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5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지현 옮김 / 별글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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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는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2년 전에 이미 읽었다. 박찬국 씨의 저서를 읽다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바로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라는 부분을 읽고 관심을 가져 구매했다. 디자인적으로도 퍽 만족하여 샀던 기억이 있다. 처음 읽었을 때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최근에 어디 멀리 갈 일이 생겨 심심할 때 읽을 용도로 가져갔는데 그때의 인상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나에게서 이상적인 인간이란 도스토옙스키의 미쉬낀 공작이나 알료샤가 아니라 오히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인 거 같다. 노인은 가난하고 가족도 없으며 육체적으로도 뛰어나다고 할 수 없으나 그 누구보다 강인하다. 무엇 때문에 강인하다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노인이 고기와 사투하기 전부터 이미 강인한 인상을 받았다. 사람이 참 견고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던 거 같다. 노인이 바다에 나가 고기와 사투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손에 상처가 생기고 쥐가 나고 어깨와 등으로 줄을 고정시키면서 겪는 고통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나타난다. 노인의 심리도 그런 것에 초연하기보다는 고통스러워하고 때로는 스스로 다그친다. 현재 부재한 것에 안타까워하는 모습은 서글픈 감상도 든다. 하지만 노인은 결단코 포기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으면서 고기와 사투를 벌인다. 인간적인 심리를 보이고 악조건을 가졌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 거기서 나는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이상적인 인간을 발견했다.



노인이 고기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사실 니체 생각이 많이 났다. 노인은 고기를 존중하고 고기의 강함을 인정한다. 심지어 고기를 사랑하는 느낌도 받았다. 그런데도 노인은 진심으로 고기를 죽이고 싶어 한다. 나는 여기서 니체가 적을 대하는 태도가 생각났다. 적을 존중하고 인정해라, 심지어 사랑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꼭 죽여버려라. 우리가 진정한 적에게 가져야 할 태도란 원한이나 증오가 아니라 존중이다. 존중을 하고 죽이는 것, 증오나 원한을 가지고 죽이는 것보다 훨씬 유쾌하지 않은가



상어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점이 많다. 남의 성과를 가로채는 부정적인 인간상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은데, 사실 상어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 아니냐는 반발심리가 들었다. 어긋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누가이기든 상관없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이 이기든 고기가 이기든, 가치 있는 적을 만났을 때부터 싸움 자체가 중요한 거지 그 승부는 그리고 그 전리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싸움으로 내가 더 강인해졌다는 것에 의미를 찾으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싸움에서 이길 때마다 살코기를 찾는 게 멋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이 소설의 인상 깊은 구절로 마무리하려 한다. 인간은 파멸 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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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다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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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은 니체가 자신의 철학의 입문서로 직접 추천한 저서이다. 그렇다고 니체를 처음 접하면서 “선악의 저편”을 읽는 것이 좋으냐는 다른 문제인 거 같다. 관련 학자들은 “이 사람을 보라”를 입문서로 많이 추천한다고 한다. 니체라면 자신의 저서를 원전 그대로 아무 렌즈를 끼지 않고 읽는 것을 추천했을 것이다. 실제로 니체 원전을 바로 읽는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아포리즘의 형식은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 무게감 웅장함. 그리고 심적 울림은 이차 저작이 따라올 수 없는 특유의 가치이다. 하지만 철학을 구조화하여 머리에 집어넣기를 원한다면 이차저작도 추천할만하다. 원전은 심적 울림의 폭발성만큼 오독의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원전을 토대로 한 이차저작은 예방의 차원에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고병권 씨가 쓴 “선악의 저편” 강독서이다. “선악의 저편”을 같이 해석해나가는 느낌 정도로 이해하면 편할 거 같다. 전체적인 구조와 순서를 “선악의 저편” 그대로 따르고 있고 원전의 내용도 대부분 들어가 있어 상당히 만족하면서 보았다. 흔히 니체의 이차저작을 보려 할 때 염려하는 것이 이게 니체의 생각인지 저자의 생각인지 헷갈리거나 의도적으로 저자의 생각을 함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다행히 니체의 말은 주석으로 표시를 해두고 저자의 말은 “내 생각”이라는 말을 붙여줘서 좋았던 거 같다. 사실 책을 배송받았을 때 책 상태가 별로라 실망했는데 내용이 워낙 좋아 그 실망을 상쇄했던 거 같다.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비판에 관하여 많이 다듬을 수 있었다. “진리가 여자라면”이라는 그 유명한 문장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진리를 여성으로 대하여야 한다. 플라톤주의자처럼 독단적으로 너무 진지하게 진리를 대한다면 진리는 플라톤주의자를 부담스러워하고 꺼릴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스타일을 갖고 유쾌하게 진리를 대하라고 한다. 이 내용은 자주 들어봤던 내용이었으나 내가 사뭇 충격을 받은 것은 그러니 절대 진리를 위해 순교하지 말라는 니체의 말이었다. 나는 사실 진리를 위해 순교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내 인생을 그렇게 합리화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니체는 진리를 그렇게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한다. 진리가 무엇이길래? 아니 애초에 왜 진리이어야 하나? 라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고통을 대하는 고귀한 자의 태도, 고통은 사람을 더 고귀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은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리게 했다. 삶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삶을 더 충만하게 느끼기 위해 고통이 필요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자연스럽게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니체를 먼저 알고 그 영향을 받아 도스토옙스키에 심취했기에 도스토옙스키 속에서 니체를 발견하거나 니체 속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발견하면 반가운 마음이 많이 드는 거 같다.





