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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세운 집 - 기호학으로 스캔한 추억의 한국시 32편
이어령 지음 / arte(아르테) / 2015년 9월
평점 :
언어로 세운 집
교과서에 수록돼 있는 명시들을 ‘언어의 미학’이란 프리즘으로 다시금 해석해 보는 책이다. 오로지 문제풀이를 목적으로 밑줄쳐가며 하나하나 분해하듯 읽었던 시들이 보다 넓은 이해의 대상이 되어 이 책에 새롭게 펼쳐져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에게 이별의 정한(情恨)으로만 그 중심내용이 강요되었던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언제나 ‘지금‘인, 그래서 더욱 소중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였다. 또한 공감각적 심상과 모더니즘 계열이라는 짧은 도식만이 강조되었던 김광균의 [외인촌]은 ’촌락의 시계, 종소리‘가 주는 시차 적응의 긴장 속에 시인이 의도한 시적 공간이 숨어 있는 시였다. 이처럼 수업시간에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해석과 해설이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저자가 파헤쳐보고 있는 여러 시들의 해설을 보면서 문득 저자의 생각과는 별개로 묘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책에 등장하는 몇몇 시에 대입해 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특히 김광섭의 [저녁에]와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에서 더 그랬다. 시 [저녁에]에서는 다시 만날 별을 기약하고, [엄마야 누나야]에서는 엄마와 누나와 함께 강변에 살자고 노래한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그런 바람을 무참히 짓밟는다. 나를 바라봐줄 그 별은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의 무게는 내가 고개를 위로 올릴 틈을 주지 않으니 말이다. 또한 강변도 그렇다. 애초에 강변이 남성성에 파괴된 공간이라면 지금의 강변은 자본에 오염된 공간이다. 그 공간에 억지로라도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엄마, 누나들을 밟고서 자본의 꼭짓점에 있어야만 한다.
필요이상의 감정이 이입된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책 속의 시들을 이리저리 파헤치는 저자의 생각을 좇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샛길로 빠지게 되는 점이 있는 거 같다. 그만큼 이 책이 쉬이 읽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기호학적인 분석과 이전에 접하지 못한 새로운 해설이 더해진 까닭에 정말 익숙한 시가 등장함에도 책의 내용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널리 알려진 명시가 제대로 조명되고 분석되지 않았다는 걸 꼬집고 증명해 보여주는 게 아닐지. 그러니 저자의 해설을 품고서 다시금 책 속의 시를 음미해 본다면 전과 다른 느낌으로 시가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