찾아 자신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아 다닌다.
그렇다고 우리가 진시황을 약 덕후라고 폄하하지도 않는다.
저자인 윌리엄이 말하는 수집의 핵심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끊임 없이 회의하는 과정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진시황은 왜 그토록 불로장생에 집착했을까?
아마도 추측컨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 만족스러움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곧 시간과 생명의 존속과 유지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라는 자기만의 답을 얻었을 것이고,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해 자신이 접근 가능한 논리 안에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시도했을 것이다.
책 속의 저자 또한 마찬가지다.
저자인 윌리엄은 끊임없이 허무했다. 신경정신과 질환을 가진 누나와 그녀를 돌보느라 소진해버린 부모님들, 그리고 항상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가족 분위기. 그들 속에서 저자가 선택할 수 있는건 무엇일까?
그야말로 저자는 안온감을 찾아 헤매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가 갖다 버린 쇳조각에는 누군가의 손길과 시간이 투영되어 있고,
우표의 지난 컬렉션에는 디자이너의 희망과 야심이 들어가 있고,
지난 시즌의 통조림 캔에는 시간의 누적이 보여주는 경향성이 들어가 있다.
저자는 그 속에서 익숙한 감각을 찾고, 그 물건들 속에서 헤엄친다.
미니멀리즘이 물건에 대한 우리의 심리 판도를 좌지우지 하는 가운데도,
막시멀리즘을 멀리하지 못하는 우리는
왜 그토록 물건에 심리를 투영하고 있는지를 회의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우리는
물건이란 불특정 다수의 대상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물건의 수집이라 하더라도
의미 부여의 정도성에는 차이가 있다.
저자는 대학교수인 직업을 가진만큼, 유식하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컬렉션의 의미도 남다르게 부여한다.
통조림 캔에서는 역사적인 광고 트렌드와 소비 심리를 해체하며
쇠붙이 조각에서 타인의 감성과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낸다.
빈 통의 과자 상자와 여느 나라의 조각품에서 세계의 시대사와 나라의 상호맥락성을 탐닉한다.
그래서, 그 의미에 대해 폄하하기 힘들다.
물론 누군가의 눈에는 그렇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아놓은 쓰레기 집합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우리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회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도,
우리가 소유한 대상들도,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어떤 것을 통해
새삼스레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주변을 다시 되새기는 일들을 하라고
아주 조심스레 자신의 일부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저자의 정리되지 않은 듯한 삶의 일부에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의 편린들을 꺼내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