“선악의 저편”이라는 제목 때문에 우리가 무슨 선악의 저편이라는 저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거 같다. 과격한 해석일지도 모르겠으나 니체가 말하는 선악의 저편은 우리에게로 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다려야 한다. 선악의 저편에 선악을 넘어선 나를 내가 기다린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선악을 넘어선다는 것과 도덕을 부셔야 한다는 말 때문에 니체를 도덕 상대주의자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니체는 오히려 도덕의 위계를 말했다. 여기서 위계란 단순히 줄 세우기가 아니라 도덕을 역사 문화 등으로 유형화하여 위계를 세운다는 것이고 그것을 가장 크게 유형화하면 주인 도덕 노예도덕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나만의 가치, 나만의 도덕을 만드는 입법자가 되라고 요구하니 도덕 상대주의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고 니체 자신이 자랑스러워했듯 비도덕주의자가 더 어울리는 거 같다.



이 책을 읽고 많은 감상이 들었지만 하나 기억에 남는 개념은 “내가 나를 기다린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초인은 결국 “나”다. 나는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지만 잘한다. 내가 왜 이리 오지 않느냐 불평은 하지 않으려 한다. 기다림이 길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멀리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만큼 이 세상의 평범과 멀리 있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가장 늦게 도착하는 빛은 가장 멀리 있는 별에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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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악령 1~3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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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 중 그 네 번째로 “악령”을 읽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가장 읽기 힘든 소설이었다.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접한다면 결단코 추천하지 않고 가독성이 좋은 소설을 원한다면 역시 추천하지 않는다. 읽기가 몹시 힘들다. 1권은 특히 시점도 일관되지 않고 사건도 친절히 설명해주기보다 모호한 면이 많아서 이해하기 어려워 읽는 속도가 느렸다. 그래도 2권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짐짓 추리해가면서 읽는 버릇을 들이다 보니 조금은 수월하게 읽었던 거 같다. 소설의 장르를 나누자면 정치 소설이다. 상당히 정치적이고 도스토옙스키의 정관이 들어가 있다. 무신론 무정부주의 허무주의를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네차예프 사건을 토대로 소설을 구성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답게 한 사건의 끔찍함에서 그치지 않고 네차예프 사건을 토대로 더욱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구성했기 때문에 그 사건을 몰라도 아주 어려움은 없을 거 같다. 나도 왠지 스포일러를 당할 거 같아서 네차예프 사건의 상세한 사항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찾아봤다.



“악령”은 제목에서부터 예감하듯 끔찍한 이야기이지만 이상하게도 도스토옙스키 소설 중 어느 것보다 희극적이다. 인물들의 행동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죽음과 음모가 난무함에도 등장인물의 행동은 어딘가 어색해 보이며 한심해 보인다. 흡사 비웃음을 유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언급했듯 이 소설은 정말 많은 등장인물이 죽는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죽음이 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악령”은 살아남은 인물이 손에 꼽을 정도로 주요 인물들이 마구 죽는다. 아마 “악령”의 어원 돼지 떼들이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제목이나 내용상에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많이 담고 있다. 그래서 읽기에 머리 아프기도 하고 그만큼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거 같다.



