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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ㅣ 펭귄클래식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결국 체호프가 또 우리를 이길 것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일을 할 뿐이다.”
체호프는 러시아의 근대 극작가로 익히 우리에게 알려져 왔다.
이번에는 극작가로서의 체호프는 잠시 접어두고 소설작가로서의 체호프를 얘기하고자 한다.
체호프의 소설들은 대부분 단편이며 간결하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글자 수에 따라 원고료를 지급했기에,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대문호의 작품도 길다는 느낌을 받기 쉬운데, 체호프는 그에 연연하지 않고 재밌고 간결하게 글을 쓰는 것에 집중했다. 지금 소개할 소설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 이 소설도 간결하기에 읽기 크게 부담이 없는 소설이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얄타에서 만난 남녀의 불륜 행각이다. 도덕적으로는 찌푸려지는 소재를 통해서 체호프는 사랑을 말하고자 한다.
1)구로프에 관하여
[“저급한 종족들!”
멋대로 불러도 될 만큼 여자들에게 제대로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그 ‘저급한 종족’이 없이는 단 이틀도 살 수가 없는 위인이었다. 남자들이 모인 곳에서는 지루하고 불편해했으며, 말이 없고 차가웠다. 하지만 여자들 사이에 있을 때는 편안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잘 알았다. 심지어 여자들과는 말없이 앉아 있어도 힘들지 않았다.
외모, 성격, 그리고 기질 자체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어 그는 쉽게 여자들의 호감을 얻었고, 그네들을 끌어당겼다. 그도 이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자신도 어떤 힘에 이끌려 여자들에게로 향하곤 했다.]
이 대목은 구로프의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일찍이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하여 이미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중년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여자를 만나고 다니며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았다 생각했다.
여자들 이야기가 나올 때면 저급하다고 학을 떼면서 여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모순덩어리, 그것이 구로프이다. 비단 이 대목뿐만 아니라 작 중에서 구로프는 모순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 구로프는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미래에 자신이 겪을 고난에 대해 염려는 하지만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운명의 피해자라는 견해가 있으며 오직 사랑에 집중한다.
2)안나에 관하여
[그는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를 이야기했고 참을 수 없이 열정적이었으며, 그녀 곁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종종 생각에 잠겨 그가 그녀를 존중하지 않고,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며 속물스러운 여자로 여긴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제 안나의 이야기이다. 단출한 문장이지만, 안나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나는 도덕적으로 민감한 여자이다. 그녀 역시 구로프와 비슷하게 일찍 결혼하여 남편에게 사랑을 못 느끼고 흡사 ‘하인’ 같다고 여기지만 당시 사회적 도덕관에 맞추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아는 여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타락한 여자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뿐이다. 남편과의 관계를 청산하지도, 구로프와의 밀회를 그만두지도 않고 오직 하소연할 뿐이다. 작 중 구로프는 안나에게 최선을 다하며 사랑을 바친다. 물론 그 방식이 전부 옳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안나는 확신이 없다. 그동안 살아오고 배워온 가치관이 확신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하지만 구로프를 사랑하기에 그를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안나는 결정한 것이다. 사랑으로 도덕에 변명하기로
3)구로프와 안나의 사랑에 관하여
[그러자 조금만 지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새롭고 아름다운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구로프, 안나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둘은 새장에 갇힌 새와 같은 형국이다. 둘의 만남은 불륜이기에, 파국을 부를 것이다. 그들도 그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희망적일 것이라고 조금 뜬금없지 않은가?
여기서 영화 ‘졸업’의 결말이 겹쳐졌다. 결국, 사랑을 이루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했고 함께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다음은? 과연 그다음이 대책 없이 희망적일 수 있을까?
그래서 체호프는 다음 문장을 덧붙인다.
[아직 멀고도 먼 길이 남아 있으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두 사람 모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흔히 사랑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사랑은 좋고 행복한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사랑이 아름답기만 할까? 많은 사람이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사랑이라 지탄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체호프는 가장 손가락질받을 수 있는 사랑인 불륜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사랑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사랑은 우리 삶 그 자체이다.
구로프와 안나의 사랑은 천박한 연애로 그려진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불륜을 더해 고결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이 선악을 구별조차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또 다른 안나처럼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심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편하게 사랑에만 빠지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미래를 염려하면서 그저 삶을 살아가고 사랑에 대한 희망을 품기도 한다.
이것이 체호프식의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