책의 주인공은 단연 스타브로긴이지만 그 사람 다음으로 특별히 기억나는 인물은 키릴로프이다. 도스토옙스키가 긍정적으로 그린 인물은 샤토프라고는 하지만 너무 멍청해 보여서 그런가 샤토프에게는 영 정이 안 갔다. 키릴로프에는 정이 갔다기보다는 그 특유의 사상이 인상적이었으며 니힐리즘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흥미가 갔다. 키릴로프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야 신이 된다. 그러므로 그걸 인지하고 자살을 하면 인신이 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니힐리즘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완전히 무위로 살고 자살을 예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듯 삶의 순간순간을 만끽하려고 행동한다. 이런 키릴로프에게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이 많은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최후를 그린 도스토옙스키의 의도를 생각했을 때 니힐리즘의 역설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타브로긴은 사실 마지막까지 신비스러운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참칭자 드미트리를 형상화한 건가? 생각했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주인공을 그 정도로 단순하게 그리지는 않았다. 사실 주인공임에도 이 사람의 내면이 초반부에는 거의 묘사되지 않기 때문에 행동의 이유도 이 사람의 과거도 하나같이 수수께끼였다. 리자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어렴풋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마지막의 “티혼의 암자에서” 부분의 고백에서 그의 내면을 읽을 수 있었고 신비로움이 조금은 해소된 느낌이었다. “티혼의 암자에서”가 원래는 “악령”에서 빠져있다는 사실에서 유추했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스타브로긴의 신비함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악령”은 희극의 얼굴을 한 비극이다. 그렇기에 분명히 비극인데 느끼기엔 뭔가 희극 같고 그런 혼란이 많아서 읽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거 같다. 스타브로긴이 실제로 악령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랐는데 모든 사람의 내면에 악령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내면에는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있을 것이다. 단지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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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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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과 공포



공포소설에서 추리가 필수 요소이듯이, 역으로 추리소설에서도 공포가 필수적이다. 추리 없는 공포가 맹목적이듯이 공포 없는 추리는 흥미진진하지 않다.

<딥슬립>도 공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물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귀신 얘기라든지 그런 공포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공포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귀신이야기 같은 비현실적인 공포보다는 사람이 저지르는 기상천외한 악행으로 인한 현실적인 공포가 더욱 와 닿았다.

귀신이 아무리 무서워도 사람에 못 미친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요사이에는 기상천외한 범죄기사에 소위 사탄드립이라는 것이 성행할 정도이니 옛날 귀신 얘기는 애교로 보일 정도이다.

<딥슬립>에서 제시되는 공포도 현실적인 공포이다. 1930년대에 발간된 소설이기 때문에 공포에 대한 포인트가 조금은 다를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살인, 협박등에 대한 내용은 같기 때문에 공감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사실 공포는 무지에서 많이 비롯된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공포를 잘 느끼지 않는다. 잘 모르는 것, 미지의 영역에서 사람들은 공포를 느낀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무서운 이야기들도 들여다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당시 사람들에 게 있어 미지의 영역들을 공포로 해석하고 이야기로 풀어낸 것들이 많다.

<딥슬립>같은 추리소설은 미지의 영역으로 공포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탐정과 같은 주인공들 이 그 수수께끼를 다 풀어내고 공포를 해소해주기 때문에 더 많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탐정 필립말로



필립말로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대부분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셜록홈즈와 함께 탐정이미지를 양분하는 캐릭터 라고는 하지만 셜록홈즈에 비하면 그 유명세가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필립말로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면 물론 그도 못 하는 것이 없는 대단한 인물, 소위 먼치킨 캐릭터이나 인간적인 매력을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는 검찰 수사관 출신이다, 그렇기에 수사방식이 지금도 저렇게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는 거칠 것이 없다. 사건 해결에 있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묘한 술수를 쓰기도 하고 총으로 협박을 가하기도 한다. 흔히 선의 편에 서있는 주인공들이 악에 맞서 싸울 때 답답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필립 말로는 그런 것에 있어서 전혀 답답함을 주지 않는다.

셜록홈즈에 비해 더욱 매력적으로 느낀 부분은 사실 셜록홈즈보다는 덜 똑똑하다고 느꼈기 때 문이다

사실 셜록홈즈는 진작 사건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한 경우가 많고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단한 위기에 놓여있어도 다 준비된 경우가 많았다.

필립말로도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으나 셜록홈즈에 비해서는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에 있어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도 많고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싸우는 경우도 많아서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이런 매력적인 인물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흔히들 필립말로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전형이라고 한다.

하드보일드 문학이란 비정 냉혹의 뜻으로 감상에 빠지지 않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 는 형식의 문학이다.

필립말로가 악인은 아니지만 냉정해보이는 것이 사실이기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겠지만 이러 한 인물유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그에게 빠질 것이라 생각한다.





깊은 잠



<딥슬립>을 해석하면 깊은 잠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깊은 잠은 문자 그대로의 깊은 잠이라기보다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스턴우드 장군이 사건을 의뢰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음란도서사업자, 살인, 마약파티, 나체사진 협박등 지금 시대에 봐서도 파격적인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역겨운 정도는 아니고 적당히 흥미를 유발할 정도여서 큰 무리는 없었다. 책의 마지막 장의 한 단락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과 공기와 같다. 죽어 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 쓰지 않고 단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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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펭귄클래식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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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체호프가 또 우리를 이길 것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일을 할 뿐이다.”



체호프는 러시아의 근대 극작가로 익히 우리에게 알려져 왔다.

이번에는 극작가로서의 체호프는 잠시 접어두고 소설작가로서의 체호프를 얘기하고자 한다.

체호프의 소설들은 대부분 단편이며 간결하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글자 수에 따라 원고료를 지급했기에,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대문호의 작품도 길다는 느낌을 받기 쉬운데, 체호프는 그에 연연하지 않고 재밌고 간결하게 글을 쓰는 것에 집중했다. 지금 소개할 소설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 이 소설도 간결하기에 읽기 크게 부담이 없는 소설이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얄타에서 만난 남녀의 불륜 행각이다. 도덕적으로는 찌푸려지는 소재를 통해서 체호프는 사랑을 말하고자 한다.



1)구로프에 관하여



[“저급한 종족들!”

멋대로 불러도 될 만큼 여자들에게 제대로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그 ‘저급한 종족’이 없이는 단 이틀도 살 수가 없는 위인이었다. 남자들이 모인 곳에서는 지루하고 불편해했으며, 말이 없고 차가웠다. 하지만 여자들 사이에 있을 때는 편안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잘 알았다. 심지어 여자들과는 말없이 앉아 있어도 힘들지 않았다.

외모, 성격, 그리고 기질 자체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어 그는 쉽게 여자들의 호감을 얻었고, 그네들을 끌어당겼다. 그도 이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자신도 어떤 힘에 이끌려 여자들에게로 향하곤 했다.]



이 대목은 구로프의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일찍이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하여 이미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중년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여자를 만나고 다니며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았다 생각했다.

여자들 이야기가 나올 때면 저급하다고 학을 떼면서 여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모순덩어리, 그것이 구로프이다. 비단 이 대목뿐만 아니라 작 중에서 구로프는 모순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 구로프는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미래에 자신이 겪을 고난에 대해 염려는 하지만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운명의 피해자라는 견해가 있으며 오직 사랑에 집중한다.



2)안나에 관하여



[그는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를 이야기했고 참을 수 없이 열정적이었으며, 그녀 곁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종종 생각에 잠겨 그가 그녀를 존중하지 않고,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며 속물스러운 여자로 여긴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제 안나의 이야기이다. 단출한 문장이지만, 안나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나는 도덕적으로 민감한 여자이다. 그녀 역시 구로프와 비슷하게 일찍 결혼하여 남편에게 사랑을 못 느끼고 흡사 ‘하인’ 같다고 여기지만 당시 사회적 도덕관에 맞추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아는 여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타락한 여자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뿐이다. 남편과의 관계를 청산하지도, 구로프와의 밀회를 그만두지도 않고 오직 하소연할 뿐이다. 작 중 구로프는 안나에게 최선을 다하며 사랑을 바친다. 물론 그 방식이 전부 옳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안나는 확신이 없다. 그동안 살아오고 배워온 가치관이 확신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하지만 구로프를 사랑하기에 그를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안나는 결정한 것이다. 사랑으로 도덕에 변명하기로



3)구로프와 안나의 사랑에 관하여



[그러자 조금만 지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새롭고 아름다운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구로프, 안나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둘은 새장에 갇힌 새와 같은 형국이다. 둘의 만남은 불륜이기에, 파국을 부를 것이다. 그들도 그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희망적일 것이라고 조금 뜬금없지 않은가?

여기서 영화 ‘졸업’의 결말이 겹쳐졌다. 결국, 사랑을 이루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했고 함께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다음은? 과연 그다음이 대책 없이 희망적일 수 있을까?

그래서 체호프는 다음 문장을 덧붙인다.



[아직 멀고도 먼 길이 남아 있으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두 사람 모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흔히 사랑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사랑은 좋고 행복한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사랑이 아름답기만 할까? 많은 사람이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사랑이라 지탄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체호프는 가장 손가락질받을 수 있는 사랑인 불륜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사랑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사랑은 우리 삶 그 자체이다.



구로프와 안나의 사랑은 천박한 연애로 그려진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불륜을 더해 고결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이 선악을 구별조차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또 다른 안나처럼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심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편하게 사랑에만 빠지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미래를 염려하면서 그저 삶을 살아가고 사랑에 대한 희망을 품기도 한다.



이것이 체호프식의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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